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과 구약
한 봉 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혼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이혼 여부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뜻을 알리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성경의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혼을 조건부로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외견상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 이혼을 허락하신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혼은 안 된다”고 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왜 겉으로는 된다고 하시면서 속으로는 안 된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해졌고, 의로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의 본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도와 주셔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생각을 내려놓고 말씀을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엔 구약성경이 있고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구약은 옛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과 두 번 약속하셨습니다. 첫 번째 약속이 구약이고, 두 번째 약속이 신약인 셈입니다. 먼저 구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사람들이 약속할 때, 이를테면 집을 빌릴 때 계약서를 씁니다. 계약서에는 계약 내용이 글로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도장을 찍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하실 때 그 내용을 글로 쓰셨습니다. 그리고 피를 뿌렸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15~20).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첫 번째 약속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너희들이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즉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점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신 31:16~21,29).
하나님은 약속을 맺으면서 이 약속의 실패를 예언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약을 살펴보겠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여기 또 한번의 약속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맺은 두 번째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도 역시 피가 뿌려집니다. 구약에는 짐승의 피가 뿌려졌지만 신약에는 예수님의 피가 뿌려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이 우리와 맺고 있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내용을 히브리서로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신약은 구약 즉 애굽 땅에서 저희를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언약과 다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령이 임하신 후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성령이 신약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첫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돌판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즉 구약 말씀은 내 마음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는 달리 말씀을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기록됩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하나님이 다시 기억지 않으시므로, 죄를 위한 제사를 계속해서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 신약과 구약을 조금 비교해 보겠습니다. 구약은 실패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이상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구약은 실패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다릅니다. 신약은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돌판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구약은 사람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결정됩니다. 신약은 예수님이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세워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복을 얻습니다. 즉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는 한번 죄 사함을 받은 후에도 또 죄를 지으면 다시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로 죄용서를 받으면 다시 죄를 위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구약은 내가 죄인임을 알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신약은 내가 의인임을 알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을 읽을 때마다 구약의 인물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보아야 합니다. 또 신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의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이해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한 것입니다.
구약이 세워질 때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만 60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구약)을 낭독했습니다. 십계명을 낭독했습니다. “제 일계명은 이것이니····”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 명령을 지키겠나이다. “ 60만 대군이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 장면을 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 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구나! 얼마나 굳센 결심이며 얼마나 엄숙한 순간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실패를 예언하셨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이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기 원했던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여기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구약의 십계명 중에 하나는 ‘간음하지 말라’입니다. 그녀는 구약을 범했습니다. 구약을 어긴 죄인이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그런데 예수님은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으로 간주하시는 분입니다.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행위가 아니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시고 지옥에 능히 던질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 온 이 여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모세(구약)는 말하기를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 당신(신약)은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묻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대로 판정하신다면 예수님과 신약은 필요없게 됩니다. 그녀를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시면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여인을 용서하시면 예수님은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됩니다. 이 난처한 시험 속으로 예수님을 몰아넣는 것이 그들의 의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더 죄인입니까? 간음 중에 잡혀 온 이 여인입니까? 이같은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누가 더 죄인입니까? 욕구를 참지 못해서 죄를 범한 이 여인과, 말씀에 관한 지식을 통해 다른 사람을 올무에 넣는 바리새인 중에 누가 더 죄인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실제로 부도덕한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도덕적인 죄인도 있습니다. 율법적인 죄인도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아무런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 훨씬 더 악한 생각과 계획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오히려 더 큰 죄인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로 쳐라.” 즉 구약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치라.”즉 구약의 의미를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했다면 이 말은 별 위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를 범한 적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죄인임을 진정 깨닫게 합니다. 내가 행한 죄 때문에 죄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왜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을 행한 자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왜 신약은 도덕의 수준을 그렇게 높인 것일까요? 즉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로 살아야 한다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십자가에서 발견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즉 자유롭게 결단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 앞에서 인격적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여인은 간음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맞아야 한다고 정죄하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다 나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이 많으신 어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 점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인생을 더 오래 산 것은 죄를 더 많이 지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부터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아직 괜찮을까요? 이상적인, 아직 때묻지 않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젊은이들은 죄인이 아닐까요? 그러나 젊은이도 예외 없이 나갔습니다. 그들이 올 때는 서로 연락하고 함께 왔습니다. 그러나 나갈 때는 혼자 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회를 이루며 함께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 혼자 서야 할 때가 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며, 그래서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해야 하며 그것은 십자가에서 발견된다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나간 사람들은 피해버렸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기 괴로운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으로 연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복음을 회피하는 첫 번째 방법은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선행과 같은 종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의식하건 못하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심판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 위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선행이며 종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여자도 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 때 이 여인도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갔다면 주님은 막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남아있었습니다. 왜 남아 있었겠습니까?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겠다. 이 분이 나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나는 들어봐야겠다. 혹 이 분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이 분은 나에게 뭐하고 하실까?’ 그녀는 예수님에게서 해결책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은 ‘너는 나의 해결책을 받아들이겠느냐?’ 는 뜻입니다. 이 여인을 정죄한 바리새인들은 다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라는 말씀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여인을 정죄하던 모든 사람들을 쫓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물어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성경은 놀라운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부분만 찾아보겠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22).
동서남북이 있습니다. 북쪽과 남쪽에는 북극이 있고 남극이 있습니다. 가장 북쪽인 북극을 지나면 남쪽을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북과 남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선으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동, 극서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동쪽이고 더 돌아가면 서쪽이 되는 극동이라는 지점이 없습니다. 서쪽도 마찬가지입니다. 극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지점을 동과 서로 표현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은 결코 만나지 못한다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내 죄를 보고자 해도 결코 만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내 죄를 처리하셨습니다.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등 뒤에 던지셨습니다. 등뒤는 볼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우리의 죄를 볼 수 없게 처리하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하나님은 나의 죄를 기억하실 수 없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억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싸운 후에 화해해도 다음 날 만나면 마음에 뭔가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 안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자로 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의인으로 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말하는 성경의 상징적인 표현들입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 이것이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간음 중에 잡힌 복장 그대로(사람들에게 끌려와서 옷이나 제대로 추스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간음의 증거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정죄할 자는 없습니다. 주님 당신이, 당신의 말씀이 다 쫓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불신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내 죄가 없다고, 내 죄가 사해졌다고, 하나님은 내 죄를 보지 않으신다고, 그래서 나도 내 죄를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신약이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죄가 없기 때문에, 내 죄에 대한 가책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가 의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보면 여전히 문제가 있고 지금도 내 마음에 송사가 있고 괴로움이 있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로 말미암아 나는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믿으시겠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이 여인을 정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를 심판치 않겠다고 말하십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피묻은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피 흘리심을 보시면서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분명한 구원의 확신을 허락하신 후에 또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은 이 여인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은 이제부터는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혹 주님을 믿는데 장애를 느끼는 분들 중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좋은데, 믿고 나서 술도 끊어야 하고 또 뭐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간혹 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말씀은 율법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여인이 이 말씀을 구약(십계명)처럼 지키려 한다면 또 실패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의 미래의 죄 문제도 해결해 주겠다. 내가 너를 모든 죄에서 보호해 주리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여인의 과거, 현재의 죄뿐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해결한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믿은 자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임을, 또한 세상과 죄도 그에 대해 죽었음을 계속 말해 줄 것입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심문 받으실 때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어린 계집종이 베드로에게 “당신도 그 사람의 일당이지요?”라고 묻자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세 번이나 대답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리고 삼 일만에 부활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다시 만나 세 번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부인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시점입니다. 삼 년 반이나 그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온갖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죽는 것이 두려워서, 비겁하게도, 부인했습니다. 그를 위해 대신 심문 받고 계신 그 자리에서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부활하셔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무슨 염치로 주님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놀랍게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 대답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 자기의 인격을 걸고 그는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했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몰리자 금방 무너져버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를 근거로 예수님께 말하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는 이런 뜻입니다. “이 연약하고, 이 부패한 심령속에 사랑을 알게 하신 분이 당신이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당신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주님. 그것을 저보다도 당신이 아십니다.”
이를 다음 경우와 대조해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한 사람들을 주님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왜 이같은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사람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베드로는 자기가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는 주님을 부인한 것밖에 없습니다. 자기는 비참한, 절망적인 죄인일 뿐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죄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은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훗날 다시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그들은 아마 위의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예수님이 피를 흘리셔서 우리를 의롭게 해놓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예수님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행한 죄악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피 한 방울이 더 뛰어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행한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행위가 더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높아지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의 행하심이 당연히 뛰어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믿으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함께 찬양하며 내가 현재 있는 어떤 상태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하시는 주님, 나를 위해서 피 흘리신 주님, 그분 앞에 함께 경배할 수 있기 바랍니다. ♠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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