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전도방법(23)
10. 예수님의 전도(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예수님의 전도를 논할 때 모든 전도가 통쾌하고 시원하며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 중에도 이번에 취급하고자 하는 니고데모의 전도는 특히 통쾌하고도 시원한 전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니고데모의 경우는 표절이 사용되지 않고 순수한 논리 전개로 말미암아 승리하신 전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72인으로 구성되는 공회 의원이었으며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라는 뜻으로 당시 약 6000명 가량 있었다고 한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의 높은 위치로 말미암아 교만하고 이기주의자이며, 변론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착각에 빠진 종교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 예수님께 찾아온 이 바리새인 니고데모는 특별한 바리새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를 분석해 보자.
첫째,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양심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임이 틀림없다고 믿어졌을 때 즉시 정직한 고백을 하였던 것이다. 정직한 마음이 아니고는 그와 같은 분별을 할 수 없다. 수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초능력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아니하고 오히려 대적한 것과는 달리 그는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둘째로 그는 인격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며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경건한 랍비였다.
셋째로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인이었던 것으로 분별이 되나 육적으로 볼 때 젊은 예수님께 찾아와서 신앙고백을 하는 겸손을 보였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라고 호칭하였는데 그 당시 사회상황으로 볼 때 실로 이 호칭은 파격적인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비밀을 들을 때 순수히 받아들였다.
필자가 니고데모의 인간 됨을 먼저 분석하여 기록한 이유는 오늘의 전도자도 앞에 나오는 구도자들을 잘 분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건한 랍비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는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앞에 있는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이 대답을 하셔야만 했을까? 이 부분을 생각해 보는 것이 니고데모 전도의 중요 부분이 아니겠는가?
첫째로 니고데모가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성경학자였다. 그는 구약 성경을 줄줄 외우는 성경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영의 눈이 밀어 소경이므로 구약에 증거된 메시아가 눈 앞에 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니고데모의 그 많은 지식도 그가 거듭나지 못함으로 쓸모 없는 지식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을 아는 것과 성경을 깨닫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오늘날도 성경을 알되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소경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문제점을 단번에 지적하셨다. 그는 거듭나지 못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전도자의 전도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상대방의 핵심적 문제를 보고 지적하는 능력이다.
필자는 어느 때 오래 복음을 들은 구도자를 만나서 단번에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과 그 속의 복음을 다 믿는데 확신만 없습니까?”
그는 “바로 그거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확신에 대해서 잘 풀어주었고 그는 확신 가운데 돌아갔다.
또 어느 경우는 십 수년 다닌 집사님께 “진정 지옥이 있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까?”라고 하니 그는 깜짝 놀라며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옥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으로 그는 그 날 주님을 믿은 것이다.
필자도 예수님처럼 거듭나야 하겠다고 지적하여 거듭난 사람들도 많이 경험하였다. 실제 어떤 구도자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교회에 잘 다니는데 왜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지요?”라고 묻는 교인에게 “거듭나면 된다”고 강력하게 전하므로 거듭난 경우도 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함을 분명하게 지적하셔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니고데모가 성경학자였기 때문에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거듭남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단어이다. 만약 예수께서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민수기나 기타 구약의 어떤 말씀으로 하셨다면 이 노 성경학자는 변론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누구이신데 그들과 변론하는 수준에 갈 수 있겠는가? 이 “거듭나야 한다”는 단어에 니고데모는 놀라며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니고데모의 답변을 들어보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날수 있습니까?” 이 얼마나 아이 같은, 무지한 사람 같은 답변인가? 예수님의 강력한 반격은 시작되었다.
서두에 언급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도 몰랐느냐?”라는 것이다. 이 노 성경학자를 완전히 굴복시켜 예수님의 페이스로 맘대로 끌고 가는 통쾌한 전도 방법이 아닌가? 그 다음부터 그는 한 마디 반격도 못하고 예수님의 성경을 인용한 전도를 그대로 듣고 있었다. 이후로 21절까지 예수님의 전도는 일사천리로 계속되어 결국 니고데모가 거듭나기에 이른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써 이러한 일을 모르느냐”고 책망을 받은 니고데모가 어리둥절하며 충격 속에 있을 때 예수님은 다시 반격하지 못하도록 결정타를 날리는 장면이 나온다.
11절에서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그 증거를 믿지 않는다. “ 얼마나 있는 공격인가? 말하자면 “나는 아는 것, 본 것을 말하는데 성경학자 된 너희는 아무 것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모습이 아닌가?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숨돌릴 사이도 없이 계속 공격을 가하고 있다. 12절에 “땅의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이 말씀은 수준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땅의 일도 못 깨닫는 수준인데 하늘의 일을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하는 완벽한 공격인 것이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계속적인 공격을 가하는 권투선수가 생각나지 아니한가?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연속되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공격 펀치에 어찌할 줄 모르고 당하고(굴복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공격은 어디인가? 13절 말씀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앞 절에서 하늘의 일을 말하면 깨달을 수 없는 낮은 수준을 지적하신 주님은 이제 자신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선언하셨다. 이것은 무슨 말씀인가?
“하늘의 일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바리새인도 당신 니고데모도 물론 말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 올라가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 외에는 하늘의 비밀을 말할 자가 지구상에는 전혀 없다는 분명한 선언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니고데모는 완전히 굴복되었다. 그는 앞에 있는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메시아임을 지금 듣고 있다. 그러므로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반역하는 것임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니고데모의 마음은 다음에 나올 말씀을 기다리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들을 준비가 온전히 된 것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전도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전도자는 성경 말씀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을 입증하는데 주력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또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임을 분명하게 심어서 그의 말씀이나 사역에 믿음을 갖도록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동일하게 성경과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결코 구원의 길이 없음을 깨닫고 복음을 듣는 것과 그 부분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복음을 듣는 것은 다르다. 다시 말한다면 죄 문제를 해결하여 천국에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혀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복음을 접할 때 훨씬 강렬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다시 짚어본다면 겸손하여 사실을 인정할 줄 아는 노 성경학자 니고데모는 평생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처럼 낮아져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 권투 선수가 결정타를 맞고 주저앉은 것처럼 그는 완전히 굴복되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결정타를 날린 후에 복음을 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주님 앞에 완전히 굴복된 상태가 될 때 복음을 풀어주는 것이 순리이다. 완전히 굴복되지 않아 준비되지도 않은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쉽게 전해주므로 구도자의 마음 밭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무릎을 꿇는 것인 만큼 전도자가 이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니고데모 전도를 통해서 다시 한 번 교훈 받을 것은 이것이다.
예수님은 이 강자에게 강력한 공격으로 확실하게 굴복시키고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분명하게 설명하여서 구원받게 하셨다. 환경을 생각한다든지 상대방을 의식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심판 받고 멸망의 지옥에 떨어짐을 말씀할 때 담대하셨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염려하지 아니하셨다. 자신을 믿으라고 하면 거부반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기색이 없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전한 복음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함을 꺼리지 말고 전해야 할 것이다. 교리적 부분도 복음을 위해서 위축되지 말고 담대히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다음 호에 계속>
<2001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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