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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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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4. 12:27 횃불/1993년

요한계시록 강해(3)

2 1~11

- 어거스트 반린 -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2:1).

 

한 몸으로서의 하나님의 교회는 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입니다( 20:28).

여기에 언급된 에베소에 있는 교회와 같은 지역적인 교회는 습관을 좇아 성도의 교제 가운데 함께 모이는 어떤 특정지역 안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주 예수님은 그분의 성도들 가운데 다니시며 그들의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며 경고를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고 축복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한 촛대로 불리운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촛대로서 친히 온 세상을 밝히기에 충분한 빛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세상의 빛이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자신을 위한 빛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곳에 남겨 두셨습니다. 촛대는 어두움 속에 빛을 제공하는데 이는 우리가 죄로 어두워 진 세상에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빛을 비출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발한 빛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성경이 종종 그분을 그렇게 묘사하듯이,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신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촛대들이 그들의 빛을 발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모임 가운데서, 그들의 심령에서,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그분께 중심자리를 내어드리는 한 말입니다.

그분은 오른손에 별들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능력으로 그분의 백성과 그분의 종들을 보존하고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 다니시며 우리에게 그분의 자취를 좇아야 할 본을 보이고 계십니다.

그분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여기에서 각 교회의 사자에게 주어진 지위인 별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신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2:3).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종과 증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책임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촛대가 이곳 세상에 비춰지는 빛을 말해주는 반면, 별은 하늘에서 영원히 빛을 발하는 빛을 말해 줍니다. 이로 볼 때 은 오늘날 신자들이 천상적인 존재임을 암시해 주는듯 합니다 그들은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지만 하늘의 진리와 영광에 대해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만일 신자가 촛대로서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면 또한 별로서 영원히 빛을 발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사자가(개인으로서) 언급되어 있긴 하지만 주님은 온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모든 교회들이 이들 각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각 경우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들은 개인적인 어투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 신자 개개인마다 이들 메시지 속에 담긴 교훈과 도전을 개인적으로 느끼고 대응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일곱 교회에 보내진 이들 서신들은 교회의 전 역사를 포괄하며, 그 영적인 내용에 있어서 모든 듣는 이들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할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각인이 진실로 들을 귀를 가지고 있다면! 에베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우리는 교회의 역사의 밝은 시작을 보게 되며,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 두려운 종국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듯이, 여기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의 경우처럼 영적인 부흥의 시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교회는 인간에게 주어진 다른 모든 책임에 있어서 그러했듯이 비극적인 실패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마침내(참 신자들이 영광 중에 본향으로 옮겨진 후에) 그분께 극히 가증스런 존재로 전락되어 그분의 입에서 토해냄을 당할 것입니다(3:16)

그러면 이 일곱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심령에 필요한 영적인 교훈들을 상고해 봅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2,3).

이 교회에는 칭찬할 점이 풍부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상에서 모든 신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누리며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가운데 밝고도 행복하게 시작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뿐 아니라, 그릇된 주장과 가르침을 가려내고 그러한 이론 및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을 쫓아낸 그들의 능력을 칭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칭찬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슬픔의 그림자가 서려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어린 회심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그들의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와, 그리고 소망의 인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세가지 아름다운 표현-믿음, 사랑, 소망-이 빠져 있습니다.

행위는 그 출발에서부터 다소간 냉랭하고 형식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종종 일어나듯이 뜨거운 헌신의 심령이 이미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악()은 가려냈으나 그들 자신의 심령 속에 도사린 방심할 수 없는 결함은 분명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 각인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요! 이리저리 뛰며 분주하면서도 주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무관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활동은 늘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현상이 진정한 헌신이 결여된 증표에 지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2:4,5).

다소간”(somewhat, 우리말 성경에는 으로 되어있음-역주)은 헬라어 원문에는 나오지 않는데, 이는 우리의 처음 사랑을 버린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실패의 근본 원인이요, 심지어 신자의 공공연한 죄의 근본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들 에베소 성도들은 그들의 처음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린것입니다. 다른 사랑들이, 전에 그토록 소중하고 그토록 실제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처음 사랑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 지를 기억하라! “어디로가 아니라 어디서”(혹은 어디로부터”)이다. 너희가 떨어진 비참한 상태를 내려다 보지 말고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분을 올려다 보라.

그렇게 할 때 회복과 사귐이 경험될 것입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2:6)

니골라당이란 말은 평신도(백성)의 지배자를 뜻합니다. 성도들이 마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때 그들은 자연 그들과 그분 사이에 인간이 개입되도록 허락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하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위치하고 사람들은 멀찍이 서 있는(여기서 하나님께서 증오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직자를 지나치게 비난해서는 안되는데 왜냐하면 잘못의 대부분은 기성교회(the professing church)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예레미야는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라고 탄식한 다음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라는 슬픈 진술을 덧붙였습니다( 5:31). 종종 신자들이 뒷전에 물러서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지 않거나 아니면 주님을 증거할 책임을 등한히 한다면, 적극적인 성격의 인물들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고, 슬프게도 그들은 영적인 독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 에베소의 성도들은 여전히 이 극히 위험한 결과를 낳게 하는 악한 뿌리를 미워했으나 그러나 그 뿌리는 곧 강인한 나무로 자라나서 하나님의 교회의 적절한 기능을 방해하고 마비시킬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각 서신에는 한결같이 이기는 자에 대한 격려의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어느 정도 이기는 자들인데 이는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4). 우리 모두 우리의 그리스도인 삶 속에서 높은 수준의 승리를 열망하도록 합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거스리는 장애물들은 심히 많습니다. 신자는 마땅히 견고히 서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워야 합니다.

하와는 유혹을 받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위치시켰습니다( 3:3).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다고 앞서 말씀하셨었습니다( 2:9). 죄의 나무가 하와의 생각의 중심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녀는 그것을 동산 중앙에 위치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이시며 그분은 중앙에 계십니다. 그분을 여러분의 삶과 예배와 봉사의 중심에 놓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늘에 속한 낙원에서 그분 안에 있는 모든 충만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요한 자니라”(2:8,9).

교회는 극심한 핍박의 표적이 되었는데 서머나(“쓰라린을 뜻함) 교회가 이러한 상태를 잘 말해줍니다. 먼저 유대인들의 증오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오랜 세월 동안 이방 로마로부터 핍박이 임했으며, 끝으로 교권 로마로부터 핍박이 임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으로,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묘사하고 계십니다. 만일 처음이신 분께서 모든 것의 마지막이 되셨다면 그렇다면 그분의 성도들은 다른 아무것도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게도 그분은 비록 악한 자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의 핍박 받는 성도들 또한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들 또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의 핍박자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다시금 살아나 순교자의 면류관을 쓸 것이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네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스스로 부요하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가난하고 파산하고 가련한 상태였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와 정반대입니다(3:17).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지만 영적으로 부요한 것이 그 반대상황에 비해 얼마나 더 좋은 것인지요! 시련과 고난, 그리고 핍박은 종종 진정한 부요를 얻도록,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얻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2:9).

이 구절의 뒷 부분은 우리에게 일찍이 하나님의 교회에 만연했던 거짓된 요소들의 침투를 상기시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가르침을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종교가 기독교 안에 침투하여, 행함이 영혼의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허황되고 거짓된 이론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해롭게 했습니다. 종교-참된 기독교에 대한 사단의 위조품-는 가인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한순한 구원 방법을 제쳐두고 그 대신 인간의 행위, 즉 인간의 자기 의()를 내세워 왔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인자들은 민족적인 의미에서 유대인이라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그분께서 갈보리 십자가위에서 행하신 사역에 근거한-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무시하고,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모방하고 왜곡시킨 이사단적인 가르침에 의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영원한 행복을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만 의존하는 자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믿음에 행위를 추가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사역을 무효화시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행위에 의한 유대적인 구원의 기초를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켜 사단의 회라고 하신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밖으로 불러 모인”(gathered out) 자들로 구성되는데 이 표현은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뜻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종교인들은 이 세상 종교들 속에 함께 모이는데”(gather together) 이 표현이 ”(혹은 회담”, Synagogue)라는 낱말의 뜻입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의 유일하고 충만하신 구주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2:10).

여기에 언급된 십일은 초대 교회가 로마 황제들의 치하에서 당한 10차례로 구분되는 핍박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교도의 박해는 극심했으며,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삶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물론 사도 바울과 열두 사도 중 대부분이 포함되었습니다.

마귀가 여러분 중 일부를 옥에 던지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성경에서, 우리의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욥의 경우에서 분명히 보듯이 그분은 사단으로 하여금 그분의 성도들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난은 사단에 의해,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지혜와 사랑 아래서 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그분의 손 안에 있지 사단의 손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의 목적들을 이루시기 위해 그 모든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2).

신약시대 초기와 그 후로 교권 로마의 악정 기간 동안 사단은 잔인무도한 무력으로 기독교의 간증을 분쇄시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임을 깨닫고는 마침내 공공연한 적대에서 모방으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과거에는 성도들이 그의 광포에 의해 고난을 당했으나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의 속임수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이 어떤 전략으로 나오든 그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축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얼마나 보배로운 일인지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0,11).

어떤 신자들은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 지상에서의 그들의 충성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죽기까지 충성한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시지 않고 상급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자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면류관이 언급되어 있는데, 순교자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불리는 이 특별한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천국의 영광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그들에게 특별히 놀라울 것이라는 의미인 듯 합니다. 만일 그들이 지상에서 죽음을 당했다면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천국에서 한결 더 영광스런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진 모든 일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거둔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12).

각 교회에 보내는 서신들은 이기는 자에 대한 격려의 말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들이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격려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신자 중 아무도 계시록 20:14에 의하면 불못, 즉 잃어진 자들의 영원한 운명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표현은, 현재에 알려진 어떤 고난도 세세토록 이를 갈며 애곡할 영원한 슬픔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사실을,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는 듯 합니다. 비록 길은 어두울지 모르나 결국은 영원한 축복인 것입니다.

 

(1993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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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