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진 사역(2)
알렉산더 스타라우크
종의 자세를 가진 인도자에 대한 바울의 본
강하고 또한 은사가 뛰어난 인도자가 어떻게 사랑이 많은 겸손한 종의 자세를 가진 인도자가 될 수 있을까? 이해가 잘 되지 않거든 바울의 삶을 생각해 보라. 한때는 고집 세고 교만했던 바리새인이 사랑 많고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후
바울의 권위 사용에 대한 절제는 그의 겸손한 종의 자세에 대한 아주 좋은 본이다. 바울은 그의 자녀들의 믿음에 혼란을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을 당했다(고후
바울은 겸손한 종으로서 자신을 높이거나 드러내는 일을 피했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를 높였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바울은 고린도전서 첫 4장에서 고린도 성도들의 그 주위에 있는 능력 있는 교사와 일단의 무리에 대하여 우상화하려는 악한 성향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치 말라”(고전
하지만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바울의 겸손한 사역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했는데 이는 경건한 겸손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든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심지어 바울을 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전
겸손한 종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강하고 담대한 군사였으며 또한 인도자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힘과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삶 동안 그는 많은 어려움에 처했고, 악과 싸워야 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주를 섬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범죄한 성도를 그 육을 멸하도록 사단에게 내어주고(고전
종의 자세를 가진 인도자로서의 장로
장로는 지배자나 독재자가 아닌 종의 모습을 가진 인도자여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속이 좁은 폭군에 의해 이용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종의 자세를 가진 장로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한 사역에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종처럼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들의 시간이나 능력을 희생해야 한다. 오직 사랑과 겸손이 있는 장로만이 그 성도들에게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줄 수 있으며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독재적이고 또한 이기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도 주님과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아시아에 있는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의 사역에 대해 경고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덧붙여서 장로들이 종의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마땅히 겸손과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그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으며, 절충하고, 설득하고, 듣고, 의견 대립을 다루고, 용서하고, 책망이나 권고도 기꺼이 받고, 죄를 고백하고, 자기와 생각을 같이하지 않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지혜나 비젼에 대해 감사를 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서로 순종하고 친절히 말하며 그 동료들에 대하여 인내하고, 경의를 표하며, 사랑과 진실 가운데서 그들의 마음을 솔직하게 열어놓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 성품이 강하고 은사가 뛰어난 장로들은 자기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장로들 또는 장로에게 그들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라고 위협해서는 안된다. 장로들 가운데 충돌은 심각한 문제이지만 흔히 있는 일이다. 장로들 중에는 신성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연합을 가볍게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 위해 얼마나 쉽게 교회를 갈라놓는지 그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교회를 한 사람이 다스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문제 해결방법은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서로의 발을 씻기고, 회개하며, 순종하고, 기도하고, 교만을 버리고, 인내하고, 또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는 장로들이 서로에 대하여 불평하는 만큼만 서로 모여서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들의 많은 문제들과 불평들이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로직, 즉 백성들의 본이 죄기를 원하시는 지도력이다. 장로들은 좌절의 고통이나 문제들, 그리고 섬김에서의 충돌이 그들로 하여금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 중 하나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이러한 어려움들을 대한다면 그들은 주님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 그리스도를 닮는 목자로 변해간다는 것보다 더 전율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겸손한 종으로서의 장로라는 말은 권위가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장로들의 신분과 일을 묘사하기 위해 신약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하나님의 청지기, 감독, 목자, 인도자)는 그 책임과 함께 권위도 내포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권위가 없다면 베드로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고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목자로서 지역교회를 인도하고 보호할 수 있는 권위가 주어졌다(행
장로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된다. 장로들은 그 권위를 교묘히 이용하거나, 거만하거나 매정하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아무도(형제들이나 하나님이라도) 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된다. 장로는 권위적이어서는 안된다. 이는 겸손한 송의 모습과는 맞지 않는다.
잘 알려진 집필가인 페커(J. I. Packer)는 권위주위와 그의 죄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 영역에 권위를 사용한다고 해서 꼭 권위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권위를 사용하는 것과 권위주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권위주위는 부패한 권위로서 지나친 것이다. 권위주의는 요구된 순종이 진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거부될 때 나타난다. ...어떤 형태의 인간 권위든 이와 같이 변질될 수 있다. 국가에서 정치인들이 권위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불합리한 방법으로 권위를 사용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권위주의를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지도자들이 그 성도들의 양심까지도 지배하려 할 때 권위주의는 나타난다. 이는 또한 학교, 즉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당신이 배운 분명한 진리에 따라 행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생각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교수들에게서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가정에서 부모들이 그 자녀들에게 이유 없이 어떤 것을 명하거나 금할 때 나타난다. 권위에 대한 불쾌한 경험은 변질된 권위, 즉 권위주의자들로 인하여 온 것들이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에게 모든 형태의 권위는 다 나쁘다는 좋지 않은 생각을 심어준다. 권위주의는 악한 것으로서 반 사회적이며 반인륜적인 것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이는 스스로를 신성시하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맛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 “
우리는 주님과 사도 바울의 본을 생각할 때 성경적인 장로는 독재자가 아니며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해야만 한다. 진정한 장로는 그 형제들의 양심에 명령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진정한 장로는 고통을 감수하며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의 공격과 문제를 감당하여 양들로 부상당하지 않게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죄를 감당하여 교회로 평안 가운데 거하게 한다. 그들은 다른 자들로 쉬게 하기 위하여 잠을 설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힘을 소비한다. 그들은 자신들도 다른 자의 권위 아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자신의 명석함이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의미한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맹공을 막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자유를 지키고, 성도들로 그들의 은사를 개발하며, 성숙하고, 서로를 섬기도록 격려한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사랑장을 인용하여 우리는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오래 참고,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온유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투기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성내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참으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믿으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바라며, 종의 자세를 가진 진정한 장로는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할 수 있다(고전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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