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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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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강림과 (1)

 

이제 잠시 독자들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록된 두 서신을 참고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스러운 재림에 대해 회심한 자들이다. 그들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며 살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에 간직해 온 주님의 강림에 대한 교리에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의 강림을 사모하는 심령들이 끊임없이 기대해 마지 않던 거룩하신 위격 곧 주님 자신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듯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복된 소망에 관한 사실에 대해 무지했다. 사도 바울은 비록 마음에서는 아니었을지언정 그들 중에서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 소망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들을 가르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그리고 바로 그 분이 진노에서 은혜롭게도 자신들을 구원하신 복되신 구주이심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백성들을 위한 강림과 백성들과 함께 하는 강림의 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임재의 상태(state of presence)나타나심(appearing)간의 차이 주와 강림과 여호와의 간의 차이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처음에는 전혀 무지했다.

이런 까닭에 혹 짐작해볼 수 있듯 그들은 여러 가지 오류와 실수를 범했다. 인간의 마음이란게 얼마나 무모하고 엄청난 혼동과 잘못으로 속히 빠져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순수하고 견실하고 적합한 진리로 인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두루 균형 잡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모양의 거짓되고 우둔한 생각에 틀림없이 빠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은 그들의 분명한 부르심을 저버리는 생각을 품었다.그들은 손으로 수고하기를 멈추고 게으름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큰 실수였다. 비록 오늘 밤에라도 우리 주님께서 오실 가능성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주께서 우리를 그 선하신 손으로 인도하사 머물게 하신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과, 아주 부지런히 그리고 충실히 해야 할 일상의 의무를 게을리 할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복되신 주님을 기대하는 그 사실은, 주님께서 오실 바로 그 순간까지, 단 하나의 의로운 요구조차도 무시되어 방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상태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도록 우리의 열망을 강화시킬 것이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임하시기를 고대하는 소망이 영혼 속에 강하게 붙들려 있을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과 인격에 가장 잘 정화시키며 깨끗케 하며 조화시키는 영향을 준다. 우리의 심령과 삶이 그리고 행실과 행동 그리고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가장 영광된 이 진리가 단지 입술로만 경박스럽게 공언되고, 이해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른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필시 이 깨끗케 함은 날마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면에 해당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빠져 버린, 그리고 사도가, 진실되고 충성된 목자처럼, 그들을 회복시키려고 부심했던, 또 다른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죽은 자들이 환희에 찬, 오래도록 사모해 온 바로 그 때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실수야말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들의 복된 소망을 얼마나 생생하게 지각하고 있었는지를 반증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정 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잘못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도가 이 부분에 대해서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는 말씀을 세심히 주목해 보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3,14).

이 점을 주목하라. 즉 사도는 슬픔에 잠긴 성도들을 머지 않아 그 죽은 자들을 뒤따르게 되리라는 보증의 말로 위로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주님께서 죽은 자들을 함께 데리고 올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고 있다. 이 진리는 명백하고 확실하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위대한 진리 위에 확고한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이에 멈추지 않고 믿음 안에 있는,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생생한 빛을 비춰 줌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517).

이제 우리는 가장 영광되고 가슴 벅차 오르게 하며 황홀하게 만드는 주제, 즉 하나님의 교회가 고대하는 가장 빛나는 소망이요 또한 성도 개개인의 소망인 성도의 휴거라고 우리 중에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사실을 제시했다. 주님께서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면서 자기에게 속한 성도들의 귀와 마음에만 울려 퍼질 호출 명령을 내리실 것이다. 귀가 할례받지 못했고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지 못한 자들은 한 사람도 하늘의 음성을, 거룩한 나팔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믿는 바 신약의 성도들은 물론이요, 그들이 구주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자들이라면, 구약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거룩한 음성을 들을 것이며, 잠자던 처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살아 남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그 소리를 들을 것이며,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이다. 그 어떤 변화일 것인가! 무너져가는 일개 진토의 장막 같은 초라한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된 모습으로 바뀌는 변화가 될 것이다.

저기 저 구부러지고 이울어진 몸체를 보라. 고통에 찌들고 극심한 고난의 세월에 허약해진 몸을, 이것이 성도의 몸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그렇다. 그러나 잠시 기다리라. 나팔소리가 울리리니, 한 순간에 그 초라하게 무너지고 기울었던 몸이 변화되어 강림하시는 주님의 영광 된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저기 저 정신병원에 한 가련한 병자가 있다. 그는 오랜 세월 그곳에 갇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성도이다. 얼마나 뜻밖인가! 이는 사실이다. 우리가 측량치 못할 신비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이니 그 불쌍한 환자는 하나님의 성도요, 영광의 상속자이다. 그도 역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을 들을 것이며, 그 때 그는 정신병을 영원히 벗어 던져버리고서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으로 공중에 올라 강림하시는 주님을 맞게 될 것이다.

, 독자들이여, 그 얼마나 찬란한 순간이겠는가! 병실과 임종을 기다리는 침대가 그 때는 얼마나 많이 텅 빈채로 남겨질 것인가! 얼마나 경이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이 생각을 하기만 해도 얼마나 마음 설레며, 그 아름다운 찬송을 합창으로 부르기를 얼마나 열망하게 되는지!

 

주님 다시 오시리니

그 기다림은 헛되지 않네.

주 오셔서 부르실 때에

나 주의 영광을 보리

천사장의 소리 울리니

잠자던 자들 일어나고

수많은 성도들 찬양하네.

복되신 주님의 이름 앞에

이는 구속자 하나님이실세.

영영 찬송을 받으실

천지의 구주 예수시라

구속된 자들이 외치네.

아멘, 아멘!

 

잠자던 그 수많은 자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그들 중에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 주신 복 되신 자를 바라보는 소망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것이 구약성경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단 한 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인 것이다. 예언의 말씀은 아주 중요하기에 우리는 이에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어둠 속에서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어둠을 비칠 밝은 등불을 지니는 것은 큰 은혜이다. 하지만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 사실을 새겨두게 하자. 즉 그들이 원하는 바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샛별을 소유하는 것임을‥‥ 달리 말하면, 광명한 새벽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소망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게 하는 것 말이다. 성도의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지고 다스려질 때, 우리 눈은 예언의 도표를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언을 연구해서 교회와 교회의 소망을 찾아보려는 일은 방향을 전혀 엉뚱하게 잘못 잡은 것이다. 우리가 거기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대인이방인 뿐이지 하나님의 교회는 아니다. 독자들 중에 이 중대한 사실을 포착하지 못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언이란게 무엇에 필요한 것이냐? 예언이 기록된 말씀에서 교회에 관한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예언이 성도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면, 그것을 대하는데 조심없이 하지 않도록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전혀 가치가 없겠는가? 예언의 말씀에서 직접적인 주제를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런 흥미도 갖지 못한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 주신 권고와 목적 그리고 계획을 취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말씀과 예언으로 나타내신 사상을 우리가 취할 때에 그 크신 호의를 가벼이 취급할 것인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8:17)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라함은 가벼이 취급하지 않았다. 그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소돔성과 그 이웃 도성에 대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그들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에 대하여 그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가?

아브라함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신뢰해서 자신의 깊은 생각이라도 보여주시는 대상으로 삼으신, 그 특별한 호의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감사하지 못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충성스런 족장은 자기에게 부여해 준 특권에 대하여 고귀하게 여긴 것이라고 단정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그런즉 우리도 그러해야 하리라. 우리에게 계시하신 사실들로부터 우러나오는 모든 흥미를 가지고, 이스라엘과 열방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곧 시행하시려는 역사인 예언을 우리는 신적인 정밀함(divine precision)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예언이란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기록이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비례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연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실로 예언의 진실성은 그것이 성취되는 모습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미래에 관하여 절대적이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한 모든 것을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다. 믿음의 판단에 있어서, 예언이 사실인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것이 성취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히 모순된 일이다. 우리 하나님의 비길데 없는 계시를 모욕하는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제 잠시 중대한 주제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로 돌아가 보자.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그에 관련된 모든 구절을 다 인용할 수 없겠으나, 한두 귀절을 참조하고 나서 독자들이 스스로 본 주제를 좀더 심도있게 연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2장에 이와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1221).

요엘 2장에도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의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그들이 용사같이 달리며 무사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111).

이들 유사한 구절에서,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이 세상과 배도한 이스라엘, 인간과 그 행위, 그리고 인간이 마음으로 소중히 여기고 갈망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아주 엄숙한 심판이 내려질 것을 연상케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요컨데, 여호와의 날은 인자의 날(mans day)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현재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이지만, 그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될 것이다.

주의 모든 백성들이 주께서 다스리실 날을 대망하며 즐거워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날은 세상이 심판을 받는 중에 드러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의로운 통치가 우주적으로 이뤄지는 특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특별한 소망은 심판과 진노 그리고 공포가 수반되는 날이 아니라, 평강과 환희 그리고 사랑과 영광이 수반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임재의 날이 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무시무시한 날이 이르기 전에 교회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주님과 더불어 아버지 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날이 세상에 전개되기 앞서 교회가 천국 가정의 형언할 수 없는 교제를 맛본다는 것은 교회에게 주어진 축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 하는 자들로, 아브라함의 씨요 남은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취하게 될 거룩한 분깃은 의로운 광선이 떠오를 때인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교회는 광명한 새벽별을 충만한 기쁨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장래에 대한 사고와 견해 그리고 희망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의심 한점 없이 자신의 참된 소망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희미하고, 애매모호하며, 혼동스러운 모든 상태에서 빠져 나오게 해 줄 것이며, 한층 더 나아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대하여 생각할 때 가지게 되는 두려운 느낌을 완전히 제거해 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심판과 공포, 명예의 실추, 지진, 소동, 변혁 등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요 복되신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도록 가르칠 것이며,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과 함께 있을 확고한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평온과 기쁨이 넘치도록 도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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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