발람(12)
하나님의 통치
한번은 어떤 “교회외식주의자”가 한 열렬한 복음주의자에게 이렇게 도전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당신의 교리는 부주의한 삶을 조장하기 쉽지 않겠는가?” 그러한 도전은 가볍게 물리쳐서는 안된다. 거기에는 이런 진리가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그들의 영원한 안전을 자랑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거룩한 삶을 드러내고 있는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확고부동하게 말하는 반면 그 삶은 신랄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그러한 해이된 삶에 대한 처방이, 의심과 두려움의 먹구름이 깔린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일까?
모름지기 진리는 균형이 잘 잡힌 가운데 이해되어야 한다.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가르침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 똑같이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할
진리의 두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통치(government)이다. 이들 두 측면은 하나님의 지상 백성 및 천상 백성과 관련해서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발람의 모든 비유와, 특히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라는
말씀에서 밝게 빛난다(민
이러한 원리보다 공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의 결함을 봐 줄리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종종 눈감아 주지만 하나님의 길은 항상 의롭다. 만일 그분이 자기 백성에게 도량을 베푸신다면 어찌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는가! 아울러 우리는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이 사람의 아들들에 대한 그분의 섭리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엡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는 악행들은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상 유난히
어두운 장을 이뤘으며 유난히 가혹한 징벌을 초래케 했다. 이후의 성경에서 바알 브올은 극히 엄중한 표현으로
소개된다 (수
아모스 3장 1,2절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원리는 여러 세기에 걸친 이스라엘의 무서운 고난-열국 역사상 유례없는 고난-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최악의 고난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마지막 환란으로부터 겸비하고 부서진 상태로 나타날 때 그 백성은 여호와의 통치적인 치리의 공의로움을 시인할 것이다. 더 이상 율법 안에서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거절당하신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표현된 그분의 은혜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로써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위치인 열국의 머리를 차지하기에 적합하게 되어 열국을 의와 평화의 길로 이끌 것이다.
바알브올에서의 이스라엘의 범죄함과 그 결과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오늘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 대한 경고로 특별히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극히 엄중하게 선언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구약의 역사의 영적인 가치가 이같이 강조되어 있으며, 로마서 15장 4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민수기에서 발견한 동일한 진리의 두 측면-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통치 -이 고린도전서에서도 발견된다. 바울이 서신을 쓸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태는 통탄할 만했다. 분당(1장), 극심한 부도덕(5장), 세상
법정에의 소송(6장), 우상 신전에서 먹고 마심(10장), 주의 만찬에서 먹기를 탐함(11장), 말씀사역의 무질서(14장), 부활에 관한 위험한 교리(15장)
등 거의 모든 형태의 악이 활동했다. 그 모든 것 위에,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그 헌신적인 사람(바울)을
향한 천만부당한 감정을 품는 과오를 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무서운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이라고 일컬었다(고전
6장에서 고린도인들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웁게 진술되어 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대다수 성도들이 이전에 이교도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 중에 유대인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 당시 헬라인들은 교양과 학식이 풍부했다. 그들의 예술작품은 오늘날도
찬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함께, 오랫동안 세상을
뒤덮은 우상 숭배의 열매인 극도의 도덕적인 타락이 뒤따랐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핍박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계속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
“오 비할데 없는 은혜의 하나님,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께서만 주장하실 수 있는 자리에
우리가 열납되어 서 있으니
당신의 음성을 우리가 즐거이 들으며 당신
의 자비 안에 우리가 즐거워합니다.
당신의 즐거움은 당신의 아들 안에 있기에
우리를 그분 안에, 당신의 그 거룩한 자 안에 두시니
당신의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고
당신의 은총이 여기에 있는 우리 위에 비추옵니다! “(한나 K. 불링험)
또 다른 은혜의 귀한 선포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발견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이 장에서 여섯번 반복된 “알지 못하느냐?”는 물음은 고린도인들이 가르침받았으나 놓치고 만 중대한 진리를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무서운 위험성이 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발람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저를 친근히
하는 이스라엘 자손”(시 148:4)-의 범죄에 분개하신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고린도 성도들, 즉 그분께 더욱 친근하고,
이스라엘보다 훨씬 풍성히 축복받은 백성의 범죄에 분개하신다. 두 경우 모두 징벌이 따랐다. 바울은 성도들이 장차올 날에 세상과 심지어 천사들까지 심판하게 될 것을 고린도인들에게 상기시켰다(고전
하나님의 통치는 베드로의 서신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그의 첫번째
서신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된 관심사이고 두번째 서신에서는 세상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룩한 삶을 권하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베드로는 이와 관련하여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
브올의 아들 발람에 관한 이 오래 전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실로 소중한 진리의 원리들이 펼쳐 있다!
(1) 원수의 악의도, 하나님의 백성의 불충성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이 사실이 대적의 입술로부터, 대적의 땅에서, 그리고 파괴자가 듣는 중에 선포되었다!
(2) 그분 자신에게 친히 가까이 이끄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임한다.
(3)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들을 향해 어두움의 권세는 뿌리깊은(그러나 아무 효과없는) 증오를 드러내고 있다.
(4) 그들이 거룩의 길에서 벗어날 때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깊은 관심 속에 주의깊게 살피신다. 아무 요청이 없어도, 그분은 자기 백성과, 그들을 해치려는 모
(1996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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