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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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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13. 11:21 빛 가운데로 걸으며

그의 피로 인한 구속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1:7).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기 전에 우리를 생각하셨고, 우리의 행복을 계획하셨으며, 때가 차서 그분의 거룩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그 아드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 우편으로의 승천 이후에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를 7절에 나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는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확고하게 심겨지기를 바랍니다. 믿는 우리는 나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소서라고 기도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거나 우리를 의롭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다면 다행스럽게도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해결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날 우리 영혼이 구속받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1:7).

우리는 구속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 사용될 때 세 가지 독특한 의미가 있는 단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단어들 가운데 하나는 시장에 가서 단순히 무엇을 사는 것, 구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게 될 때 물론 그것은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에 의해 팔린 바 된 자들입니다.

구속에 대해 좀 더 완전한 의미를 지닌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다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노예시장에 가서 팔려고 내놓은 어떤 노예를 보고 내가 사겠소라고 말하고 그 값을 지불하면 그 노예는 구매자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그런 후 그 노예를 산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는 문서를 그 노예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로 사용된 단어인 값을 주고 사서 풀어주다입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결코 다시는 위험한 처지에 있게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우리의 구속에 대해 말하면서 사용한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를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1821).

우리는 시장에서 팔렸으며, 다시 팔리기 위해 시장에 내놓아지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몸입니다.

세 번째 단어가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복합어로 된 헬라어인데, 첫번째 부분은 어떤 것에서, 또는 어떤 상태로부터 떠나다의 의미가 있는 '아페'(ape)이며, 두 번째 부분은 자유롭게 되다 혹은 풀려나다를 의미하는 '루트로이스'(lutrois)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어떤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 때 우리를 위협했던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해방되었고 우리의 죄책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나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소서라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죄는 제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에게 내려져야 할 모든 심판이 갈보리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아드님에게 내려졌으며, 그 때 그 문제가 이미 제거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구속의 값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분의 피 값으로 인하여 한때 우리를 위협했던 저주와 심판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고 구속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경우, 죄인은 양, 염소, 수소 혹은 그가 가난한 자면 비둘기 두 마리를 취하여 제단으로 가져갔습니다. 이것들은 거기에서 목이 꺽이고 피가 쏟아진 후 제단에 바쳐져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태워졌습니다. 그러나 제단에서 태워진 그런 수많은 짐승들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나간 시대에 태워진 그런 짐승들의 값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진정 해결할 힘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희생제사를 보게 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에 대해 추론해 보려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제한된 속죄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는 오직 어떤 선택받은 자들만 대속했으며, 그러므로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문제를 냉정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죄인들과,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들이 그들의 죄를 인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더라도 십자가의 사역은 너무나 엄청나고, 거기서 쏟으신 보혈이 너무나 귀하고, 또 거기에서 주신 생명이 너무나 값지기 때문에, 모든 죄인들은 심판에서 구원을 얻고 모든 정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온 인류를 구원할 만한 값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보혈의 값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 한 방울이 이 세상에서 저질러진 모든 죄를 말끔히 씻을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유한한 죄인이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무한한 구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러면 당신은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믿고 있습니까? 당신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복되신 구주께 당신의 영혼을 맡기셨습니까?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던 저명한 설교가인 영국의 죠셉 파커(JosePh Parker) 박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현대의 이론들에 대해 그가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추론하고 사색하고 평가절하 시키고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모임에 빠져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을 통한 구원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아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그의 헌신적인 아내가 병에 걸려 단시일 내에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와도 그의 슬픔을 나누어 가질 수 없었으며,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집의 텅빈 방들을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슬픔은 현대이론의 어떤 기반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으며 또 거기서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친구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어두움의 시간, 나의 영혼이 고뇌하는 시간, 의심과 두려움으로 전율하는 때에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옛 복음, 내가 전에 설교했던 그 복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소. 형제여, 나는 굳게 결심했으며 이제 확고한 자리를 찾았소. 오늘 나는 그 자리에 섰소.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이뤄지는 구원이라는 복되고 영광스런 진리에 의존해서 죽게 될 것이오.

보혈로 인한 구속,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구원합니까? 피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7:11).

어떤 피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까? 죄를 속하기 위하여 단에 뿌려진 피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며,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이 보혈에 대한 단순한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으며,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피를 쏟으실 때 그분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우리가 예수의 삶을 본받음으로가 아니라, 그분의 생명을 얻음으로입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는 것은 예수의 보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통해서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2:20).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보혈을 통해 구속을 얻게 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죄의 용서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라는 이 주제는 때때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죄 용서는 성경에서 각기 다른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사도는 본문을 통해 영원한 속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그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순간에 영원히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는 의롭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그의 모든 범죄는 용서받게 되어 마치 그가 전에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 용서를 받기 위해 다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말하는 것은 '내가 회개하는 순간까지의 모든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보다 휠씬 이상의 것, 그보다 훨씬 나은 그 무엇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자의 죄, 즉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 그리고 그가 미래에 짓게 될 죄까지도 고려되어졌으며, 예수께서 죽으실 때, 그리고 사람이 그분을 믿을 때 모든 죄는 영원히 용서된 것입니다. 그 속죄 사역의 가치는 그분에게 달려 있으며 모든 죄는 용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용서의 첫 번째 위대한 측면입니다.

두 번째는 관계 회복을 위한 속죄입니다. 영원한 속죄는 성부, 즉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죄 용서입니다. 죄인으로서의 나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끝나는 순간, 아들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나의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가 실패하게 되더라도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죄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신자로서 내가 실패하게 될 때, 나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의 실패와 죄를 아뢰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죄를 고백할 때, 그 죄는 없어지게 되며 또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사실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서 알고 있습니다. 죄가 신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자가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까지는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측면은 제어적인 속죄로써, 그것은 죄의 일시적인 결과와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내가 알고 지내온 어떤 그리스도인을 나는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구원받기 전에 술에 빠져 지내던 대단한 술고래였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나 구원받고 30년이 넘도록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왔지만 그는 과거의 죄로 인하여 육체의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죄의 형벌이 그의 몸에 나타날 때, 때때로 그는 하나님께서 과연 자기를 용서하셨는지에 대해 시험에 들곤 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수반되는 일시적인 형벌을 허용하십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것을 하나님의 손길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게 될 때, 하나님은 제어적인 죄 용서를 베푸셔서 과거 술주정뱅이 시절에 잃어버렸던 건강을 회복시키기도 하시며, 또 영원히 빼앗길 줄로 생각했던 축복들을 회복시키기도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에 근거해서 이뤄집니까? 그것은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으로부터(out)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according)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측량할 수 있습니까? 그분의 은혜는 얼마나 풍성합니까? 그분은 백만장자입니까? 그 이상입니다. 억만장자입니까? 그 이상입니다. 이런 말을 계속하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하기 때문이며 또한 축복스럽게도 우리는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용서받고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복하건대, 그것은 단순히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으로부터가 아닙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당신이 어느 백만장자를 찾아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당신의 얘기를 듣고는 그렇지만, 조그만 도움밖에는 드리지 못하겠군요라고 말하며 10달러 한 장을 줍니다. 아마 당신은 그에게서 1,000달러는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의 부요함을 따라서가 아니라, 그의 부요함으로부터 당신에게 준 것입니다. 만약 그가 사인을 한 백지 수표를 당신에게 주면서 이것을 받으시고 필요한 액수를 기입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부요함을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죄사함을 받았고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은혜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시는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십자가의 사역과 거기서 돌아가신 그분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5:9) 일찍 죽임을 당하셨던 어린 양께 모든 권세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영원토록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 H. A. 아이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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