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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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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15. 06:50 빛 가운데로 걸으며

성령 충만

원태수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5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3년을 같이 생활했습니다.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뜻을 품었는지를 3년 동안 잘 배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데 있어서는 제자들이 조건이 이미 갖추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의 머리 속에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주님의 말씀과 행위들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기 이전에 한가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성령 이외에 다른 것을 배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전달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기에 좋았더라는 평가를 얻으려면 성령이 사용하시는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져야 하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구원받는 복음을 들었을 때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요구하는 도덕의 수준은 너무나 높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수준은 너무 높아서 제가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 그 기준을 조금 낮추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분이라면 틀림없이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 즉 변하지 않는 기준을 들었습니다. 그 기준을 듣고 그 기준의 차이에 의해서 마음에 슬픔을 느끼고, 마음에 찔림을 감지했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나를 건지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마음 속에 품고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을 참으로 믿고 마음 속에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한 거룩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준을 절대로 낮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의 기준을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과 생각에 따라서 그 기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수준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구분할 것이 있는데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령세례는 단 한 번 일어난 일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세례는 한 번 베풀어진 것이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한 번이지만 성령 충만은 반복되고 반복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대단히 복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몸된교회의 한 지체로서 들어온 것입니다. 이 몸이라는 것을 에베소서에서 풍성하게 나타내고 있는데 이 나타내는 용어들을 바울이 성령을 통해서 사용을 잘 했습니다. 때로는 신부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하나는 한 새사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했는데 광야에서 20세 이상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자라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 사람들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우리를 애굽 땅에서 건지시고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이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건지시고 라고 표현합니다. 그 사람은 애굽에 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 사람들은 애굽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동일하게 성령세례는 사도행전 2장에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이 사람은 사도행전 2장에 일어난 성령세례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몸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대단한 하나님의 비밀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에베소서에 나오는 죄 사함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구속, 곧 죄 사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 사함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 나오는 죄 사함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가 아닙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속과 죄 사함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만큼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만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이 거하는 성령의 역사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완전한 한 새사람이라고 해서 사도행전 2장에 완전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이미 있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또 그 뒤에 더해질 사람을 생각하면서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몸에 관한 교회진리를 말할 때 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저희들은 그 표현을 즐기고 그 표현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성이 되다는 것의 행복에 대해서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그것을 풍성하게 말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주제는 아닙니다만 일단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면서 성령 충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결코 낮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능력, 상황, 사정, 생각.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양보하거나 낮추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한 번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에 4(1:15,41,67, 4:1)나옵니다, 사도행전에 10번 나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에 의해 기록된 것을 볼 때 누가가 성령충만에 대해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한 번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비롯해 구약에서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에 의해서 일시적(임시적)으로 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발람에게까지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을 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성령충만은 조금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발람 같은 사람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신약 특히 사도행전에서 10번의 성령충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어떠한 경우에, 무엇을 목적으로, 성령충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지금 우리들 주위에 퍼져 있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령충만은 어떤 귀신들린 것처럼 자기 생각이나 아무런 의지가 없는데 질질 끌려가는 어떤 신들린 사람처럼 상상하기 쉽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를 살펴보면서 이 성령충만이 성경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이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지를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겠습니다.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처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신 성령세례와 관련해서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분명한 성령충만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은 자기 혼자 도달해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달성하고 자기만 알아보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방언은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방언은 자기 혼자 이해하고 자기 마음에 가득차서 혼자 누리는 것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나타내는 모습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성령충만은 방언을 했습니다만 이 방언은 철저하게 다양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을 때에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증거가 행해졌다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자기 혼자 내가 구원받은 지 30년 됐다(이 말은 나는 지리산에서 도 닦은 지 30년 됐다는 말로 들림)는 말로 들립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은 전혀 감지를 못하는데 혼자서 뭔가 성령의 충만한 것처럼 나타내거나 암시를 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성령충만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큰 일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성령충만에 대한 사건에서 보게 되면 이것은 한 개인이 혼자 도달해서 혼자 누리고 맛보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분명히 다양한 방언이라는 마치 혼자 하는 것과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국가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던 나라의 말로 그 나라의 말을 전혀 배우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이 방언 자체가 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이 사람들이 어찌할꼬 라는 고백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는 베드로가 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 말로 설명을 했어야 됐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방언 때문에 놀랬습니다. 그런데 그 방언이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무슨 일인지, 어떤 의미인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랐습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히브리 말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 난 이후에 이 사람들이 어찌할꼬? 방언은 표적 은사입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찌할꼬?하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은 베드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증거였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성령충만에 대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4:6~8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여기서 보게 되면 이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얼마 전에 일어난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비자, 즉 작은 계집종의 앞에서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비자 앞이 아니라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해서 그 가운데 사도들을 세웠습니다. 그 분위기에 사도들은 아마 압도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말을 참으로 좋아한 것 같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도 이 말을 했습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 네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대답하시기 전에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에 누구 이름으로, 무슨 권세로 하느냐고 묻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세운 어떤 권세를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권세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신학대학의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종교 단체의 이름으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주장한다고 해서 주장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령을 가진 분들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어떤 집단이나 사람으로 말미암는 어떤 권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철저하게 성령의 제어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달라졌으며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압도되는 분위기 가운데서 베드로는 아주 적절하게 그리스도를 잘 증거했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아주 적절하게 증거할 수 있는 분은 성령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에 이분을 잘 드러내고 그 세상의 종교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 잘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옛적에는 그 종교의 권세가 자기를 압도했음을 알았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달라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이 세상의 종교적인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게 베드로의 마음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적인 권세를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 때의 성령충만은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23절에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사도들은 동류가 있었습니다. 같은 무리가 있었는데 저는 이 말을 좋아하며 저에게도 동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동류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과 장로들의 말을 고했습니다. 그것은 앞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이 말을 포함해서 앞에 나와 있는 말들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육신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모임의 어떤 형제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을 전했는데 그것이 지금 통치하는 통치자의 어떤 기분이나 통치 방법에 거스려 가지고 통치자가 마음 속에 안되겠다라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걱정스러워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에게 동류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저 같으면 사도들에게 왜 그렇게 심하게 하느냐? 조금 부드럽게 할 수 없겠느냐? 꼭 그 사람들에게 부딪쳐가며 해서 모임 전체에 어렵게 만드느냐?. 이 동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마음과 이 동류의 마음은 참으로 동류였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기도를 보게 되면 특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이 땅 위에서 사적인 마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기도를 살펴보면 기도의 목적은 그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바램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세력을 가진 존재(내 목숨을 해할 수 있는 힘과 권세를 가진 자)가 위협을 하게 되면 심각하게 고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보게 되면 이들은 이러한 위협을 보고 느끼고 있었지만 이 일이 어떤 의미라는 것을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동류들이 같은 시각으로 이 상황을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상황들의 최고 목표는 그 위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협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하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위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경우 어떤 방해물이 나타날 때에 그 방해물이 없어지는 것과 말씀이 전해지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들은 분명히 주목해야 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목표가 과연 무엇인가? 방해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방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 속에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들은 기도를 이렇게 했습니다. 내 마음에 이 세상의 어떤 소망도 없다. 내가 물질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 목적은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말씀이 담대히 전파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을 불러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셨고 이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앞에 베드로의 상황같이 성령의 충만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성령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실제로 실행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성령 충만의 연장으로서 이들은 재물(財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교회의 실행 진리가 아니라고 어떤 분은 말을 합니다. 저도 인정을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하나님의 성도가 어떻게 삶의 규모를 잡아야 하는지 가르침이 나와 있는데 그것을 실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 숨어있는 보화를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삶의 근본을 잡으라고 하니까 삶의 근본을 잡기 위해서 그 물질에 매여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의 삶의 규모를 잡으라고 하셨지 그 물질에 끌려서 따라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행전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받은 이 사람들은 이 물건을 통용하는 것은 지금 교회에서 실행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물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삶의 규모는 분명히 잡아야 되지만 그 삶의 규모를 잡기 위해서 그 물질에 매여서 따라가는 것 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받은 이 무리들은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피로 값주고 샀다고 했습니다. 말로는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하고 내가 정한 목표를 위해서 달려갑니다.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이렇게 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많은 축복들이 뒤따랐습니다. 5장 부분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5:12~14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앞의 문제가 있음에도 주님께서는 이 문제를 처리하셨습니다. 처리한 결과를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12절에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는데 13후반절에 백성은 칭송을 했습니다. 믿는 자와 백성을 제외한 그 외의 사람들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나머지 사람들을 이렇게 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실 때 사람들은 아 이것은 듣기가 어렵다 하면서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주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결정을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참으로 믿고 그 분을 따르며 그 분 앞에 모이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백성은 칭송하지만 마음 속에 딴 생각을 품고 오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생각을 버리지 않는 이상, 주님은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만 그 사람 속에 품고 있는 죄악은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 죄악을 밀어내십니다. 그 사람이 그 죄악을 버리면 그 죄악만 제거되지만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죄악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람은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 장난으로 접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필요합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 아래 모이는 성도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 분은 가만히 앉아서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와 찬송만 받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 분은 활동을 하십니다. 참으로 그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의 상황을 다 아시고 마음 속에 말씀하시고 죄를 허용하게 되면 그 죄를 지적하시고 버리게 하시며 이와 같은 활동을 구체적으로 하십니다. 이런 활동들을 분명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 아래 모이는 것들에 대해서 마음 속에 그 분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나오는 것은 반드시 한 번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그 죄악을 품게 되면 감히 그들과 상종하지 못하는 경우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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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과부들에게 구제를 하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빠짐으로 인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풀기 위해서 12사도가 공궤를 일 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이 일을 위해서 7사람을 뽑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는데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조건이 필요한 사람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양심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리가 분명하고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말하며 누구를 뽑았습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5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설거지를 하는 것도 이것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성령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물건 나누어 주는 것은 성령충만과 상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주 인간적인 사람이 볼 때는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모임에 덕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성령충만을 요구받습니다. 이 일은 아주 하찮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일이라던지 성도들이 보는 어떤 영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일과 동떨어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교회와 관련되는 한은 성령의 충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존재입니다.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관련된 모든 행위는 성령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스데반은 이미 앞에 6장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뽑힌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스데반은 6:10에서 나와 있는 대로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7장에서 어떤 증거를 했는데 인간적으로 보면 유대인을 책망한 것입니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너희도 죽였다고 책망했습니다. 저도 가끔 말씀을 가지고 책망 비슷한 것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고 난 뒤에 제 마음이 건조해지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런 책망을 말씀적으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말을 하고 난 뒤에 마음이 건조해졌습니까?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의 결과였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육신적인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거나 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말씀으로 다스리거나 지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조심할 것은 그 행위를 하고 난 이후에 마음이 건조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 내가 오늘 너무 심하게 했구나, 너무 야박하게 했구나, 내가 오늘 사랑이 없었구나 이렇게 된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말씀을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진행해서 왔을 때에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보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을 여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한 말 중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일곱번째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은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어떤 충격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울처럼 다메섹으로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잡기 위해서 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해보다 밝은 빛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대단히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경험하지 못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충격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지속적으로 힘을 공급해 주지 못합니다. 성도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한 어떤 특별한 충격을 주님 앞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죄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 결과로서 주님이 원하는 것은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증거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 위해서는 그 충격으로만 가지고는 안되며 반드시 성령의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바울은 대단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그릇으로서 그 의지가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처음 읽은 1:8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주님을 증거하는 인간적인 조건이 다 갖추어졌지만 사도들은 성령이 올 때까지 아무런 증거도 할 수 없었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사도들은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고 그것을 증거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여기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바나바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보통 상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성령충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가 어떤 특별한 일, 내가 말씀을 부탁 받고 전해야 되는데 성령충만이 필요하다. 지금 긴급으로 성령충만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일상적인 특징이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준을 낮추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 기준보다 낮은 수준에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히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아드님의 피를 투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일어났다면 실제로 주님이 죽으셨고, 실제로 부활하셨고, 실제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실제로 성령이 내려왔기 때문에 이 성령의 특징이 실제로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6절에 보면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과 상대하면서 사울이 성령 충만했습니다. 이것과 매키온 형제님이 연결시킨 것은 에베소서 6장의 전신갑주와 실전으로 연결시켰습니다. 혈과 육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악한 영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모본으로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이 됩니다. 바울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왜 충만했습니까? 성령충만은 자기가 유익을 어느 정도 얻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본대로 베드로가 성령충만 해서 자기 스스로 어떤 유익을 얻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충만했기 때문에 얻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목적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효과적으로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충만 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다른 사람이 베드로의 성령충만을 통해서 말씀에 대한 증거를 확실히 받았습니다. 바울은 성령충만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단이 원하는 목적과 주님이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원하는 목적은 7,8절에 보는 대로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사단이 원하는 것은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의 결과로서 무엇을 열매 맺겠습니까? 12절에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그냥 좋구나! 선하구나! 라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사단은 교회 나가는 것이나 찬송하는 것이나 막지 않습니다. 믿고 구원받지 않는다면 사단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믿으려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령충만은 이것이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구원 받고 안받고는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바울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이고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성령세례는 한번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반복되고 반복될 수 있습니다.

 

13:50~52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저는 이것을 정말로 바랍니다. 우리에게 매키온 형제님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또 재키 형제님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존 그란트 형제님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ㅇㅇㅇ 형제님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분들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정말로 주님 안에서 소중하고 훌륭한 형제님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장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이 분들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형제님들이 어떤 뜻에 의해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지만 이분들을 통해서 전달되어진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이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정말 열심 있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충만 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는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이 제자들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이제 성령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제자들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제자들 가운데 은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입니다. 은사는 자기가 원하여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라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잘못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은사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성령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 당시는 교회가 세워지기 전이라든지 이런 상상들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들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이제 성령이 그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곳으로 틀림없이 인도될 것이고 따라갈 것입니다. 저도 이것을 남겨두고자 합니다. 이 집회가 마치고 나면 우리 모두 각자의 모임으로 갈 것인데 이것을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것을 가져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남게 되기를 정말 소원합니다.

기쁨과 아울러서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겠습니다.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아홉가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반드시 성령이 그 사람 속에 존재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그 사람을 지배해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맺는 열매가 아홉가지입니다. 이 열매는 복수가 아니고 단수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있는데 희락은 없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희락은 있는데 화평은 없다면 이것도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아홉가지가 한 열매로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또 구분할 것은 이 세상에도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희락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화평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과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 희락, 화평을 구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성령에 의해서 지배 받는 사람들이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아홉가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아홉가지는 크게 세개씩 세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앞의 세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중간의 세 가지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뒤의 세 가지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을 생각할 때 물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있고 서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기억하면서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라고 일컫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 또 이것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인도함을 받아보겠습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기 위해서 그 전 단계의 조건이 있는데 진리를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요 15장에서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어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 같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을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면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내용을 가진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보셨습니까?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확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틀림없이 성령의 열매일 것입니다.

희락이 있는데 즐거움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희락은 지금 성도들이 걸어가는 이 십자가의 길을 견디게 하는 어떤 힘을 제공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주님께서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주님께서도 그 수치스런 십자가를 참을 수 있는 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도들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은 희락에서 나옵니다. 이 희락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인도 받는 것은 에베소서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는 축복에서 나옵니다. 구원받은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대로 이 큰 구원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말년에 쓴 편지입니다. 수십년 동안 복음을 전해서 복음이 식상해지거나 이제 복음에 도통했기 때문에 복음 하면 로봇적으로 술술 나오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 복음이 깊어져서 펼쳐진 것이 에베소서의 기록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하나님의 비밀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을 말했습니다. 은혜의 풍성을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2:1부터 나오는 내용은 앞의 1장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게 하기를 원한다 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어냐? 2:1~10절에서 나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 능력이 행해진 것이 1장 마지막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믿는 우리에게 어떻게 그 능력이 행해졌느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면 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시체 가운데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 가망이 없었음을 스스로 알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아도 이렇게 쉽게 부패해지고 이렇게 세상 사람과 같아지는데 어떻게 주님을 증거하고 나타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셨겠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시체들 가운데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이렇게 하루 종일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맛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주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그냥 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반응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고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했다는 것을, 그것으로 말미암아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락은 이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에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화평이 있는데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화평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유지하는 길입니다. 이것도 성령이 열매 맺는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을 먼저 보면 충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분에 대한 신뢰입니다. 구원받을 때 믿는 믿음이 아니라 구원받고 난 이후에 그분이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고 하는 그분이 지키신다고 하는 그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온유입니다. 온유는 부드럽고 친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종 더 한 것을 말합니다. 11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는 부드럽다고 해서 절대로 힘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힘 자랑을 어떻게 합니까? 다른 사람을 짓누름으로써 힘 자랑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힘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어주는 짐을 기꺼운 마음으로 메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온유와 짐을 지는 것을 연결시키셨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향해서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도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분은 하나님에 대해서 온유하셨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짐이라고 하는 쉽고 가벼운 짐을 지워주십니다. 그런데 이 짐이 싫다고 털치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아무리 친절해도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온유한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짊어지게 하고자 하는 짐의 크기를 이분은 우리의 삶에서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게 될 때에 내 인생이 걸어가는 것이 어떻구나 하고 눈에 계산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온유한 사람은 힘이 있기 때문에 온유로 말미암아 힘을 마음 속에 전달하기 때문에 그 어깨를 주님이 지우고자 하는 그 밑에 기꺼이 대는 것을 말합니다.

절제는 우리의 육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육은 본능대로 많은 세상적인 것을 하고자 합니다. 이런 것들을 짓누르는 힘은 성령에 의해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것, 나 자신을 향한 것 사이에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구원받기를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 그리고 여러분도 생각할 것입니다. 말씀을 바로 듣고 즉시로 순종을 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순종할 때까지 기다리고 삶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여유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오래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비와 양선을 구분해 본다면 이 두 가지는 다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양선은 주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을 깨끗케 한 것처럼 사람이 보기에는 좀 과격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선을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와 양선은 비슷하지만 양선은 때때로 꾸짖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꾸짖거나 또는 주님이 하신 행동의 특징, 즉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성전을 깨끗케하는 특징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경우처럼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 일을 하고 난 이후에 마음 속에 후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시작과 과정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이후에 점점 더 성령을 알게 되고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보게 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이것은 충만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어기게 되면 그 사람은 간음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처럼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을 했는데 성령충만을 받지 않으면 간음하지 말라는 그분의 명령을 어기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낮은 수준에 머물고 만족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저도 이 교제를 하면서도 마음 속에 한편으로 걱정이 됩니다만 그러나 이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그 아들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