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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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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6. 07:44 횃불/1987년

당신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동결된 자산

- 윌리암 맥도날드 -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왜 나쁜지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는 자들이 자신의 장래와 가족들의 장래를 위해 돈을 저축해 두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반론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첫 번째의 반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노년을 위해 돈을 따로 비축해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는 항상 만일의 경우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것을 주어 사용하게 하셨어요?” 이와 같은 반론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의 소리가 아닙니다. 장래를 위해 비축해 두는 것은 우리로 주님을 의뢰하게 하는 대신 비축해 둔 것을 의뢰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일단 자신의 장래를 위해 비축하기로 결정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나의 장래를 위해서 어느 정도 비축해 놓는 것이 좋을까? 나의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인가? 불황은 없을 것인가? 인플레이션(통화팽창)은 없을 것인가? 무거운 의료비를 부담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상을 고려해 볼 때 자신의 장래를 위해 얼마를 비축해 놓으면 좋을지 도무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몇 년의 짧은 퇴직기간을 대비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탈취를 당하시며, 우리의 삶은 보장을 얻지도 못하는 일에 허비될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우리가 현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주님을 한껏 섬기며. 현재의 필요 외에는 모두 주님의 일에 드리고, 장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분을 의뢰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 일이겠습니까? 그분을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그리고 진리의 확장을 위해 주님의 돈을 사용하고 있던 빌립보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4:19). 요즈음의 철학 가운데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비극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자기 삶을 바치다가 은퇴하고 나면 그 때 가서 자신의 삶을 주남께 바치겠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회사에 드리다가 그 남은 찌꺼기를 주 예수님께 드리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찌꺼기 조차도 너무나 불확실하여 미처 우리가 성경의 먼지를 떨어뜨리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카메론 톰슨(Cameron Thompson)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손에 아무 것도 달라붙지 못하게 애쓰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축복을 쏟아 부으십니다(이 말은 사람들은 대개 자기 손에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뜻임- 역자 주).

그러나 현 세계의 비참한 상태보다. 만일의 경우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디모데전서 5:8을 사용하여 재물을 축적하는 일을 정당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위의 말씀이 나온 문단에서 바울은 교회의 과부들을 돌보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과부에게 그리스도인 친척이 있으면 그 친척이 과부를 돌보아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를 돌보아 줄 친척이 없을 경우에는 교회가 그녀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과부의 장래를 위해 자금을 비축해 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그녀의 현재의 필요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핍절한 가운데 지내는 자기 친척들을 날마다.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것은 사랑과 후덕(厚德)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믿음을 실제로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불신자들도 자기 가족과 친척들을 돌보는데 하물며 믿는 자가 그러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과부를 돌보라는 말씀은 적립금이나 생명보험과 같은 장래의 의무가 아니라 현재의 필요를 다루고 있습니다.

 

3) 세번째의 반론은 두 번째의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상당한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자신들의 책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친족을 돌아보는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딤전 5:8). 그들은 자기자녀들이 주님을 믿거나 말거나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몹시 바라는 것은 자기 자녀들에게 상당한 밑천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14도 부모들이 돈을 저축하여 두었다가 자기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칠 때에 가끔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그러나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은 바울의 재정 지원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고린도 사람들한테서 헌금을 받지 아니하고 다른 교회들로부터 받았습니다(고후 11:7,8). 이제 고린도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마당에 그는 그들에게 짐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습니다(고후 12:14). 다시 말해서 그는 그들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의 물질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그들의 영적인 안녕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던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고린도 사람들은 자녀들이었고 바울은 부모였습니다(고전 4:15). 바울은 분명히 풍자적으로 그들에게 말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이 자기를 지원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가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그들이 재정적으로 그를 지원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고전 9:11,14). 하지만 고린도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가 이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문단이 장래를 위하여 재물을 비축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필요에 관한 문제였으며, 바울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간 일반적으로는 어린 아이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린 아이의 쓸 것을 공급하느니라.”

신약성경이 자녀들을 위해 유산을 쌓아 올리는 일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부모가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영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버는 일에만 급급 하는 것은 이 영적인 유산을 예비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남겨놓은 재정적인 유산으로부터 초래될 죄악들을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얼른 들 수 있습니다.

a)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에게 갑자기 주어진 재물 때문에 영적으로 파멸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질과 쾌락에 취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망치고 있습니다.

b) 유언장과 많은 재산으로 인해 생겨난 가족간의 갈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매가 자매를 시기하게 되고, 형제가 형제를 시기하게 됩니다. 쓰디쓴 분쟁이 그들의 나머지 생애에 걸쳐 계속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 13-14에는 유산을 둘러싸고 일어난 한 가정의 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일에 관여하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와 같은 일을 하시려고 지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유언장에 이름이 빠져 있는 그 불행한 사람에게 탐욕에 관하여 엄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c)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쳐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면 자기 자녀들에게 짐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은혜를 모르는 자녀들은 부모의 유산에 빨리 손을 대고 싶어서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d) 구원 받지 못한 자녀들에게나 또는 불신자와 결혼한 자녀들에게 남겨진 재산은 종종 잘못된 교회로 헌금되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수가 많습니다. 믿는 자들의 돈이 진리를 대적하는 일에 사용되다니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e) 그리고 우리는 정부에게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액수의 상속세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액수가 하나님께 드려졌더라면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유언장에 남겨놓은 것들에 대하여 보상을 받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죽는 순간 그들의 유산은 더 이상 자기 소유가 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39:6). 우리의 돈이 주님을 위해 사용되는 일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며, 오직 이것만이 미래에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재림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소유가 점점 더 가치를 잃어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이 오실 때에는 재물은 우리를 위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나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방책은 우리의 소유를 바로 지금 주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이 때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제외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주님의 일에 드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요? 그 대답은 그럴수록 더욱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고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시절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효했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2:44-4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4:34-35).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를 기록하면서 바울은 우리의 물질이 유동성이 있어야지 동결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어떤 참된 필요를 인식할 때마다. 우리의 자금은 언제든지 필요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자신이 필요에 처하게 되면 자금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로 흘러올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평균케 하는 일이 계속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들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3-15).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참으로 헌신된 삶을 살며, 자기 소유에 대해 청지기 직분을 충실히 해왔다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람의 필요를 볼 때마다. 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일을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지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비위를 거슬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심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삶의 표현이지 주 예수님의 삶의 표현은 아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5:3-13에서 과부들을 돌보라고 지시하는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속에 발산되는 교회, 성도들이 서로 돌보는 교회, 돈이 참된 필요가 있는 곳으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교회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박하기를 그것은 초대교회 시절에나 해당되지 오늘날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반박에 대한 답변은 그것이 오늘날에도 역시 해당되고 역사한다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있으며, 그들의 삶에는 힘과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5)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2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이처럼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비천에 처한 바울을 어떻게 그려보고 있느냐 하면 낡은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을 신록 배고프고, 목마르고, 지친 모습으로 길도 없는 사막을 터덕터덕 걸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풍부에 처한 바울은 해변의 별장 같은 데에서 2주 동안 호사스럽게 지내는 청년이 최신 유행의 복장을 하고 검게 탄 얼굴로, 접는 포장이 달린, 호화로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생할 줄도 알았고 호사스럽게 살 줄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편지가 해변의 별장 같은데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편지를 쓰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4:18).

바울은 수감되어 있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풍부한 상태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12을 사용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정당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6) 그렇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딤전 6:17)? 이 구절은 믿는 자들도 생활의 좋은 것을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종종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곧, 믿는 자들이 최신 유행을 타는 가장 좋은 것을 마음껏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디모데전서 6:17의 문맥을 잊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다시 말해서 이 구절은 방종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게 하시는 엄한 지시에 관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씀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것들을 주시되 쌓아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그것을 누리기를 원하시며, 이것은 그 말씀에 이어지는 다음 두 구절을 볼 때 명백해집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재물을 누리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고 축적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7) 또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13:2, 2:23). 이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째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번영이 약속된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 당시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있어서도 역시 해당될까요? 이 경륜의 축복은 역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구약의 기준들은 뒤바뀌었습니다( 16:19-31). 이 부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재물을 사용하지 많고 그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쌓아두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았던 것입니다.

 

8) 그러면 개미에게로 가서 교훈을 얻으라고 가르치는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6:6-8).

이 말씀은 개미가 장래를 대비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역시 그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개미의 장래가 이 땅에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장래는 저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순례자이자 나그네이며, 그들의 집은 저 하늘 위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장래를 위해 보물을 반드시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이 관계되는 한 믿는 자들은 내일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6:25). 그들은 자기 보금자리 옆에다. 곡식 창고를 결코 짓지 않는 새들을 닮으라고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잘 돌보시겠습니까!

 

9) 어떤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접근하려면 자가 되어야 한다고 논박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그들은 심지어 이방의 부자들과 대인(大人)들의 집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살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의 구원을 말해 주기 위해 종으로 고용되거나 노예로 팔리기까지 했다라고 말합니다(from COME YEAPART by J. R. Miller).

 

(1987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