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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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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삶의 변화(회개)

행 8:1-3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행 9:1-31

지난 주간 복음 시간에 주님을 만난 다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니고데모를 보았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님을 만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어제는 도마에 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불행히도 빌라도는 변하기는 했지만 그의 삶이 더 나쁘게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집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룸에 있어서 바울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바울이 달라지는 그 기점을 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회개를 살펴보면 이것은 기억할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의 회개를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문제에서 모든 사람들의 회개는 다 특별합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러분이 구원 받은 그 날은 특별한 날입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않으신 분들은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은 말씀집회 시간이지만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올바르게 알기 전까지 바울의 세 가지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그는 속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것을 위해 싸웠지마는 사실 그 자신을 속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신실해지는 것은 가능하며, 좋은 일에 동참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것이 나쁜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는데 바로 다소의 사울이 이전에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그리스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밖의 그리스 영향을 받는 다소라는 곳에서 성장했습니다. 다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따라서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 당시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여러분이 로마 시민이라면 그 높은 지위 때문에 아주 자랑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가정은 매우 부유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는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학교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돈이 많이 드는 사립학교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어쩌면 매우 유명한 대학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가족은 매우 부유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지적으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적어도 3개 국어 이상을 구사했습니다. 외국어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제 옆에 통역자가 붙어 있습니다. 바울은 종종 통역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헬라어를 말했으며, 히브리어를 말했습니다. 또한 아람어도 구사했습니다. 그는 당시 이 지역에서 보통 사용하는 그 언어를 잘 구사했기 때문에 그 언어로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적으로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적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또한 그의 글을 보면 매우 논리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어떤 저자를 사용하십니다.

바울의 글들은 아주 구조적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죄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소개하고서 구원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그 다음에 거룩에 관한 주제로 옮겨갑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 관한 경륜을 다룹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시키도록 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글쓰기는 매우 명백한 구조를 가지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약의 어떤 다른 저자는 바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술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요한일서를 읽게 되면 구역을 나누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요한일서입니다. 요한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마치 빙빙 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매우 지적인 능력을 가진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 많은 독서량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게 되면 그가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당시의 철학적인 포인트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디도서를 쓸 때 보면 그레데 사람들이 평상시 쓰는 말을 인용할 능력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그는 매우 다양한 독서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자신을 말했습니다. 아주 깨끗한 히브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했으며 유대교에 대해서 아주 열심이었다고 말했는데 그는 실제적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종교에 아주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8장에서 볼 때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서서 그대로 관망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 동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9장에 들어와서 보면 제자들에 대해서 살기가 등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해칠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끝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사람으로 끝난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7장을 보면 제사장에 대한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편지를 보내는데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편지들의 목적은 제자들을 뭉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울은 처음에 믿지 않을 때는 제자들을 협박하기 위해 글을 썼지마는 구원 받고 난 다음에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는데 그는 좋은 의도로 활동을 했지만 자신은 속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도 자기는 선한 목적으로 활동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활동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단히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위해서 섬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대단히 헌신적인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그들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읽어보면 많은 부분에서 그것은 옛날 사고방식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인다는 것을 말하면 우리는 그런 것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보이려고 노력을 하면 오순절날 그 역사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걱정하지 말라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데 바쁘기 때문에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되 말씀대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스스로가 속았습니다.

9:4-9절을 보면 그는 낮아지고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늘로부터 빛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그는 영광 가운데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빛났으며 그가 땅에 엎드릴 정도로 빛이 강했습니다. 그는 하늘의 빛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할 때 그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째로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할 적에 그는 한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세 번째 말할 때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왜 그는 똑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할까요? 세 번의 말씀 중에 어느 것이 바울의 진짜 말씀일까요? 핵심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 진행해 가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더 많이 보았던 것입니다. 그가 처음에 구원 받았을 때 그는 하늘로부터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약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큰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그는 해보다 더 밝은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약간씩 변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므로 그는 계속 지나가면서 더욱 더 주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와 같이 진행이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도 위대함도 마땅히 성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이렇게 자라고 계십니까? 우리가 구원 받을 때보다 지금이 좀 더 나아진 상태에 있습니까? 또한 주님을 향해서 헌신적인 삶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그분이 계신 것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더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계속 진전해 나간다면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장소가 점점 주님에게로 나아가게 되면 우리 스스로는 더욱 더 낮아지고 낮아질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에서 압박을 받더라도 또한 가족 가운데 여러가지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또한 여러가지 병으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삶에서는 더 큰 사랑으로 진전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사랑이 점점 적어진다면 그때는 다메섹 그 자리로 돌아가는 입장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늘의 빛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큰 빛이었습니다. 그 빛은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그분은 해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그분은 큰 빛이었습니다. 이 온 우주에 있는 어떤 빛보다도 더 큰 빛입니다. 우리의 삶을 거기의 최고 높은 수준에 두는 것이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사울이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올바른 입장을 알았습니다. 자기 위치를 알아서 땅에 엎드러졌는데 즉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결코 진전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말로 낮아지려면 그분을 참으로 만나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육체적으로 즉 물리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낮은 위치에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위대한 사람들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창조를 향해서 아브라함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말하기를 영광의 주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자기의 삶을 전부다 내려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에 낮아졌습니다.  

여호수아의 섬김의 초기에 가나안 사람과 싸우기 전에 그는 천사의 장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때 엎드렸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죽은 자처럼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부활한 주님을 보았을 때 그는 죽은 자 같이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요점은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진전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주님 앞에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오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앞에 엎드리고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높아지기 전에 먼저 낮아지셨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낮아지고 있는지 어쩐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메섹으로 되돌아가서 한 번 돌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 앞에 사울이 엎드려졌던 것처럼 엎드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워진 사람들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접촉한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늘 부주의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더 주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높인다면 주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기독교계에서는 그 사람을 무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기가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마치 우리와 같은 입장인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찬송을 부릅니다. 주님을 노래하면서도 주님을 우리 입장과 떡 같은 위치에 두고 마치 내 이웃에 있는 친구처럼 노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영국에서도 이것은 매우 일반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예수님을 자기와 동급인 것처럼 가볍게 예수, 예수, 예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들을 때마다 슬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경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말할 때에,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에서 높이는 것에 대해 여러분에게 격려를 드립니다. 그는 낮아졌습니다. 5절에서 주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여러분이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매우 단순한 것이 있습니다. 네 가지로 바울이 이 다메섹에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이 사실을 썼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았습니다. 말씀하시는 그분이 주님임을 사울은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로는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때때로 믿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때때로 찬송을 합니다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저는 그 대답이 다메섹 도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어찌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너무나 가까이 연결되어 있기에 제자들에게 하는 그 어떤 행위들도 주님 자신에게 행하는 행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위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아주 가깝게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것입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배웠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이 기본적인 진리를 계속 지켰습니다.

네 번째는 그의 방향성입니다. 그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그의 방향은 바뀌었습니다. 그는 물리적으로는 동일한 방향을 가고 있었지마는 그러나 이제는 다른 목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변화된 그 이면에 있는 계획에 대해서 알기를 바랍니다. 그는 주님에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대단히 좋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자마자 하는 좋은 기도입니다. 매일매일 하는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기도한 최근의 기도가 언제입니까? 어쩌면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원합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 싶어합니까? 이전에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나쁜 자기 방식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제 그는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방식을 최우선으로 놓고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즉시 사울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증거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으로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지금 현재 모든 것을 다 배운 셈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울이 하나씩 하나씩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핵심은 여러분이 구원받게 되면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좋은 의미로 여러분을 시험하는 시험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체크해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른 것을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서 사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침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마태복음 28장에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실 때 복음을 가지고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침례라는 용어는 어떤 액체에다가 잠기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지금 침례를 받으려고 합니다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나는 침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이러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명백한 명령이니까 기도할 필요가 없이 바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도록 주님은 기대하십니다. 이 말씀집회 중에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이 구원받았다면 놀라운 날입니다. 결심을 하십시오. 사울의 그 걸음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십시오. 그리고 나는 침례를 받기 원한다고 말씀하십시오. 얼마나 특별한 일입니까! 여기에 명백하게 알려진 사실은 구원받고 여러 해가 아니라 얼마 안되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순서대로 하기 원합니다. 태어난 어린아이 위에다가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물을 뿌리는 세례도 아니고,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으면 나중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이것은 성경적인 질서가 아닙니다. 먼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바로 침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울은 변해갔습니다. 그의 삶이 변해 가는 중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단순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예수님의 완벽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언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이전에 계획을 하고 마음 속에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한 이 목적은 매우 크기 때문에 따라서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계획들을 뒤로 제칠 만큼 주님이 가진 목적이 큽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후에 목적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종착점도 알았습니다. 그는 열정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목적을 가졌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목적의 열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떤 운명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더 벌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높은 지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더 큰 집을 늘리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좋은 자동차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종류들의 자기 욕망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의 나머지 모든 목적들을 제쳤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의 새로운 열성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그대로의 목적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전도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 의하면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을 위한 성령의 은사를 다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해야 될 그 무엇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어떤 은사는 공적인 은사입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또한 인도자의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은사들은 개별적인 은사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다른 성도들을 격려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어떤 아픈 사람들을 방문하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임 전체를 위해서 실제적으로 돌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돕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로부터 할 일이 있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오늘 제가 도전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마음 속에 하나님이 부르신 그 목적대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비교해서 보는 좋은 날이 오늘이 되기를 바랍니다. 목적에 대해서 사울의 방향성은 바뀌었습니다. 그의 방향성이 바뀐 것은 이미 여러분은 아셨을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16절에 아나니아가 이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가 해(害)를 받아야 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밑줄을 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일들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은 복음이 흥왕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 오면 여러분이 늘 건강하겠습니까? 부자가 되겠습니까? 모든 것들이 삶 속에서 잘되기만 하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거짓 가르침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에게 주님께로부터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서부터 들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해를 받아야 할 것을…” 이것을 우리는 듣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이 전혀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면, 만약에 아프다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성경적이지 않은 거짓 가르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도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사단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육체적인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주님께 이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그 문제를 주님이 해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그대로 두겠다, 문제를 헤쳐나가는 은혜를 더욱 더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훨씬 일반적인 경우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문제 속을 통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난당하는 주님을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의 뒤를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모든 삶 속에 편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왜 당신이 예배하는 줄 알았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선한 것들을 계속 주기 때문이구나. 그것은 전혀 감명이 오는 장면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감명받는 장면은 만약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가족의 누군가를 잃었다고 합시다. 또한 나의 건강을 잃었다 칩시다. 돈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 말의 뜻은 그리스도가 어떤 것들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볼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들! 우리는 바울의 방향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그의 계획과 그의 방향과 그리고 말씀을 그는 받았습니다. 그것은 해, 즉 고난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헌신으로 들어가는데 10절에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어떤 계시를 주셨습니다. 구원 받은 3일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교통이 있었습니다. 그 교통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기도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시입니다.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계속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께 대답을 하여 응답해야 합니다. 사울처럼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남아공에서 늘 그렇게 합니까? 라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하면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 오게 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만약 주님과의 개인적인 헌신의 시간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어떤 방향에서도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공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경을 읽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말씀집회에 오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을 때 여러분의 오늘 처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매일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 그리스도인 삶 초기에 그가 최우선적으로 헌신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문제 가운데 있다면 이 문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훈련을 해야 되는 것은 그 문제를 그대로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우에 상황들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핸드폰은 때때로 유익하고 환상적입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알람을 켜기도 하고 폰에서 읽는 것은 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간에 하나님의 말씀 읽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바랍니다.

27-31까지에서 바울이 원하는 바는 먼저 다메섹에서의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사귀고자 했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에는 원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는 사람들의 표시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만 모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의 뜻인데 모든 새로 믿는 사람들은 먼저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인 지역교회에 참예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무엇인지 모를 때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어떻게 모임이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겠습니까? 모임은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게 할 것입니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많은 곳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위주가 아니라 사람들의 흥미 위주가 되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보다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행사를 중심으로 하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여러분의 장래에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워줄 수 없습니다. 주일날 주님을 봉사하는 일에 가담할 때 어떤이들은 그것이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좋은 느낌을 가졌다고 어떤 일을 하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면 좋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거기는 밴드도 없고 음악도 없고 연주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 그 음악이 없으면 여러분의 좋은 느낌은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만약이 이 음악을 모임에서 도입하고 그것에 중독된다면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그날 그날을 음악 때문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임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마치 학교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경우는 학교의 공부가 힘들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 머리의 방향을 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재미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임이 만약 학교처럼 되어 있다면 주일 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들을 계속 넣어주실 것입니다. 월요일에 일어났을 때 여러분 속에 그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전철을 탔을 때, 여러분의 직장에 가서도 그 말씀이 여러분을 돕고 자라게 할 것입니다. 왜 모임이 이와 같이 믿는 자에게 말씀 안에서 학교 같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또한 모임은 마치 성소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하고 서로 섬겨서 덕세움을 입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혼자서 섬기기를 하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혼자는 힘들지만 함께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행하도록 피차간에 돕는 무리가 모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병이 들든지, 어떤 문제를 갖고 있을 때 모임 안에 지체로 있다면 비록 어려운 일을 지나갈 때 약할지라도 함께함으로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

이 다메섹에서 가다가 사울은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그가 문에 섰을 때 여기에 놀라운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예루살렘 성도들과 사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 사람이 가짜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겁을 냈습니다. 우리들을 잔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접하지 않고 사울을 문 밖에 세워두었습니다. 내부에서는 서로 논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전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에 모임이 있습니다.

셋째로 이 사람들에 대해 이전에 사울은 비판했던 사람이었고 적대감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바울이 부른 다음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은 모임을 돌보아야 하는데 아무나 와도 영접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한 이유 중에 하나가 거기에 있습니다. “네 자신과 온 양떼를 위해서 삼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변에는 이리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임을 헤치는 무리가 있다고 바울은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에베소 장로들의 교제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임의 교제에 참여하고자 할 때 교제에 참여하기 전에 어떤 장로 중에 한 분이 와서 먼저 말할 것입니다. 금방 교제에 참여시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완고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교제에 동참시키지 않고 문밖에 그대로 세워두느냐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장로들에게 하는 말에서 첫 번째 예루살렘 장로들이 했던 것은 사울이 정말로 구원을 받았느냐를 점검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모임에 영접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또한 구원 받은 것을 점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는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서 여러분이 참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사도행전 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함께 떡을 뗀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떡을 뗐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모임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영접에 관한 것들을 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 사람이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장로들은 검증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교제에 그 사람들을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출교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이라고 여러분이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묻는 것처럼 울타리를 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알기를 원하는 것은 일곱 번째로 헌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복음에 대해서 헌신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또한 바울은 모임에 대해서도 헌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에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 말로 사귄다, 참여한다는 말인데 마치 어떤 물건이 접착된 것처럼 결합되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는 용어입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가서 출입을 했다는 말로 의미되는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때에만 참여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께 모든 삶을 헌신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날 바울이 했던 것처럼 주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2019. 5. 4 강서모임 특별말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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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