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그의 생애와 그 시대
사무엘 W 제밍스 지음/ 장세학 옮김
25장 창세기 8장의 신실한 창조주
주님의 신실하심이 8장 전체에 밝히 나타나는데, 첫째는 노아에게 그러하였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1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분의 눈은 그분의 백성들 위에 있다. 하나님은 그토록 엄청난 홍수가운데서 너무나 초라하게 떠있는 노아를 기억하셨다. 주님의 손에 의한 심판가운데서도 그분의 눈길은 제사로 그분과 언약을 맺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요한복음
동일한 사실을 계시록의 144,000명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 환난 가운데를 통과할 것인데,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서 그들을 해하려 할 것이지만 그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신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와 함께 시온 산에 나타날 것이다. 모든 괴로운 고통은 지나가고, 그들은 영원히 우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피조물들은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1절). 그것은 물을 증발하게 하는 따스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홍해를 가르실 때 동풍을 보내셨다(출14장). 그 바람은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계시록에는 천사들이 지상의 바람을 붙잡고 있음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것이지만 주님은 바람에게 명령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또한 풍랑 이는 배 가운데서 바람을 꾸짖기도 하셨는데, 그때 바람이 아주 잠잠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그분께 복종하도록 지어졌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또한 주께서는 일들이 점진적으로 성취되도록 하신다. 그 산꼭대기가 드러나는데 150일이 소요되었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일백 오십일 후에 감하고”(3절).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시고 그분의 일을 점진적으로 이루신다. 이것은 주께서 성경의 첫 장을 시작하심과 함께 가지신 하나의 원칙이다. 창세기 1장에서 주님은 매일 어떤 일을 하셔서 육일 동안에 마치셨다. 물론 우리가 믿건대 주님은 하루만에 그 모든 일을 다 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이 계시의 위대한 주제이기도 하다. 주님은 모든 것을 짧은 기간에 다 보여주지 않으시고 무려 150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시를 완성하셨고,이제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그 원리는 우리의 삶 속에 적절한 관련이 있다. 우리는 많은 군중 속에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는 자지만 주님의 눈은 우리 위에 있다. 그분은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신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장래의 사도직을 위해 베드로를 주께서 어떻게 훈련하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예를 볼 수 있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의 학교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다소 비극적이지만 요셉의 놀라운 생애에도 나타난다 주님은 모든 신자의 삶에서 점진적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는 베드로 서신을 통해, 당시 주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셨음을 알 수 있다(벧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끝마치셨다. 불완전하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말씀의 중심 되는 위대한 진리들 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두르신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일을 마치셨다. 그분은 그들을 젖은 발 그대로 두지 않으셨다. 본문의 구절도 그러하다. “물이 걷혔더니 이 월 이십 칠 일에 땅이 말랐더라”(창
방주가 산 위에 머무른 것은 깊고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7월 17일이라는 날짜를 주목하라, 1월 14일은 유월절이었는데, 그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의 모형이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날이 바로 17일이다. 방주가 정착한 바로 그 발은 주님의 부활하신 날에 대한 비유이다 그러므로 방주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얻고 그분의 부활의 산에서 안식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흥미롭다. 그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것은 노아의 방주에 나타난 그림자적인 모습과 얼마나 적합한가!
8장은 두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1-14절까지 노아는 방주 안에 있었고, 15-22절까지는 방주 밖에 있었다. 이러한 두 부분은 매우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다. 방주는 폭풍우 가운데서 안전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고요가 임했다. 노아는 진흙탕이나 어떤 불편한가운데로 걸어가지 않았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임이 틀림없다. 이같은 주님의 사랑스런 사려 깊음은 마태복음 4장에 나타난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다. 그때까지는 요한의 제자들을 부르지 않으셨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고 더 이상 나을 수 없게 되자 바로 그때 주께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셨다. 만일 요한이 자유 할 때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아마 당황했을 것이다. 주님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셨으며, 그분은 자신의 종 요한의 기분을 고려하셨던 것이다.
노아의 제단은 최상의 것이다. 앞장에서 살펴보았지만 그 제단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반응은 주님에게 매우 큰 기쁨이 된다. 물론 이것이 노아에게 그 방주 안으로 정결한 짐승을 일곱 방씩 들여보내도록 명하셨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음을 엿볼 수 있다(창
21절은 달콤한 향기에 대해 언급한다. 이러한 제사는 나중에 례위기에서 발전되지만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다. 노아는 제단, 포도농사, 포도주 및 그 밖의 일들에서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다. 우리의 은사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바울은 복음 증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바울은 기도집회에서 남자들이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할 것을 권면했다(딤전
마지막 구절은 흔히 인용되는 것이다. 여기 노아의 가족을 천지의 광대함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시는 신실하신 창조주가 계시다. 하나님은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비와 바람뿐만 아니라 계절들도 주관하신다. 농부나 모든 지상의 수확물과 관련되어 있는 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 여기서는 재앙이 제거되지 않고, 점차로 줄어들었다. 땅은 경작되어야만 했다. 그 저주는 천년왕국 시대에 가서야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분은 물로 다시는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21절) 이것은 9장 11절에서 다시 강조된다. 주님은 땅을 다시 심판하시되 물이 아닌 불로 하실 것이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는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했던 증거와 일치하는데, 세례 요한은 분명히 이 땅이 불로 살라질 다가올 심판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다.
8장을 마감하는 구절은 가장 아름다운데, 그들의 매일의 생활은 이 신실한 말씀에 모두 의존하는 것이다. 그 네 가지는 가장 흥미로운데, 이러한 일들이 계속될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떤 지역은 때로 기근이 일어나지만 전지구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한 지역이 공허하면 다른 지역은 풍성하다. 영적인 면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적용된다.
씨를 뿌리는 시기와 수확할 때가 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 필연코 거두는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때로 많이 뿌렸는데도 별반 거두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수확의 법칙은 여전하며, 모든 일에는 심은 대로 거두기 마련이다(요
“추위와 더위”-우리는 항상 온화한 축복의 남풍만 경험하지 않는다. 때로 시련과 시험의 차가운 북풍을 겪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학교에서 성숙하려면 더위뿐만 아니라 추위도 필요하다.
“여름과 겨울”-둘 다 우리에게 준비와 섬김의 기회를 제공한다.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은 겨울과 여름에 일했다. 그녀의 수고로 들판에 곡식이 무르익고, 눈 오는 겨울에 자녀들이 따스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낮과 밤”은 기회들을 암시한다. 주님은 “낮에 일하라”고 권면하셨다(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커다란 교훈들을 담고 있다. 모든 먹구름은 밝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희망의 끝에는 먹구름도 있다. 성숙하게 구비되려면 축복과 책망이 다 필요하다. 그 연속적인 계절들이 땅에 열매를 맺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그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한 가지를 더 언급한 후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하나님이 함께 두 가지를 결합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은 다 정반대이지만 함께 작용한다. 그 중에서 가장대조가 되는 것은 16절이다. “너와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그분은 결혼한 부부가 모든 일에 있어서 함께 하기를 기대 하신다. 심지어 서로 정반대 되는 기질들이 오히려 성공적으로 함께 역사될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아름답게 함께 한 예가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이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항상 그들과 같게 해주시길 기도드린다. ♠<다음 호에 계속>
(199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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