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올바른 해석(21)
성경의 이름들
성경은 사람과 장소로 가득차 있어서 이름으로 된 책이라 할만하다. 이 지구에 맨 처음 살게 된 사람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주셨다(창
특히 구약시대에는 이름이 임의로 붙여진게 아니라 사건, 희망, 믿음의 행사, 혹은 어떤 영감의 원천과 자주 연관되었다. 예를 들어 에녹은 자기 아들을 ‘므두셀라’라 불렀다(창
예언이 므두셀라라는 이름에 영감을 주었다면 야곱이라는 이름은 당혹감 때문에 지었다. 야곱은 쌍둥이였다. 그가 태어났을 때의 상황이 성경에 어느 정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창 25:21∼26). 리브가가 아이를 가졌을 때, 뱃 속의 소란스러움으로 고통스러웠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胎(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腹)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라를 섬기리라”(창 25:23). 그리고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창 25:25,26).
에서는 ‘붉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서의 후손의 역사는 진실로 붉었다. 에돔의 역사는 헤롯 대왕에게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베들레헴의 남자 아이를 대량 학살하여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자이다.
야곱의 뜻은 ‘남의 자리에 밀어내고 앉은 사람’, ‘발꿈치를 잡은 사람’이다. ‘발꿈치’는 요즘으로는 ‘팔을 비튼다’ 혹은 ‘속이다’는 뜻이 있다. 야곱은 자기 이름에 어울리게 살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성경에서 야곱은 계획을 세우고, 음모를 꾸미고 일구이언하며 형, 아버지, 외삼촌 라반을 그렇게 대한다. 물론 라반은 야곱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브니엘에서 만나 그를 굴복시키고 깨뜨리시며 축복하시고 그 이름을 하나님의 왕이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실 때까지 그러했다.
야곱의 후손은 이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의 자손이라 불리우는 것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주권적 목표가 이 민족의 역사, 운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민족이 얼마나 목이 곧고 반항적이었는지! 반면에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고 은혜로우신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시 46:11).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시편 기록자가 여기서 셀라라는 후렴구를 붙여 놓았다-”당신은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의미로 성경에 있는 매우 많은 이름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치 성경의 모든 이름이 어떤 영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될 정도이다.
사람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장소의 이름도 그렇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을 생각해 보자. 이 이름엔 ‘평화’의 뜻이 담겨있다. 성경에서 이 도시(城)가 처음 언급될 때 살렘, 즉 평화라고 불리우고 있다(창
요점은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분 안에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시 85:10)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강의 도시 예루살렘은 이제껏 역사 가운데서 거의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이렇게 많이 정복당하고, 전쟁을 겪고, 불타고, 약탈당한 도시가 또 있었던가? 그러나 어느 날 이 도시는 진실로 평화의 도시, 이 지상에 세워질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의 수도가 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매우 엄밀하게 쓰였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대체로 자신의 이름을 통해 계시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3개의 이름이 있었다. 첫째가 ‘엘로힘(Elohim)’이다. 가끔은 엘(El)이나 엘라(Elah)로 축약되기도 한다. 이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창
두 번째 이름은 ‘여호와’이다. 이 이름은 ‘영원하신 분’,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다(출
세 번째 이름은 ‘아돈’ 혹은 ‘아도나이’이고 일반적으로 주(主)로 번역한다. 이 이름의 기본적인 뜻은 “주인”이란 뜻이다. ‘아돈’은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주인을, ‘아도님’은 소유주로서, 자기 소유를 통치하는 분으로서의 주인을 뜻한다. ‘아도나이’는 이 세상에 자신의 목적인 축복을 가져다 주시는 주인의 뜻이다. ‘통치자, 소유주, 축복하시는 분’이 이 이름에 담겨있는 뜻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이 기본적인 이름 외에도 ‘엘’ 혹은 ‘여호와’와 함께 쓰인 이름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엘 샤다이’(창
하나님은 ‘엘-엘리온’이다(창
하나님은 ‘엘-오람’(창
하나님은 ‘아도나이-여호와’이다(창
‘여호와 이레’(창
하나님을 그분의 이름으로 계시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특징이다. 이 부분을 보지 못하면 불완전한 성경해석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필요에 대해 이같은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것으로 채울 수 없는 사람의 필요란 없을 것이다.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칭호도 또한 똑같이 중요하다.
첫째, 구약의 엘로힘에 해당하는 일반적 단어는 하나님(those)이다. 이 단어는 아버지 하나님께(요
하나님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주 예수께서 특별히 계시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유일한 관계를 나타내고, 또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될 때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쓰였다(요
‘전능하신 주’(pantokrator)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창조주,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 말할 때 쓰였다(고후
‘능하신 자’(potentate)는 디모데전서
신약에서는 ‘주’(主)라는 이름이 하나님 대신에 자주 쓰인다. 이 단어 주(Lord)는 두 개의 헬라어와 한 개의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다. 첫째는 ‘퀴리오스’(kurios), 즉 소유주라는 뜻이다(눅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그리스도께 사용되었고(마
‘예수’(구약에서는 여호수아, 요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구원’이란 뜻이며 우리 주님의 사람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에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담겨 있으며(빌
신약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어떤 때는 ‘그리스도 예수’이다. 이 순서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이름)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직책)가 부차적 의미를 갖는다. 복음서에서는 단순히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뜻할 뿐이다. 서신서에서는, 자신을 낮추셨으나 이제는 높아져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영광 받으신 예수님이 강조된다. 그리스도 예수로 표현될 때는 그리스도(직책)가 중요하고 예수(이름)가 부차적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번 낮아지셨다 다시 높아지시고 영광받으신 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주’라는 표현은 신약에 한 번 나온다(눅
‘주인’(master)이라는 칭호도 신약에서 자주 쓰인다. 8개의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처음 3개는 주(Lord)로도 번역되었다. ‘퀴리오스’(kurios: 막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아버지와 아들 나이의 관계를 표현하고(마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인자’(사람의 아들)이다. 이는 88번 나오며 매우 특별한 칭호이다. 이 칭호는 예수님을, 첫 사람 아담이 저버린, 이 지상에서의 지배권을 가진 분으로 나타낸다. 맨 처음 나오는 곳은 마태복음
또 다른 한 편, 스데반은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인자로 본다(행
성경의 이름과 칭호, 특히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수백개의 인물명, 장소명 및 그 주변 환경을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서 살펴야 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름은 어원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사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문제는 여전히 있다. 사전에는 하나의 뜻 외에도 또 다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고 쓰여있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어는 자음만 사용하여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된 단어에 모음을 넣어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문장인 경우 문장 자체에 모음을 넣는 단서가 보통은 나와있다. 그러나 이름은 다르다. 이름은 보통 문맥에서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없고 그래서 자음에 다른 모음을 집어넣게 되면 스펠링 자체가 애매하게 된다.
성경의 이름이 여러 뜻을 갖고 있으므로, 그 이름에 어떤 핵심적 역할을 부여하려면 조심해야 한다. 이름의 뜻이 분명한 경우 그 구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경우에는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199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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