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
오늘은 하나님과 사람들과 자신을 각각 향해서 주시는 교훈들을 몇가지 찾아보겠습니다. 특별히 디도서에 보면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이 있으며, 살전
딛
여기에 보면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가운데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이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엡
제가 만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교제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논리가 “너는 몇 살인데 아직도 교회를 졸업하지 못하고 다니고 있느냐? 그 친구 논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학교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 배우면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학교에서 졸업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우리가 주님의 양육을 받는데 있어서 졸업을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많은 양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주님의 양육을 받아야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의 3가지가 있는데 이를 생각해 보면 근신함은 먼저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경건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근신이라는 말이 나오며, 그 다음에 절제라는 말이 나오며, 제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때 보면 근신하며, 절제하며, 제어하라(벧전
제어하고 근신과 절제의 차이를 보면 제어는 훈련을 받아서 절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근신은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근신이라고 하며, 절제는 불법적인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근신은 해도 되는데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절제는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거나 음행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근신이라기보다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기에 절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근신은 해도 되는 데 하지 않는 것 즉, 어떤 오락을 해도 불법이 아닌데 하지 않는 것을 근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근신이라는 것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 취하는 태도인 것을 볼 수 있고, 의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 옳아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은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로워서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백부장으로부터 ‘저분은 의로운 자였다, 저분은 옳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님은 의로우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은데도 주님께서 의롭다고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최종적으로 나아갈 때 저 사람의 증거는 옳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의로움을 좇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양육을 받는데 있어서 중요하냐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을 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근신하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세가지 보조를 다 맞춰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원만해야 되고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근신함을 가지고 있어야 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딛
딛 3장에서는 세가지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예들이 나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개인과의 관계에서 잘못되어 있는 것이 딛
먼저 잘못 되어 있는 것을 먼저 보고 옳은 모습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5,6,7장에서 한 말씀들이 이 말씀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딛
여기에 보면 어리석은 것과 순종치 않은 것이 나오는데 이 말씀은 시편에서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에서 누리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라는 것은 지각과 분별력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에 대해서 영적으로 무능한 소경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순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설복 당하지 않으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순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신뢰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 다음에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를 보면 여기에 속은 것과 악독에서 악독이라는 말의 핵심적인 요소는 벧전
속은 것은 내가 속았다고 아무리 말할지라도 속은 사람이 책임입니다.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한 이유를 주님 앞에 말할 때 우리가 속았다고 할 때 그것은 속인 사람이 책임이라기보다도 속임을 당한 당사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속았다고 하는 것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를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것 이것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 이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투기를 보면 벧전
갈
사랑과 희락과 화평-하나님과의 관계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 사람들과의 관계
충성과 온유와 절제 – 자신과의 관계
절제라는 말을 통해서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참음과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되며, 그리고 희락, 화평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평강을 말할 때에는 주님께서 “평안하냐?”고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에서 이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필로스 사랑이 아닌 것이며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하나님이 오래참고 기다리실 때’의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보아도 사람들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오래참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이웃에 대한 친절한 태도를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선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친절한 태도를 취한다든지 착하다든지의 의미이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 충성과 온유와 절제, 성경에서 충성이라는 말이나 성실이란 말이나 신실하다는 말들은 이 세상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충성했듯이, 주님이 충성했고, 우리도 주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온유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하신 주님의 인격 가운데 포함된 것입니다만 온유도 자신과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절제도 마찬가지로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외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도 있지만 세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는데 이 세가지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시간에 교제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근신함과 절제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관련은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이러한 관계를 우리가 생각해 보고 점검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마 5,6,7장에서 주님이 산에서 하신 말씀의 이 표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장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함은 지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7장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근신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5장에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며, 음행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장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착한 행실을 드러낼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함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6장에서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특별히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했을 때도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말씀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볼 때 6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6장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6장은 먼저 그 나라의 의를 구하고, 재물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구하고, 기도하거나 헌신할 때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기도생활이나 주기도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7장에는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가운데 남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진실함이 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믿음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주님을 섬기면서 보니까 우리가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대화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계속하는 것은 요한일서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라고 어떤 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전화를 해서 다른 사람의 흠에 대한 얘기로 쭉 하다가 끝내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교제가 사실 아닌 것입니다. 교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듣는 것을 의미하며 교제가 끝나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 마음에 남는 것이 교제의 결과인 것입니다. 앞에 나와서 교제하는 형제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교제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것은 사실은 교제의 핵심이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교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는 것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장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는 말씀이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내게로 올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자신이 주님 앞에 복종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며 주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7장에서는 자신과의 관계를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살펴본 결과 주님은 우리에게 세가지 관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함이나 거룩함은 지켜야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옳다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주님의 의로서 옳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의 삶 가운데서는 변화되어 주님 나라에 가기 전에 저 형제의 증거는, 저 모임의 증거는 옳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을 좇아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진실함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근신함과 절제함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자신을 각각 향해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교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나 자신과의 관계를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생각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한쪽 면 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없잖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형제는 모임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과의 관계나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모습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형제는 모임 생활을 잘 하면서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마치 구원받은 것처럼 거짓으로 믿음을 가장해서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신과의 관계도 동일하게 지키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딤전
특별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칠 때에 의가 맨 앞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포에선가 교제할 때 굉장히 많이 강조를 하시는 것을 제가 주의깊게 들었습니다. 성경에 여러가지 덕목이 나오는 가운데 의가 맨 앞에 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의로움보다도 경건함과 거룩함을 먼저 보았습니다만 의가 맨 앞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 외에도 의가 많이 나오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 6개를 가지고 2개씩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개씩 나누어 보면
“의와 경건”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여기에 의가 있는데 의는 지금까지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의와 경건,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 이렇게 볼 때 의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이고 경건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와 경건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묻기가 성경 전체를 볼 때는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렇게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를 묶어서 믿음과 사랑은 우리 안의 것을 말합니다. 이 네가지가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믿음과 사랑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와 온유는 자신 밖의 것을 말합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내적인 힘을 가지고 외적은 인애하고 온유함을 드러낸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딤전
빌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그 다음에 긍휼이나 자비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이 말씀을 볼 때 권면하고 위로하고 교제나 자비가 각각 달라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 말씀에 관한 것을 찾아보니까 권면은 뿌리라고 합니다. 어떤 나무가 뿌리를 통해서 나무를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권면은 뿌리라고 하며, 위로는 열매라고 합니다. 권면에 의해서 위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교제가 뿌리라고 하면 긍휼이나 자비는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권면을 할 때의 결과가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교제할 때는 그 결과가 긍휼이나 자비로 나타나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긍휼이나 자비는 두 가지로 나와 있는데 긍휼은 내적인 것이고 자비는 외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을 할 때 그 권면의 결과가 위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 다음에 교제를 할 때 교제의 결과가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디도서 말씀과 데살로니가전서
-
'빛 가운데로 걸으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을 다 믿지 말고 (0) | 2009.06.11 |
---|---|
성령 충만 (0) | 2009.05.15 |
성 령 (0) | 2009.05.13 |
절대적인 굴복 (0) | 2009.04.30 |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0) | 2009.04.24 |
나의 신부(新婦) (0) | 2009.03.19 |
저희 중에서 나오라! (0) | 2009.03.07 |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0) | 2009.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