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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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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이중적 관계

 

이번에는 주님의 백성과 세상에 대한 재림의 이중적 관계를 독자들에게 말하려 한다. 전자는 자기 백성들을 영접하시려고 오시는 주의 재림에 대해 신약성경에 진술되어 있고, 후자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말인 주의 날로 언급되어 있다.

이 양자는 우리가 성경의 여러 말씀을 살펴볼 때 알 수 있듯이, 결코 혼동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이 사실들을 혼동해서 그 복된 소망이 구름에 뒤덮여 가리우듯 오해되어 공포와 진노, 그리고 심판을 연상해 내는데, 실상 이러한 것들은 자기 백성을 영접 하러 오시는 주님의 재림이 아니라 주의 날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대하는 장엄하고 특별한 소망은 바로 자기 백성을 영접하러 오시는 주의 재림임을, 성경의 분명한 권위를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자. 이 소망은 오늘 밤에라도 실현될 수 있다.

예수께서 오늘 밤에라도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오실 수 있다. 방해할 것은 사실상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 것이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 어느 때고 오실 것이라고 우리는 즐거이 말할 수 있다. 복되신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오실 때는 공포나 진노 그리고 심판의 분위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둠과 암흑과 소동 따위가 있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유대인들에게 행한 첫 말씀 선포에서 선지자 요엘의 엄숙한 예언의 말씀을 인용한 내용과 같이 바로 주의 날에 나타날 것이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2:30,31). 무슨 말인가? 주께서 오실 때 그렇단 말인가? 아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의 일인 것 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영접하러 오실 때에 그 구속함을 입은 백성, 사랑하심을 입은 백성 외에는 그 아무도 주님을 볼 자가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자가 없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천사들의 말을 기억해보자. 그 누가 하늘에 오르시던 복되신 예수님을 보았는가? 그분의 소유된 백성들 외에는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1).

우리가 모두 성경의 말씀 앞에 복종하는 바, 주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의 날을 교회를 위해 주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과 혼동하는 것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간과하는 것이고, 성도에게서 참되고 고유한 소망을 강탈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베드로의 두번째 서신에 기록된 말씀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 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619).

이 말씀은 보다 사려깊은 주의를 요한다. 이 구절은 예언의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소망 즉 샛별과의 명료한 차이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아브라함의 후손과 관련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예언의 위대한 주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을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32:8,9).

여기 예언의 범위와 주제를 볼 수 있는데 곧 이스라엘과 열방이다. 이는 영적으로 어린 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사야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을 통해서 정리해 본다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그 지위나 분깃 혹은 그 전망에 대하여 단 한 줄도 찾아 볼 수 없다. 예언의 말씀을 성도들이 연구하기에 심오한 흥미와 대단한 유익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언의 범위와 대상을 이해하고 성도들의 특별한 소망과 예언이 어떤 대조를 이루며 위치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에 비례하여 예언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교회의 진정한 신분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구약의 예언을 올바르게 연구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다고 두려움 없이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간단한 글에서는 교회의 주제를 다루기가 곤란하다. 이 주제는 다른 곳에서 반복적으로 언급 되어 왔는데, 여기서 분명히 진술한 내용 즉 구약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된 바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점검해 보라고 단순히 권하는 바이다.

우리에게는 신약성경이라는 완연한 빛이 있으므로 모형이나 그림자 그리고 예증 따위를 살펴보며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위대한 비밀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구약을 믿는 신자가 그 큰 신비의 사실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에베소서 3장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구약성경에 감춰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감춰진 것이라고 영감을 받은 사도는 명백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89). 골로새서에 우리는 또한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1:26).

이 두 구절의 말씀은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의 진술이 진리임을 뒷받침 해주고 있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큰 비밀이 구약성경에서는 발견될 수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어 하늘에 계신 머리 곧 그리스도께 어떻게 연합되는지를 나타내주는 말씀을 구약성경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중간에 놓인 담이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으로 버티고 서 있는 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만일 구약시대 섭리의 특색이 무엇인지 누군가에게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지체없이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엄격한 분리라고 말할 것이다. 반면에, 교회 혹은 기독교에 대해서라면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긴밀한 연합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요컨대 두개의 조건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양자가 동시에 적용되기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중간에 담이 가로놓여 있는 한 교회의 진리가 드러날 수가 없다. , 그 담을 무너뜨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나타내심과 내주하심을 통해, 한 몸을 이루게 하고, 그 몸을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연합시키기 위해 하늘에서 오신 성령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큰 비밀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다름 아닌 구속의 성취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이 사실을 독자 스스로 확인해보도록 청하는 바이다. 이 사실이 참인지 아닌지 성경을 상고해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자의적인 생각이나 추론 그리고 편견과 편애를 떨쳐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성경 앞에 나아와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이 귀하고 흥미로운 주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이뤄지고 그 결과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시기 전까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더욱이 사도 바울의 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온전하고 영광된 교회진리가 드러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6:25,26; 13, 1:2529). 마지막으로, 교회의 지상역사와 성도의 휴거(살전 4:1317)에 대한 실제적이고 확실한 경계선이 오순절( 2)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합당한 소망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그 소망은 다름아닌 광명한 새벽별이다. 하지만 이 소망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자들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심판하는 날과 그 심판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주의 날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그리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2:1222 및 병행구절 참조). 그러나, 진노, 심판 그리고 공포가 수반되는 상황의 주의날과 주께서 자기 백성을 영접하기 위해 오시는 주의 재림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복되신 우리 주께서 오실 때 두려워 떨 일은 아무것도 없다. 주님께서는 모든 자애로우심 속에 오셔서 그 사랑하시고 구속함을 얻은 백성들을 영접하실 것이다. 주님은 은혜의 대 사역을 마치시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9:28).

주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오는 것같이 오실 것인데, 오직 그분의 백성들 외에는 아무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주께서 오늘 밤에 오신다면(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잠들어 있는, 구약시대의 성도들이건 신약시대의 성도들이건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자들, 그들이 어느 공동 묘지에나 혹은 어느 무덤에 또는 어느 깊고 깊은 바다에 잠들어 있건 간에- 이 모든 자들이 잠시 자는 잠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은 순식간에 흘연히 변화하여, 들림을 받아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아버지 집에 이르게 될 것이다(14:3; 살전 4:16,17; 고전 15:51,52).

이 일은 성도들이 들림을 받게 될 상황을 보여 주는데, 이스라엘과 열방과 직접 관련이 없다. 그것은 교회의 분명하고 유일하게 합당한 소망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 어디에도 이에 대한 한 마디 말씀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만일 누군가가 있다고 단언한다면 그로 하여금 한 말씀이라도 찾아보게 하라.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제시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씀은 전혀 없음을 엄숙히 그리고 신중히 단언하는 바이다. 교회의 신분, 부르심, 분깃 등 교회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신약의 여러 말씀 중에 주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언의 말씀교회의 소망으로 혼동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손상시키는 일이요 그 백성들을 오도하는 일이다. 교회를 받아들이는 사람들 속에서 사단이 그런 일들을 계속하고 있음은, 슬프게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영적인 사고를 가진 성도들이 매우 드물다. 그들은 교회의 소망을 예언의 말씀에서 주의깊게 살펴본다. 그들은 의로운 해새벽별로 혼동하여, 자기 백성을 위해 오시는 재림을 백성들과 함께 오시는 것과 혼동하는 것이다. 주님의 오심(재림)(His coming) 혹은 임재의 상태(state of Fesense)그분의 출현 혹은 현현(anearing or manifestation)과 동일한 일로 보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우리가 독자들에게 그토록 주의하기를 바라는 아주 중대한 오류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오실 때,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이다.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분의 백성들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 리라(3:4).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시행하시려고 오실 때, 그분의 백성들도 함께 올 것이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14,15). 또한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흰말을 탄 자를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흰말을 탄 하늘의 군대가 따른다. 이 군대는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성도들이다. 왜냐면 천사가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는 말씀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 바로 이 19장에서 이는 성도의 옳은 행실(8)이라고 명백하게 선포하고 있다.

,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때에 성도들도 함께 한다면, 성도들이 미리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명백하다. 의심을 하는 바는 아니지만, 계시록 12장에 나타나는 남자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로 올려가는 것이(5) 장차 성도와 함께 심판하러 오시는 일과 무관하다면, 주의 백성들이 주님께 들림을 받아 올라가는 말씀은 계시록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남자 아이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은 하나 되어 나누어질 수 없게 되었으며,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되어 그의 거룩하심과 보배로운 이름으로 영원히 복된 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나 혹은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만나기 위해 들림을 받는 일 또는 그리하여 주님과 함께 아버지 집에 이르는 말씀은 계시록의 범주에서 전혀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 복된 사실들에 대하여는 예를 들어 요한복음 4:3, 고린도전서 15:23,51,52, 데살로니가전서 4:1417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부분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라. 이 명백하고 귀한 말씀이 그 영혼 깊숙히 젖어들게 하라. 이 사실들에 대해서는 어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추호도 애매하거나, 막연하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초신자들도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거룩한 성경의 직접적이고 확실한 가르침대로 거듭해서 단호히 주장하는 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영접하고 아버지 집에 이르러 그곳에서 함께하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열국을 통치하시고, 공정한 행위로 처음 나신 자 안에서 세상으로 인도해 들이기 위한 길을 예비하신다.

그런데, 만일 왜 계시록에는 자기 백성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을 한다면, 계시록은 1장에서 20장까지 통치와 사법적인 책이고, 심판에 대하여 미리 기록한 탁월한 책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할 수 있겠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도 심판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계시록 2,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인 교회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지상의 충실한 증인으로서 교회는 그 상태에 대하여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의 신중한 점검과 엄한 판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휴거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은 이 책의 특성이나 목적상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책임성 있는 위치에서 지상의 교회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후 19장까지 지상의 교회에 대하여는 단 한 마디도 없다. 이 명백한 사실을 그 특별한 기간에 교회가 지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시사해 준다. 교회는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거룩한 처소 곧 아버지의 집에서 말이다. 계시록 4,5장에, 하늘에 면류관을 쓴 24장로들과 더불어 구속 받은 자들이 보인다. 인이 떼어질 때에 나팔이 울리고 진노가 쏟아질 것이다. 복되게도 구속함을 입은 자들은 이 때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지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요한계시록 6장에서부터 18장을 비추어 볼 때, 교회가 묵시록적 심판에 참여하고, 대 환난에 참여하며, 지상에 거하는 모든 자들을 시험하려고 온 세상에 임할 유혹의 때에 참여하게 되어, 이는 교회의 신분을 왜곡하고, 교회의 고유한 특권을 강탈하는 것이며, 주님의 분명하고 절대적인 언약이 모순이 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코 그렇지 않음을 독자들은 깨달아야 하며, 그 누구라도 속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교회가 지상에 위치한다. 4장과 5장에서는 교회가 구약의 성도들이 함께 하늘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회가 어떻게 하늘에 이르게 되었는지 계시록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교회가 하늘에서 친 교를 나누며, 거룩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시록 19장에는 횐 말을 탄 자가 성도들과 함께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심판하고, 대적자들과 악한 자들을 멸하고 지복천년 동안 세상을 통치하시려고 나아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소개하기를 원하는 바 신약성경의 명료한 가르침이다.

우리가 단호히 말하지만, 교회가 대환난에 참여하지 않으며, 시험의 때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가르친다고 해서 이것이 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때에 순탄한 길이나 찾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가르침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참 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 진실하기만 하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게 될 몫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은 회피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신분과 장래에 대한 전반적인 진리가 바로 이 질문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독자들의 신앙에 간곡히 촉구하기를 원하는 내용이다.

우리의 대적들의 최대의 목적은 하나님의 교회를 땅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거룩한 소망에서 벗어나게 하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혼동하게 하며, 세상의 썩어질 것들에 얽매이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오심을 주의 나타나심 곧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과 혼동하게 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는 신부의 사랑과 하늘을 향한 열망을 키워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성도들이 그들과 그들의 참된 소망 간에 개입해 오는 다양한 세상사를 기꺼이 경계하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하셨듯이, 광명한 새벽별이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그들이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보고, 열렬히 갈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의 대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더우기 주님의 계획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써 영광된 주님의 재림에 관한 “이중적인 관계”를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C. H. 매킨토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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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