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령
창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면 지역교회와 몸된교회에 관한 진리가 드러난 이후에 그것을 모임에 실행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고 평안이 늘 마음 속에 자리잡고 …. 이럴 줄 알았는데 가끔씩 너무나 자주 라오디게아 교회 상태처럼 미지근해지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무엇인가? 겉모양은 말씀과 위배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마음이 생기는가? 때때로 주님께 감동이 되어서 감사를 드릴 때 참으로 마음에 눈물이 있고, 주님 앞에 찬송이 있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감동이 있는 적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마음이 냉랭하고 딱딱하고 반응이 없는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될 때에, 진리를 받아서 진리대로 행하는데 왜 내 마음은 더 이러한 것들이 많은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한 와중에 가정에서 어떠한 문제들 때문에 화를 낸다든지 또 그것과 겹쳐서 직장에 가면 묘하게 일이 잘 안 풀려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들이 나오면서 평안을 잃어버리게 되고 모임에 와서는 모임에서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기도하고 감사를 하지만 하나님과 실제로 마음으로 연결됨이 없이 마치 율법을 지키는 의무처럼 행하는 이러한 경험들을 종종 해오면서 왜 이러한 상태가 나에게 있는 것일까?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인도함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들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성령이라는 주제로 교제드리겠습니다.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 풍성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전부를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이 성령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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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하나님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에, (둘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두번째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기에 좋았더라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십니다. 이 말씀을 이루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신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들 때도 욥 33:4에서 “여호와의 기운이 내 코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었지만 그 속에 생기를 집어넣으므로 생령이 됩니다. 말씀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되 그 말씀대로 된 결과가 하나님의 신의 능력으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 3장에서 주님은 거듭나야 하는 말씀을 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믿기로 성령이 말씀을 사용할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말씀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을 하면서 이것이 시간적으로 어떻게 지속이 되겠습니까? 제가 느끼는 것은 제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의미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라오디게아처럼 만들 위험성이 다분히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어떤 생각이나 지혜를 끌어서 하나님의 교회에 집어넣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위험하다는 자신을 느끼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출입할 때 두 가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 그 하나님의 교회를 변질시키든지 아니면 내가 온전히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도록 협력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성령은 절대적입니다. 왜 우리들에게 성령이 영원히 거하도록 하셨겠습니까?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활동을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성령이 관여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됩니다. 왜 말씀대로 하면서 마음이 딱딱해지겠습니까? 왜 말씀대로 하면서 기쁨을 상실하겠습니까? 성경이 성도님들의 모든 삶에서 관여하셔야 됩니다. 이것을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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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셋의 후손을 말함)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의 심판을 명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자녀들이 태어났는데 4절에 보면 이들을 네피림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네피림은 난하주에 보면 장부라고 하는데 아주 건장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결혼을 했는데 그 낳은 자손들이 굉장히 강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사람들은 말을 할 것입니다. “아! 축복받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향해서 심판을 명하시며 유예기간을 120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은 결과를 중심으로 말씀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 하나님은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심판을 명령하셨고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을 두셨고 120년 후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이 사람들에게 반드시 행해질 것입니다. 그 120년 동안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멸망하는 짐승같이 달려가고 있는 멸망의 길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 길로 가서는 안된다고 사람들과 다투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 다툼의 시간이 다 지나서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 결과를 말했습니다만 킹제임스 성경은 과정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성령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성경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지만 지금 막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 악한 것이 극단적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달려가는 이 악의 길에서 막을 수 있는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분은 성령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막는 자는 틀림없이 성령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세상을 향하여 세 가지로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고 했습니다(요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이 보신즉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여러분의 달려가는 그 멸망의 길에 서서 마치 옛적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선고된) 가운데 그 실행이 120년이라는 유예기간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들이 달려가고 있는 멸망의 길을 막았듯이 지금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 말씀을 통해서 찔림을 받게 하고 이런 책망의 역사로 말미암아서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의하면 우리가 본능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생겼었는데 이것은 절대적으로 성령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전
먼저 말씀드렸듯이 거듭나는 것은 두 가지로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이 사용하게 될 때 그 사람은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영원히 그 사람의 심령 속에 들여보내도록 하나님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사람 편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상호 인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도장을 함께 찍는 것입니다. 이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지 못하다면 저희들은 그야말로 지식적인 구원이라고 하는 위험성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찬송을 드리거나 이런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때에 성령은 절대적으로 우리들의 의존대상입니다. 성령은 물론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성령의 모든 활동에 성령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믿음생활에서 어떻게 실족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이 세상을 이기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담대함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성령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저희들에게 성령을 영원히 허락하셨습니다. 이 성령, 하나님의 한 위(位)이신 성령이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습니다. 봉사를 할 때 성령으로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평가를 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있기를 원한다면 모든 봉사와 찬송과 예배와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서 성령으로 행해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습니다. 사람이 행하는 것은 썩어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으로 출발해서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삶의 원리는 이것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지성소의 교제라고 불리우는 곳, 요 13장부터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가 성령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
주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칭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는 한편으로 보혜사의 역할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뒤에 오시는 성령을 가리키기를 또 다른 보혜사라고 칭했습니다. 보혜사는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존재를 말합니다. 주님은 이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의 어떤 고민이나. 어떤 말씀에 대한 의문이나, 또한 힘이 빠졌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 가서 묻거나 주님에 대해서 의지하거나 주님께 말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제자들을 보호하고 은혜를 베풀면서 지상을 3년동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한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생애를 보게 되면 이런 보혜사적인 일들을 제자들을 위해서 많이 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주님처럼 주님이 올라가신 이후에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과 똑 같은 마음으로, 똑 같은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이끄실 것이라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는 이름을 칭하셨습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 바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의 흔적들은 우리 눈에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흔들린다든지 사람이 숨을 쉰다든지 또 태풍이 불게 되면 바람의 흔적들이 남아 있게 됩니다. 그 흔적들을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바람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람의 흔적들을 보기 때문에 바람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흔적은 남아 있습니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성도들 자신입니다. 먼저 말씀드렸듯이 성도들은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해서 찾은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의인이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도우셨겠습니다. 성령의 활동의 결과물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어디 있느냐? 성령이 어디 있느냐 세상 사람들이 물을 때 그 활동의 증거인 나를 보라고 말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눈에 보이는 주님이 없다할지라도 그 주님처럼 똑같은 마음과 목적을 가지고 제자들을 인도할 또 다른 존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한 위입니다. 주님과 똑같이 이 분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십니다. 그리고 이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하고 불렀습니다. 롬 8:16절에서 성령에 대해서 킹제임스역에는 itself라는 성령 그 자체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어떤 영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저는” 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인격체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 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제자들은 주님과 다니면서 주님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진리를 얻고 이 진리를 기록함에 있어서 제자들 자신들의 기억력에 의존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 제자들을 통해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에 관한 복음서는 오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의 기억력에 의존되어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주님 자신을 증거합니다. 요
그리고 성령을 주님께서 오늘은 손가락, 내일은 몸통 이렇게 주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구원받을 때 그분은 하나의 인격체이기 때문에 그분 전체를 똑같이 주십니다. 그런데 왜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분을 받은 것은 성도들이 다 똑 같지만 그분이 차지하고 있는 우리 마음의 범위는 다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치 제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어떤분이 손님으로 들어 왔습니다. 형제님 잘 오셨습니다. 거하실 방은 문간 앞에 있는 이 방입니다. 저기는 제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출입을 삼가 해주시고 안방과 거실까지는 다니셔도 됩니다. 이처럼 활동범위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이 제한의 환경과 범위 때문에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어떤 역사들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 전체를 인격적으로 다 주셨습니다. 이분은 우리 마음 속에서 주님과 연결을 시킵니다. 주님을 높이고 주님만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 성령은 세상을 향해서 뭔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 왜 그 복음이 효과가 있습니까? 성령이 세상을 책망하는 이 일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도자가 말을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극히 걱정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말의 지혜에 있지 않기를 바울은 극히 조심했습니다. 무엇에 의존되기를 원했습니까? 성령의 나타남과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질문에든지 복음적으로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논리적으로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설득이 아니고 논리적으로도(논리를 뛰어넘는) 아니고 정말로 한 영혼이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이 역사를 알기 때문에 전도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구원받은 사람을 양산한다면 얼마든지 사람들의 지혜를 찾아서, 머리를 잘 써서 복음을 이해한 다음에 사영리를 만들어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설득하거나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고, 머리속에 집어넣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분명히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은 이 일 때문에 오셨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성령이 하늘에서 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이 땅을 걸어가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셨듯이 성령이 오셔서 이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증거를 주의 할 것은 그 사람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뭔가 압박감을 가해서 그 사람을 구원시키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십니다. 이 성령의 증거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걸어가실 때의 증거와 특징이 똑 같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증거하실 때 어떻게 증거하셨습니까?
주님의 증거는 그 사람들에게 분명히 증거했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우리보다 얼마나 더 원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히 바라시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코를 꿰서 지옥의 길에서 나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그 사람의 상태와 필요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지적으로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증거를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증거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증거도 동일한 것입니다. 구원받으려고 온 사람은 구원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참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놀라운 선물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철저하게 의존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 증거하는 증거자의 책임은 그 사람이 핑계할 수 없는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행
제가 이전에 기도하기를 ‘좀 더 성령이 저에게 역사를 많이 하셔서 좀 더 영적으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이 기도 후에 한참 지난 뒤에 생각을 해보니 그 기도 속에 어떤 위험성이 들어 있었느냐 하면 성령이 지금 자기 일을 잘 안하고 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을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지금 하시고자 하는 일들은 오시고 난 후부터 계속 충성스럽게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 일에 내가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더 성령이 역사하거나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기본적으로 이미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이 일에 내가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좀 더 나를 사용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처럼 그리스도를 잘 설명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복음말씀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분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는 이분만큼 그리스도를 그 구도자에게 실제로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그 마음에 접촉시킬 수 있는 분은 성령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말을 잘하고 설명을 잘 해도 사람은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의지해서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그 영혼의 마음 속에 주님이 닿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영혼이 참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저희들은 말씀을 아무리 알아도 겸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정말 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령이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참으로 죄로구나 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그 사람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을 말씀적으로 그 사람이 깨달아지면 그 일은 틀림없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성령 외에는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성령이 이 세상에 왔다는 그 자체가 뭔가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도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이 앞에 뭔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즉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이 땅에 와 있다는 그 자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뭘 말하느냐면, 주님이 부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주님께서 아버지께 받아서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이 땅에 와 있다는 그 자체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주님이 지금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그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생각을 하고 주장했습니다. 성령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신 것은 그분 자신의 허물이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을 성령이 오셔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사단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사단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면 사단에게 속한 무리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자명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한 말씀도 머리 속에, 마음 속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들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 계시록은 틀림없이 요한에게 장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 장래 일을 요한에게만 알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도 알렸고, 베드로에게도 알렸습니다. 이 알린 장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장래 일을 바울도 말을 했고 베드로도 말을 했고, 요한도 말을 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앞으로 일어날 장래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장래 일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도 증거를 했고 베드로도 증거했고, 요한도 증거했습니다.
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주님의 영광을 실제로 어떻게 감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것을 어떻게 감지하고 그 영광과 그 소중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도우셔야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적으로 구원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의 모든 삶에 성령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은 성령에 대한 모든 것이 아닙니다. 극히 일부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말씀드리며 바라는 것은 이러한 교제를 통해서 저희들이 성령을 주목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성령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 성령에 주목하기는 틀림없이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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