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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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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24. 14:20 횃불/ 2000년

그러므로 생각하라!

한 봉 래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1-14).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성경은 우리로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 중 하나는 과거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생각은 꼭 필요한, 그래서 마땅한 생각이 있을 뿐 아니라, 위험한 생각, 그래서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시는 그런 생각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롯의 아내입니다. 롯의 처는 멸망하는 소돔 성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몸은 빠져 나왔지만 마음은 소돔성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받아 광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16:3).

그들은 과거를 회상했습니다. 그 때가 좋았다고, 고기 가마 곁에 앉았었다고, 떡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17:28-30).

롯의 처를 생각하라”( 17:32).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그렇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예로 야곱을 들 수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32:10)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 요단을 건너갈 때 그에게는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짐승의 떼를 둘로 나눠야 할 만큼 많은 재산과 가족들이 생겼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감당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은혜를 받을만한 어떠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이 전적인 주권으로 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을 훼방자이며 핍박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회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2·11)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내가 어떠한 자였는지, 예수님의 피가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로 나눌 수 있고, 또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사람을 분류하는 기준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로 분류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로 취급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식사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 기본적으로 경멸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유대인을 인간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은 유대인과 같은 종교인에 대해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나 구원받은 우리의 경우에도 이같은 성향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복음을 상품처럼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거부감이 듭니다. 그 거부감은 그들의 잘못된 태도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교양 있는 이방인이 유대인적인 종교적 열성에 대해 갖는 거부감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간에는 풀 수 없는 거부감과 저항감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9:35-38).

여기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한 불쌍한 거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여러분은 이 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인자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소경은 인자에 대해 묻지 아니합니다. 인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천한 자일지라도 인자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많은 지식과 부를 갖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다. 약속된 메시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자기의 삶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의 미래는 어두울 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모든 나라에는 법이 있습니다. 법이 있어야 나라가 질서 있게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나라입니다. ,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공평과 의와 사랑으로 통치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그 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안에서 사는 나라, 그 나라는 아무리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 해도 늘 부족한 나라입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요.”

성경에 보면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해주시겠다고 하는 많은 약속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절을 볼 때 우선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같은 이방인은 이 약속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가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밖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소망을 뜻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소망(dream)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소망은 실체가 아닙니다.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소망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민족은 이 지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뿐입니다. 그들만이 소망을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그들만이 실제적인 소원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나머지 이방인들은 결국 이 세상의 허무와 덧없음 속에서 좌절과 환멸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함부로 품는 소망은 다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 모든 불평의 근원은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어두움, 비참함, 저주, 고통의 근원이 하나님의 없음에 있습니다. 자연 속에서 살면서 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야 하는 것, 인생을 살면서 이 인생을 창조하시고 인생에게 의미를 주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이 이방인의 모습입니다. 죄 가운데서 살면서 그 죄를 구원해 주실 분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 위로 받을 길 없이 허무하게 살아야 되는 것이 우리들의 과거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일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영어 성경에는 이 구절이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했지만 이제는.”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말씀입니다. 놀랍고 축복된 역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 완전한 역전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셨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죄를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과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사이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도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서로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또한 가까워졌다는 것은 이제 내가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닫혔던 문이, 과거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던 그 영원의 문이 이제 나를 위해서 열려졌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안식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보다도 그분 자신이 평안과 안식입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의뢰하는 것은 얼마나 평안한지요.

 

성경에는 이와 같은 일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길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이방인(사마리아인)입니다. 이방인인데다가 문둥병이라는 부정한 병에 걸렀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소망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자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그들의 심령에 들린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제사장에게 가는 것은 오직 그 몸이 나았을 때뿐입니다. 몸이 나았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가서 나음을 확인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지 않은 채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아직 병고침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단순히 그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즉 순종했을 때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이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자기 상황을 보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듭니다. 그들이 자기의 생각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낫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정말로 몸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이 때 아홉 명의 문둥병자는 그대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했으므로 그 말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돌아옵니다. “가라라고 했지만 이 말을 돌아 오라라고 이해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께 돌아가야 한다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받고, 그토록 소원했던 사회생활로 복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제 오랫동안 품어왔던 그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보다 예수님께 가서 감사를 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내가 어떻게 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감사와 찬송을 받으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갈 때 가지고 가야 하는 예물이 참새 두 마리와 홍색실보다 자신임을, ‘변화된 마음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명한 확신가운데 큰 소리로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확신, ,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구했으나, 받고 보니 이것은 내가 받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나였습니다:

그는 과거를 돌아본 것입니다. 내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을 자격이 있었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7:19).

이 말로 예수님은 그의 구원을 인정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주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9:1-7)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그 인생은 비참했습니다. 평생 구걸을 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인생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본인도 좋고 부모도 괴롭지 않았을 텐데 왜 태어나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실수하셔서 이와 같은 자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수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소경을 놀랍게 축복하십니다. 소경이라는, 이 절망적인 모습과 관계없이 이 사람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절대적인 뜻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8:12). 예수님이 빛이시라는 이 위대한 진리를 입증하는데 소경의 생애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때를 알리는 데 이 소경이 사용됩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9:4).

 

바리새인 들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9:16).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사람들의 논리는 늘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원칙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안식일을 더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세워놓고 사실을 그것에 맞춰 이해합니다. 이들은 이 사람이 놀라운 일을 행했지만 안식일을 어겼으니 이 사람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원칙보다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실질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기적을 행했으니 죄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사람의 두 가지 경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원칙주의자도 아니며 사실주의자도 아닙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9:30-34)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 한 첫 번째 말은 이상하다입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 논리를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먼저 사람들의 생각에서 분리됩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익숙했던 논리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논리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주어가 늘 하나님입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모든 관심을 쏟을 뿐입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은 성경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생각은 성경에 근거합니다. 내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빛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논리가 없어지고 하나님의 비추심을 좇아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제시된 그 길을 굳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0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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