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구원(20)
- H. p. 바커 -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성경구절들(6)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1-3).
우리가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받은 그들의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기의 아내를 등한히 여긴다고 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구원을 등한히 여김으로 그들의 구원을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기쁨과 복된 교제를 놓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 위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히 12:5-11, 고전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들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기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구원을 놓치게 된다든지 혹은 영벌(永罰)에 처하게 되리라는 뜻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퇴보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믿음으로 죄의 형벌에서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소유해야 할 모든 기쁨과 축복의 세계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되는 일”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히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롬 11:1-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즉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히 3:7-19).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아울러 히브리서 4:1-16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곧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땅이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가나안 땅은 여전히 싸움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이 없었던 연고로(불신앙의 연고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에서 누릴 수 있었던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 대신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소유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유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허락된 축복(엡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8)
여기 이 말씀은 신자들의 영원한 구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구절입니다. 이 부분에 나타난 말씀 전체를 자세히 읽고 또 그 아래에 나오는 몇 구절 말씀도 읽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믿는 자가 구원을 놓치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원을 놓친 자는 다시 회개하고 새롭게 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타락한 자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원받을 것을 촉구합니다. 만약 이 구절들이 믿는 자가 구원을 놓칠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와 동시에 이 구절들은 타락한 자들은 다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에서는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는 말씀이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
이 구절의 말씀은 하나의 가정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여기에서 어떤 내용을 사실인 것처럼 가정하므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거기에는 이러한 결과가 따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러한 결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처음의 전제()가 타당치 않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3-19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는 가운데서도 이 논리를 사용하였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먼저 부활이 없을 경우를 가정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 구절(히 6:4-8)이 이와 같은 논리를 따른 것이라면 기자는 여기에서 신자가 타락한다(구원을 놓친다는 것)는 것을 가정하고, 그 결과는 다시 회개하여 새롭게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가정은 사실이 아니고 신자가 타락하는 일(구원을 놓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
이 구절들은 구원의 문턱까지 왔다가 돌아서서 “타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은사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을” 뿐입니다. 맛본다는 것과 먹는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들은 “성령에 참예한 바 있는 자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이 보여주시기 전에는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이 사람들은 어느 추운 날 밤 어둠 속에서 길을 걷고 있던 사람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추운 밤중에 길을 걷던 이 사람은 열려 있는 문 앞까지 와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방안에서 나오는 따뜻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으나 방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맛을 보았을 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맛을 본다든지 진리를 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구절들이 그리스도인들(진실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어서 말씀된 히브리서
아울러 여기에 나타난 인칭의 변화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6:1-3에서는 “우리”로, 6절에서는 “타락한 자들”과 “자기”로, 그리고 9절에서는 “우리”와 “너희”로 나타나 있습니다.
세 번째 해석
나의 견해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성장을 계속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경고를 이 구절들에서 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줄로 생각합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요청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축복과 상급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며, 다만 불에 타버릴 행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앞의 말씀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불신앙으로 약속의 땅(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예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그 땅의 거민들을 그들 앞에서 몰아내시기로 약속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였을 때에도 그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고 결국은 “그 시체가 광야에서 엎드러진 자들”이 되었습니다(히
또 히브리서 4장에서 기자는 신자들을 위한 안식이 있으나 어떤 자들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바로 이 안식의 비유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늘나라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이 승리를 가져다 주는 장소이기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그 장소에는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나안 땅은 신자들에게 영적 성숙을 의미하는 장소,즉 승리와 축복과 안식이 있는 장소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5장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기자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진리가 많으나 그들이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이들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6장 말씀에서도 계속되어 기자는
렌스 B. 라잠(L. B. Latham)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에게 회개가 일어날 수 없다고 한 것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회개를 말한 것이다. ‘듣지 못하고’ ‘젖만 먹는’”이들, 즉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무서운 경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은 무서운 경고는 필요하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과 지혜에 있어서는 저들이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이것은 칭의와는 관계가 없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하여 들보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여주시고 대적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영적인 성숙을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비록 거부하는 때가 있을지라도 그의 백성들을 버리지는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자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은 자.”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새의 능력을 맛본 자.”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임이 틀림없습니다. “한 번 비췸을 얻고”라는 말씀에서 “비췸을 얻다”는 히브리서
“하늘의 은사를 맛본 자들.” 이들은 맛을 본 자들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단순히 구원을 시식하였다든지 혹은 실제로는 믿지 않고 구원의 문덕까지만 왔다는 그런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성령에 참예한 바 된 자들.” 여기서 “참예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서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 이 말씀은 저들의 생활 속에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어느 정도의 열매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6절에 나타난 타락한 자들이란 영적인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타락하고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염려가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풍성히 맺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여기에서 “다시 새롭게 하여”라는 말은 반복한다는 뜻입니다. 윌리암스 역에서는 “저들을 계속적으로 회복시키기는 불가능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렌스 B. 라잠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여기에서 “회개”라는 말은 구원과 관련시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회개”의 정확한 뜻은 “마음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회개”라는 말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도 자주 적용되고 있는 말이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회개하므로 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그 인격에 직결된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자아 혁신이나 율법적인 순복이 아니다(우리는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들에서 이에 대한 입증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 회개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저들의 칭의(稱義)와는 조금도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의 실수에 대한 회개를 할 때는 그것은 칭의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만약 신자가 어떤 죄를 범하고 회개를 하지 않을 때는 필요한 회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구원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다(고전
영적인 성숙을 향하여 전진하기를 계속적으로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반드시 한 지점이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인이 이제 소원한다 할지라도 영적인 성숙을 향한 전진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온전히 믿기만 했더라면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을 하나님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에게 허락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받고는 있으나 가나안으로 비유할 수 있는 그 안식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히브리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에서 “버림을 당하다”라는 헬라어는 인데 이 헬라어는 고린도전서
요한복음
히브리서의 기자는 6:4-8의 무서운 경고를 기억하면서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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