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당시 요 6:66-68에는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왔다가 물러가고(등을 돌리고) 다시는 그분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고전 15:4-8 주님의 부활 이후 사람들에게 보이셨음을 말하는데 사도행전 1장에 하늘로 올라우시는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들은 제자들뿐이었다고 보여집니다(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주님을 가까이 섬겼던 사람들에게 보이셨지만 거룩함이 없이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처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살아계신 주님 자신을 아무에게도 한 번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볼 수 있는 때는 주님의 지상 재림 때이며 그때에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말씀처럼 모든 믿지 않는 자들도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로 돌아가신 후 이제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말씀하십니다. 그토록 비천하게 베들레헴에서 삶을 시작하시고, 골고다까지 늘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히 걸어가신 그 모든 삶의 걸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며 아름다운 인간 이름을 남기셨고, 십자가의 고통과 그 부끄러움을 참으시며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님, 지금은 하나님 왕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항상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2:49에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며 어린 12살 때 예루살렘에서 육신의 부모가 찾을 때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도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처럼 요람에서 무덤까지 아버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영광 중에 계신 인자 즉 사람의 아들로서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충분한 이유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분을 늘 바라보도록 하셨고 위로부터 오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통해 하늘의 영적인 능력과 힘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의 인격을 나누면 안 되지만 그분의 두 본성을 분리하여 하나님의 신격을 빼고서 사람으로서만의 예수님을 우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거역하고 불신하는 사람들로 인해 얼마나 힘들어 하셨습니다. 하늘에 있을건데 괜히 세상 사람 구원하려고 이 땅에 와서 진리를 말하니 귀신들렸다고 하고(요 8:48) 이런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고생을 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 못되먹은 사람들을 태워서 확 쓸어버릴까보다(눅 9:54), 선하고 좋은 일을 베푸는데도 돌로치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 유대로 다시는 가지 않을거야”(요 11:8), 예수님은 사람이셨던 분인데 인격적으로 학대받는 이런 일들로 인해 힘들어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싶어 하셨을까요?
결코 그러셨던 분이 아니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부탁하시며”라는 말씀처럼 그러한 비난과 고난 속에서 아버지를 바라보셨음을 성경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얽매이기 쉬운 죄들이 그분 곁에 늘 있었지만 그분은 죄를 알지도 않았고 죄를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이 땅에서 이루시는 것이 그분께서 가셔야 할 길이었고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시면서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걸어가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서도 (요 19:28)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아버지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경주를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12장을 시작하며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 증인들 중에는 족장, 사사, 왕, 선지자들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남긴 자취들입니다. 이 모두를 기록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밝히듯이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 항상, 하나님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고 순종으로 반응하는 단순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고 또 믿음으로 인해 종종 고난을 당한 선진들의 믿음의 역사를 증언하는 성경기록을 통해서, 또 하늘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고 말씀합니다.
경주장에서 장애물을 다 통과하기 전에는 목표물을 쳐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도 믿음의 경주를 하며 열심히 장애물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데 너무 바쁘고, 정신없게 하고, 힘들게 하는 많은 장애물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물들은 10절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요 17:11)라고 하셨듯이 장애물로 인해 거룩함을 잃으면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합니다(14절). 그분을 즐거워하면서 사귐을 나눌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삶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삶이 힘들어집니다. 예기치 못한 장애물들을 만날 때마다 좌우와 뒤를 돌아보며 마음 속에는 의심과 거부감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 환경에 빼앗깁니다. 종종 맞닥뜨리는 환경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온 신경이 완전히 쏠려 허우적거리고 피곤해하고 내게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낙심하기도 하는데, 힘을 내서 주님께 부르짖기도 해보지만 주님은 아무 반응이 없는 것 같고, 그래서 더 낙심되고…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어떤 특정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언제 어느 때든 우리를 손쉽게 얽어맬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죄를 말합니다. “얽매이기 쉽다”라는 말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에워싸서 바짝 들러붙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항상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기에 우리를 얽매려는 죄를 떨쳐버리고 피하고 멀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1장에는 믿음으로 그 길을 갔던 선진들이 세상에서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며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는 것도 받아들였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하늘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달리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길을 달려갈 것을 말씀합니다.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것은 벗어버려야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온갖 장애물들이 있을지라도 법대로 달리지 않으면 상을 얻지 못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에까지 아버지의 말씀대로 달려가셨습니다. 말씀하신 분을 바라보며 말씀 안에서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부르신 부르심에 참여한 자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주님을 참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전 15:48 흠정역 번역에는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그분을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에게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은 곳입니다. 저 천국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모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의 목표가 될 때 하늘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가게 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골고다까지 늘 아버지를 의지하고 겸손히 걸어가시고, 그 모든 삶과 모든 걸음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분, 아름다운 인간 이름을 지니신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그분처럼 온전하게 살 수는 없지만 그분은 우리의 본이시기에 우리에게 격려가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많지만 성경의 예들을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 27:5-6 리브가의 속임
"5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리브가는 사람의 방법으로 남편을 속이는 교묘한 계획을 쓴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자기가 편애하는 아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길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은 분명합니다. 혹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이루어지면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영적인 후사로서 복을 받고 유업을 상속함으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올바르지 못한 리브가의 계획은 하나님의 방법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의 속임수가 아닐지라도 야곱이 복을 받도록 충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 가시는지를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엡 5:6 “아무도 헛된 말들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닥치나니” 이 일로 인해 리브가는 다시는 사랑했던 아들을 볼 수 없었고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께 외면당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리브가의 마음이 있기에 이러한 방법들을 종종 쓰려고 하는데 심지어 우리의 방법을 써서 성공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처럼 잘못 확신하고 믿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삿 16:16-17 유혹받은 삼손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소렉 골짜기”(포도나무 골짜기)에서 들릴라와 사랑에 빠져 이 여인이 삼손의 마음을 빼앗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삼손의 힘을 빼앗고 눈까지 빼앗아간 것입니다. 나실인으로서 삼손은 포도주와 독주를 금해야 할 사람이 블레셋 땅의 “포도나무 골짜기”로 갔습니다.
들릴라(달랄)라는 이름은 '기운이 없다, 쇠약하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그녀는 그 이름대로 삼손에게 행한 여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삼손은 믿음의 사람에 올라 있는데 그의 눈과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빗나가면서 유혹에 휩쓸려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약 1:14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도 늘 이러한 유혹, 즉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 주님 바라보지 않으면, 세상의 좋은 것들에 쉽게 빠져들고 영적인 힘을 잃게 된다는 것을 교훈을 받습니다.
대하 26:16,19 교만으로 망한 웃시야 왕
"16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하나님의 기이한 도움으로 웃시야 왕을 형통하게 하실 때 그 마음이 교만해졌고 그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했는데 성전 향단에 분향하는 일은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그를 치시므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로 살았습니다.
교만이 들면 주를 바라보는 안목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이 교만은 청년이나, 노인이나, 초심자 또는 믿음의 연륜이 오래됐거나 가리지 않고 우리 모두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교만은 처음부터 사탄의 것이었고 교만해졌던 사탄을 하나님이 대적하셨듯이 벧전 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웃시야 왕이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는 선조 솔로몬의 잠언을 기억했더라면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는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던 왕이 이처럼 한 순간에 무너진 것은 그의 교만때문이었습니다.
왕하 5:20 물욕의 게하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엘리사는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주었지만 아무 것도 받지 않았는데 게하시는 엘리사의 종으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저 좋은 선물을 주인이 왜 안받지, 아깝잖아”라며 속으로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에게 가서 얼마를 받았고 결국은 나아만의 문둥병을 대신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 무언가를 가지고 싶어하고 저것이 있으면 더 나아진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만일 이런 상황이 바뀐다면 훨씬 더 좋아지고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만 없어진다면… ~ 주어진다면… ~ 바뀐다면….
어떤이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이 힘들다고 하며 어떻게든 바꾸어 보려고 애를 쓰다가 환경이 바뀌어졌을 때 오히려 영적으로 더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현재 주어진 환경을 믿음의 성장과 거룩함을 위한 기회로 알고 위를 바라볼 때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이 온전한 선물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선물일 것입니다. 현재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욕심 내다가 오히려 더 나쁜 것이 더해진 게하시의 모습을 봅니다.
바울은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이 굶주리거나 반대로 풍성한 가운데 거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렇게 계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 35:1-4] 예배하기 전에 방해되는 것을 버림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갈 때 불순물이 좀 혼합되어도 그것이 별로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 가려고 예비한 것 중에 밧단아람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귀고리와 의복이었지만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벗어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야곱과 함께한 사람들 중에서는 이방신상도 가지고 있었는데, 우상은 하나님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며 죄에 해당되는 사악한 것입니다. 귀고리와 우상을 모두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묻고서야 야곱과 그 가족은 하나님의 집인 벧엘에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이 명하신 장소에 올라가며 합당한 거룩을 유지하도록 명령하면서 모두가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합니다. 몸을 정결케 하는 것과 새 옷을 입는 것, 오늘날에 이러한 의식을 굳이 따르지 않더라도 우리의 외적인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합당한 섬김-흠정역)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복에서 보이는 정결함은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로 옷 입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도 야곱과 그의 가족이 가지고 있었던 무거운 것들과 죄악된 우상의 모습들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을 수 있기에 늘 살펴보고 주님께 나아가야 함을 교훈합니다.
이로 인해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고 32:28에서 야곱에게 하셨던 말씀을 여기서 다시 확인해 주십니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 갈 때 잘한다고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랄하게 비판하고 정죄하며 그들의 심판대로 끌고 갈 것입니다. 오늘날 보여지는 모습은 주님으로 옷 입고 우리의 이웃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성도들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합당화하려는 다른 많은 이유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 듣는 말씀을 내게 적용시키려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려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 들은 이 말씀을 저 형제가 듣고 실천해야 되는 건데… 저 자매의 상황에 꼭 맞는 말씀인데…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 말씀들을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할 것인가 보다는 다른 형제 자매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좋은 뜻일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적용하려고 하면서 자신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 21:20-22]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신다고 고백하던 베드로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보다 다른 형제 자매들이 어떻게 섬기는가, 다른 모임이 어떻게 섬기는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섬기라고 하심같이 주님만을, 주님의 말씀만을 순종해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모임들)이 내게(우리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우리의 목표를 향한 삶은 주님이요 위에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거기서 상을 얻으려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빌 3:12-14]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를 데리러 오실 주님을 향한 이 마지막 시점에 경주장의 마지막 코스를 돌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영광스러운 그 즐거움을 바라보며 모든 고난을 우리 대신 당하셨던 분이 지금은 면류관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구름같이 둘러선 수많은 증인들도 우리를 둘러싸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딤후 4:7-8] “그날에…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우리가 경주를 다 달리고, 항해를 끝낼 때 우리의 목표가 되시는 주님은 의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심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탕자는
엄청난 보물을 자기 집 장롱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잊고 있는 건망증 환자처럼 우리도 받은 은혜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탕자는 삶의 방향없이 허랑방탕하다가 아버지의 집을 찾고자 할 때 하는 말이 [눅 15:18] “…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탕자는 방탕한 죄인의 생활을 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이었음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한 탕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요구할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스스로 자책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 아직도 죄인처럼 생활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자책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바로 이 탕자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당당히 바라보지 않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형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으면서도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면서 동생이 돌아올 때 아버지가 잘 해 주는 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자신이 뭔가 손해 본 것 같은 마음을 나타냅니다.
[눅 15:29-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과 늘 함께 있으면서도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형제 자매들이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복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시기하고 못마땅 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탕자는 형을 보기도 얼마나 민망했을 것이고 형의 화난 얼굴만 보고 아버지를 보지 아니했다면 탕자는 영원히 집에 돌아올 생각을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도 탕자처럼 연약에 빠진 형제자매들을 형이 바라보는 시선처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형제자매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형은 동생에게 감정적으로 큰 소리 쳤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였습니다.
[느 4:3,9]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벽 건축할 때 얼마나 방해 공작이 많았으며 주위와 환경만 바라본다면 성벽을 건축할만한 조건이 안되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건축해 가는데 있어 교회 탄생 이래로 얼마나 많은 사탄의 파괴 활동들을 보게 되는지? 현대에 와서는 모든 것을 믿으라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지 못하도록 온갖 멀티미디어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마음이 세상의 유혹으로 인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방해세력 사탄은 우리에게 리브가의 속임수, 삼손이 유혹받은 세상의 정욕들, 웃시야 왕의 교만함, 게하시의 물욕, 탕자의 스스로 택한 잘못에 대해 자책하는 연약함, 우리의 건축을 방해하는 도비야…. 수많은 것들을 우리 안에 가져오고 우리 앞에 두면서 걸려 넘어지게 하려고 시도합니다. 사탄이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그분과의 사랑의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로 가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았을 때 물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을 보았다는 것은 얼마나 환경에 민감한가를 나타냅니다. 순간적으로 물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이 민감하게 환경을 보게 될 때 의심하는 믿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을 하면서 사탄의 하숫군인 산발랏과 도비야 무리들의 방해를 파숫군을 세워가며 지킨 것처럼 우리의 섬김의 울타리에 파숫군을 세워야 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적은 능력으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교회에 마지막 벽돌이 더해지는 그날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셔서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주위를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주님을 믿는데 방해하는 것들이지만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던 믿음의 선진들의 승리가 우리를 둘러서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3절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흠정역;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처럼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이것은 너희가 너희 생각속에서 지치고 기진하지 않게 하려함이라”).
히 2:9에서는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님을 보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실패로 낮아진데서 눈을 돌려 둘째 사람이자 마지막 아담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분께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영광은 갈보리 이전에 가졌던 영광, 즉 요 17:5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 그분의 공생애를 마칠 때 모든 사람들 중에 홀로, 우리 사람을 대표해서 죽음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권세(영광)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다시 회복하셨고 그분만이 가지신 독특한 인성의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모습을 지금 우리가 바라봅니다.
고후 3:18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있는 자신을 인식하기 어렵고 내가 왜 이럴까 하며 좌절감을 느낄 정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이 이만큼 예수님을 닮아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안에서 그분의 아들을 닮은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그 닮은 모습이 내가 느끼기에 미미할지라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는 말씀처럼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그분을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이 여전이 우리를 미혹하고 믿음을 방해하며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시도합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에 굳게 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계속 그분의 영광을 소망하며 바라고 나아갈 때 계속 그분을 닮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경주가 끝나는 날 영광으로 들림 받아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그분과 같게 변화되게 하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만 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닮아갔으면 합니다.
2025년 5월 5일 강서 특별집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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