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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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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18. 23:19 빛 가운데로 걸으며

[2:6~8]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에서는 말을 참으로 매우 중요시 한다. 이것이 지나치다 보니 많은 분들이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날 뿐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모순도 나오고 사용되는 말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고 남에게 설명하고 전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정확한 언어 구사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 중에는 정확하지 못하고 성경적이지 못한 것들이 있다. 성경에는 올바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가 외국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고쳐져야 할 것들이면서도 습관적으로 교회내에서 바르지 않은 이런 말들이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다음은 교회내에서도 잘못된 것인 줄 몰라서도 그렇고, 또는 알면서도 관행화되어 왔기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 말들이 많은데 많은 언어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자주 지적하는 것들이다.

 

당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당신이라는 말은 상대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되어 있다. 결코 높임말은 아니다.

1.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 하오할 자리에 쓴다. - 평교간이나 손아랫사람을 부를 적에 그 이름 대신으로 쓰는 것이다. 부모에게 당신이라고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당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2.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3. 문어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
  4.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차별 또는 비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 종종 맞서 싸우며 언쟁을 벌일 때에도 이 "당신"이란 말이 잘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5. ‘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말로 3인칭으로 사용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나 주님은 결코 3인칭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자는 하나님을 당신으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찬송가의 가사에도 이런 사례가 자주 보이고 있는데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축복

축복이라는 말은 빌 祝 복 福, 자이다. 복을 빈다는 뜻이며 즉,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빈다는 뜻의 말이다.

우리 한국 성경에서 축복과 복이 잘 번역이 되어 있는데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무지가 아닌가????

성경적 사례로 보아 이삭이 야곱에게 복이 있기를 하나님께 비는 것(창 27:41)과, 또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창 14:19)것, 아론이 그의 자손과 백성을 위해 복을 비는(레 9:22, 민 6:22-27) 사례는 ‘축복’의 형식이 되는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복과 축복은 개념상의 차이가 있다. 복은 하나님과 당사자 관계에서 하나님이 직접 베풀어주시는 것이거나 또는 제3자가 받을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 자체를 지칭할 때 쓰는데 비하여 축복은 복 자체가 아니라 복을 제3자에게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일반 사전에도 ‘복’은 “평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과 좋은 운수” 즉 ‘복’ 자체를 규정하였고, ‘축복’은 “남을 위하여 행복하기를 빎”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내리기를 비는 것”을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축복’은 할 수 없으나 복은 내리는 것이고, 반면에 사람은 복은 베풀 수 없으나 ‘축복’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면 만복의 근원자가 어느 대상에게 복을 달라고 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축복은 하나님을 주체로 할 때에는 쓰여서는 안된다. 알게 모르게 사용하는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위에 무언가 어떤 대상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면서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용어가 되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서는 더 높은 누구가 있어서 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분이 결코 되실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을 주체로 하여 축복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그 어떤 다른 이에게 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므로 복을 주시는 분이지, 복을 빌어 주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축복을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

또한 "축복합니다"라는 말을 듣는데 이 말은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인데 무슨 좋은 복을 비는 뜻으로 오해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바른 말은 하나님을 향해 "00 형제에게 복을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예배를 본다

예배를 본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예배는 눈으로 구경하는 쇼가 아니다. 남이 예배드리는 것을 구경하는 듯한 예배본다라는 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예배하다, 예배드리다가 적당하다. 이 말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의식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죽으시다

성경말씀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어떤 이는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은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며 고백한다. 돌아가셨다라는 예의 바른 말을 쓰지 않고 죽으셨다고 하는가. 분명히 불경스러운 표현인데도 많은 성도들은 이 말이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습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죽으셨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고 공경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 바깥 사람들이 듣는다면 퍽 의아해 할 만한 일이다. 아버지(육신의)께서 돌아가셨다고 해야지, 누가 아버지가 죽으셨다고 하겠는가.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이라면 고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 00 형제님께 은혜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에 00 형제님, 우리 성도님과 같은 표현은 잘못이다. 우리말 존대법에 존경을 받는 분 앞에서는 님자를 쓸 수가 없다. 우리도 저희가 맞다.

 

성경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봉독이란 말은 남의 글을 받들어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말씀 자체가 너무 존귀해서 소중히 읽는다는 뜻이지, 듣는 사람이 귀해서 읽어 올린다는 뜻이 아니다.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란 말도 그냥 봉독하겠습니다로 해야한다. 봉독이라는 말에 이미 받들어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준비찬송

준비찬송이라는 말은 많이 쓴다. 흔히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부르는 찬송을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찬송은 예배와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에 찬송으로 예배를 준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 순간부터 예배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의식만이 예배는 아닌 것이다.

 

찬송이나 한 장 부릅시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만 불려져야 한다. 찬송이나 한 장…이란 말은 시간이 좀 남으니 하나님께 영광이나 한 번 돌리자는 무성의함의 뜻이 담겨져 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장내 정리정돈을 하기 위해서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잘못이다.

 

찬양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을 감사함으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드리는 것으로는 찬양, 기도, 감사, 봉헌 등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말씀, 은혜 등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입장에서 예배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헌하는 것이다. 말씀과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봉헌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말씀과 은혜를 주시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반대인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랫사람이 웃어른의 물으신, 또는 부르신 데에 대한 답으로는 제가 여기 있나이다가 당연히 맞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웃어른이 물으실 때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관행이나 예절을 무시한 언어는 이미 언어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예배는 그 자체가 훌륭한 목적이지 수단은 아니다. 예배시간에 드리는 찬송이나 찬양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찬양의 행위는 이미 은혜 받은 증거이지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헌금도 은혜 받기를 위해서, 기도도 은혜받기를 위해서, 찬양도 은혜를 위해서 하려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잘못된 이러한 표현의 방식들이 우리들에게 기복적 신앙관을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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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