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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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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천거

 

갈 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행 11:22-26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 13:1-5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롬 15:20-21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난 시간에 사울의 회개에 대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될 날입니다. 그가 구원 받은 후에 우리가 배워야 될 많은 것들을 바울이 행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주님을 섬기는데 드렸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침례를 받았고, 하나님의 계시를 공부하는데 참여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신실하게 모이는 자들과 함께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곳으로 왔습니다만 여기서 바울의 천거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종으로서 지정해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임이 바울을 인정했다는 것이지 바울을 모임이 지명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울을 그 일을 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어떻게 전도자로서의 삶을 마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전도자가 되는가를 머리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면 질문을 받는 분이 여러분에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성경학교로 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반드시 성경학교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다음에 목사의 자격을 취득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어디론가 보내는 대로 가면 된다고 조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기 바랍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이 과연 성경적이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모든 실행에 대해서 성경에 의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전도자로서 행한 놀라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어떤 사람도 신학교를 다닌 사람이 신약성경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마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전도자들은 우리가 역사에서 본 가운데 위대한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스코틀랜드에서 주님의 일을 하도록 천거를 받아서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저는 세계에 있는 많은 전도자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때때로 그 사람들은 저보고 작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신학교를 안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교수들 밑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자격증을 갖고 입지 않습니다. 때때로 그것을 작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인도를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어떤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을 찾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의 준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준비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을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 의논하지 않았으며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갔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얼마나 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아라비아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적으로 섬기기 전에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모세는 공적으로 4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기 전에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는 그 40년 동안에 목자의 삶을 살았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그때 어느 가시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침례 요한은 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은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전에 어떠했습니까? 그분께서도 광야로 가셨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패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적으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전에 그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결심을 한다면 많은 것들에서 분리하여 삶을 정리해야 될 것입니다. 어떤 것들을 희생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야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이 범하는 죄들과 구분하는 삶을 살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모든 성도들이 죄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특별하게 공적인 쓰임을 받기를 원한다면 보통 합법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삶으로부터 격리되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면서 때로는 구분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약에 젊은 분이라면 많은 날의 저녁이나 주말에 여러분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미있게 지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때로는 이와 같이 웃으면서 재미있게 지낼 수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즐거운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섬김의 삶을 드리기를 원한다면 어떤 경우는 그러한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여러분은 죄 된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아니오’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개인적인 시간을 특별하게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희생이 따르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구별하기를 원했습니다. 혼자 주님과 지내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봅니다. 저는 왜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는지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인 믿음 생활의 초기에 인생 가운데 작은 일과 큰 일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일과 영원한 일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생 가운데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흥미로운 것들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그러나 영원과 비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가치가 적습니다. 그래서 젊은 성도들에게 도전을 드립니다. 여러분이 젊을 때 나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겠다고 결정하고 결심하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들이 하늘에 다다랐을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진급을 잘 했는지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차를 운전했는가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아파트가 얼마나 크냐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으시지만 영원에서 어떤 것이 가치 있겠는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아라비아에서 바울이 준비할 때 그는 자기를 분리시켰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참으로 좋은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골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과도 의논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를 주님이 인도하신다면 그 사람들과 의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보였습니다. 바울은 주장하기를 그가 가르치고 있는 일들이 아라비아에서 직접 주님께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경우에 바울이 서신서에서 가르치는 것을 듣게 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은 바울이 하는 말이다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장 같은 경우에 모임 안에서 자매들에게 잠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것은 바울의 개인의 의견이라고 말하며 여성들을 그는 귀중히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이 가진 관심을 보면 그는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는 주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바울은 주님께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받았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을 믿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일부를 무시합니다. 왜 우리가 성경전체가 감동 받았다고 믿고, 성경 속에 하나님이 생명을 불어 넣었다고 믿고, 이것을 인정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이 이것을 직접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반복하고 반복하며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주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시며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 자체는 어떻습니까? 물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서를 믿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12-13절로 가서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너희에게 이를 말이 아직도 많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것은 지금 너희가 감당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승천하실 다음에 있을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사도들에게 계시하실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사도들과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말했습니다. 믿는 성도들이라면 구약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을 믿어야 하고 또한 사도들의 서신도 성경의 감동으로 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그가 다락방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으로써 베드로후서를 보겠습니다.

벧후 3:15-16절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러분은 베드로가 하는 말을 알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에 대해서 베드로는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바울의 서신이 성령의 감동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바울을 공격할 좋은 기회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을 공격하는 대신에 사람들이 바울의 서신을 왜곡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베드로의 시대에 바울의 말을 왜곡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서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말을 하는 의미를 다른 말로 말하면 베드로는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의 서신을 묵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성경과 똑같은 수준에 놓고 베드로가 묵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성경말씀을 인용할 때 구약성경을 똑같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용했습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던 것처럼 바울의 서신도 그러하다고 베드로가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바울의 서신을 잘못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것은 그냥 바울의 의견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공교롭게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는데도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이런 면에 대해서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그가 만약에 성령으로 말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옳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그것을 인정하고 천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등급을 매기지 마십시오.

모든 정보를 가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학교에 흥미로운 점은 절대로 졸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언젠가는 졸업을 합니다. 여러분의 손에 어떤 증서를 받고, 그것을 들고 흔들 것입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4,5년 지나면 어떤 확증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학교에서는 졸업이 없고 영원히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합당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도 계속 배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시바 여왕의 기사를 알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맨 먼저 만났을 때 시바 여왕처럼 ‘주님에 대해서 반도 몰랐구나’라고 외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놀라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계속 배울 것을 갖게 되고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이 준비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교에 또는 어떤 세미나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하나님의 사람이 받는 훈련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들어가며 전도자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아라비아의 하나님의 학교에서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1장에서는 그는 모임에서 아주 생산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아라비아는 하나님의 학교이지만 안디옥에서는 모임의 학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종으로써 준비해야 될 영역입니다. 그는 어떻게 안디옥에 이르렀습니까? 어떤 사람으로부터 안디옥으로 가도록 격려를 받았습니다. 바나바가 거기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의 상황을 보았고 어떤 형제가 가면 도움이 되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소에 가서 바울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안디옥에 가면 크게 덕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바나바는 나이든 성도이며 바울을 찾았으며 바나바가 하는 역할은 중요했습니다. 젊은 성도들을 격려하는 나이 많은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이든 성도들은 젊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진전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늘 잘못된 것이 이러하다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옳은 것이 이렇다고 말할 필요도 있습니다. 또한 젊은 성도들에게 드릴 말씀은 이런 타입의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젊은 성도를 격려하는 것을 발견하기는 쉽습니다. 저는 어떤 타입의 성도를 생각하는데 나이 드신 성도를 신뢰하고 격려하는 성도를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젊은 성도가 초조해 합니다. ‘나는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 그 사람에게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당신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입니까? 나이든 성도를 걱정시키는 일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이든 성도가 젊은 성도를 격려할 때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을 그처럼 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젊은 성도는 나이든 성도가 신뢰할 수 있도록 행동할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바나바는 바울을 찾았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는 서로 시기가 없었습니다. 바나바는 이곳은 나의 영역이니 바울은 내 영역으로 말씀을 전하러 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자신이 약간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름이 약간 나타내고 있는데 바나바란 말은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사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서로 시기가 없었습니다. 모임 안에 시기는 암과 같습니다. 이것은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형제 자매들을 볼 때 나도 그들과 같이 되고 싶다. 나도 그 책임을 져보고 싶다. 이러한 시기는 점점 더 쓴 것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 사이는 시기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은 격려를 하고 안디옥에는 새로운 믿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 옆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각자가 격려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은

첫째는 서로가 실제로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더 이상 강요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것은 기본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더 큰 희생적인 일을 하러 나가기 전에 여기에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슬픈 일이 발생할 수 있는데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여러분이 서로 모이는 것을 폐하지 말라고 권장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서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고용한 사람들이 우리를 계속 쥐어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서로 모이기를 격려한다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이 모이는 것 때문에 희생하는 것을 본다면 아마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모이는 시간에 대해 희생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결정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일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때는 이해 못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을 매우 서로 격려가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만약 믿는 사람들이 계속 모일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다른 것들을 선택할 여지가 없이 모이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이 모이는 대로 격려를 했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지역교회는 최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저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모이는 것을 활용하면서 서로간에 유익하도록 격려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교제하는 것이지 엔터테인먼트(쉬고 즐길 수 있는 오락적 여흥거리) 같은 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말씀 이외의 것을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안디옥에서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11절에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에서 사람들이 서로 모이며 추구하는 것을 보고 주변의 사람들이 의심없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여러분이 일하는 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혹시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습니까? 안디옥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라비아에서 바울은 준비를 했고 그의 생산적인 활동을 안디옥에서 했고 사도행전 13장에서는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구브로에 갔습니다. 13장 초반 몇 절은 아주 아름다운 사진을 봅니다.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전도자를 보내는 모임을 봅니다.

몇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명백합니다. 지역교회는 전도자를 보내는 중심지입니다. 전도자를 보내기 전에 전도협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조직을 운영하는 많은 경영자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전도 조직을 만들어서 전도자를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 지역교회가 직접 전도자를 보낸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람들을 따로 세워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이 취하는 방식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전도자를 보내기 위해서 많은 조직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수많은 조직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좋은 일을 하는 조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좋은 일을 위해서 그것을 고안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래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섬기거나 전도자들을 보내는 모든 섬김에 있어서는 지역교회가 그 중심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 관련되는 한 어떤 조직도 지역교회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지역교회보다 더 위에 있는 어떤 조직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역교회는 주님께 직접 보고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직에 대한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바로 진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가 전도자를 보내는 것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교회가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교사들이 다양하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르치는데는 교사 한 사람 이상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모임이 성경적인 모임이면 가르치는 사람이 한 사람 이상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사역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 조직이 유행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역자가 목사라 불리고 있습니다. 또는 인도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는 가르치는 나이든 장로 교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다양한 가르침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와 같이 사람들이 만든 생각대로 가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처럼 풍성한 교사들이 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해 간다면 만약 그 사람이 잘못되면 전체가 잘못될 것입니다. 만약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복수로 있으면 한 사람이 잘못될 때 그 모임이 파선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최선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안디옥이라는 지역에서 모이는 사람들이 매우 바빴습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며…’ 주님이 복음을 위해 보낼 사람들을 위해서 금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분리가 포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십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물론 모임에는 복수 이상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출발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거기서 나오게 했습니다. 이 안디옥 모임에서는 그것이 큰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교사가 없이 어떻게 안디옥 교회가 유지되겠습니까?

여러 모임들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한 모임 안에 두 세 명의 말씀을 전하는 강한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일부를 데려가십니다. 그 성도가 주님께 부름을 받을 때는 젊은층과 중년 성도들에게 큰 시험을 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어떻게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증거하겠습니까? 이제 모임 문을 닫아야 되겠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모임들 가운데 앞선 사람들을 데려가신다면 그것을 위해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없어도 여러분들이 성경을 가르칠 준비를 지금 하고 있습니까?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있겠습니까? 실제적으로 준비하지 않고 마치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숨기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머지 않아 젊은 성도들 중에 누군가가 모임을 직접 책임져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출발로 삼아서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믿는 것을 전해야 됩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세상을 다 떠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말입니다.

떠날 때가 즉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가 왔습니다.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는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일을 하는 것이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할 사람이 떠났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떠났습니다. 사실 떠나 보내고 나서 보니까 이미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떠나기 전에 이미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를 했는데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아프리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안수할 때 손에서 뭔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을 보낼 때 안수한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손을 얹고 안수한 것은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하나의 문화적인 요소였는데 이 당시에 이 사람들의 풍습은 어떤 사람에게 안수하는 것은 이것이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같이 서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을 바울과 바나바가 떠나기 전에 안디옥 모임은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공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우리는 이들과 함께 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안수에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서로 함께 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금식하고 기도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준비했습니다. 안디옥에서 그는 생산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로마서 15장에서 전 세상에서 개척자로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울이 섬기는 것에 있어서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늘 성경 말씀대로 섬겼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믿는 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면 지역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늘 원했습니다. 구원받으면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섬긴 섬김은 바로 이와 같이 섬기고 구원 받으면 지역교회로 인도했습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곳으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러 가기 원했습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있습니까? ‘한국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복음을 더 이상 전할 필요가 없다.’ 저는 이 나라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염려합니까? 이들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멀리 복음을 가지고 가기를 원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서바나까지 가려고 했는데 갔는지 가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섬김에는 또 한가지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의 섬기는 섬김은 아주 짧았습니다. 우리의 섬김도 아주 짧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너무 늦기 전에 복음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오늘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밤 구원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동일한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주님을 섬길 시간이 아마 머지 않아 끝날 것입니다.

영국에서 있는 말입니다. ‘인생은 하나밖에 없다. 머지 않아 끝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말)은 영원하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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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