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들
(1840~1880)
헨리 무어하우스 혹은 보다 더 다정하게 “해리 무어하우스로 불리었던 영국의 부흥전도자는 만체스터에서 출생하였다. 젊었을 때 그는 몇차례 교도소에 갔던 일이 있었고 그 후 군에 입대하였다가 제대하였다.
어느 날 만체스터에 있는 알함브라 써어커스 단장으르 지낼 때 마침 리차드 위버가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안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마치 싸움이 벌어진 것 같이 생각 되어 해리는 그의 상의(上衣)단추를 풀고 싸움판에 뛰어들어 한바탕 할 생각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 서자 그는 한마디 “예수”라는 말에 사로잡혔다. 그 영광스러운 이름이 전도인의 입술을 통하여 튀어나올 때 그 방황자의 가슴엔 마치 총탄처럼 또는 진통제 주사처럼 박히었다. 그의 유년시절은 무절제한 것이었고 끔찍한 위험이 그의 환상에 어른거렸으나 그 “영광스런 복음”(고후 4”4)이 그의 가슴에 귀착 되면서 그의 남은 여생을 찬양과 기도의 생활로서 싸우며 살아가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건전하게 하나님께 회심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새 주인을 섬기는 일에 들어갔다. 그의 첫번째 봉사는 단순히 노천이나 노방에서 전도하는 것으로서 지방이나 국가의 행사장이나 또는 특별한 경기장 등에서 하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의 시간을 전도지 배포에 쓰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개별접촉을 통하여 전도하고 혹은 거리에서나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장차 올 진노로부터 피할 것”을 큰 소리로 외치곤 하였다. 옛날의 사도처럼 그는 하나님의 환상들을 갖었다. 어떤 때 그는 잠자고 있는데 만체스터시의 세 젊은이를 보았다. 각자가 이상하게 흰 자케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에는 “이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잇다!”고 적혀 있었다. 그곳은 병원에 가까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갚은 불못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못보고 있었다. 해리는 큰소리로 그들에게 정지하라고 외쳤으나 그들은 주의하지 않았다. 해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당신의 영으로만 할 수 있나이나”고 했다. 그들은 그때서야 급히 돌아서서 위험을 알았다. 이 꿈은 금요일 밤에 꾼 것이었다. 다음날 토요일 저녁에 헨리가 알함브라 써어커스 장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 그 때 꿈에 나타났던 세 젊은이들이 그곳에 왔다. 그 집회가 마치기 전에 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았다.
1854년에 일기 시작한 부흥의 물결은 1860년에 최고조에 달했는데 그때에 무어하우스도 구원받은 것이다. 이렇게 그는 일찍이 열정적인 전도자 리차드 위버와 접하게 되었고 그는 위버의 방법을 많이 닮았다. 그로부터 영향을 입은 전도인들은 구원 얻은 배우인 죤 햄블톤, 선창 노동자 에드와드 엇쉬, 구원 얻은 악당 윌리암 카터, 백정이었으나 후에 진리를 위한 훌륭한 참피온이 된 헨리 발리, 리버풀의 변호사 레지날드 라드크리프, 부자 브라운로 노-스, “깽깽이 좃쓰”로 알려진 자슈아 풀, 주석가 던햄 스미스, 메트로 폴리탄 태버내끌의 C.H 스펄죤, “저 건너(피안) 땅”의 에취 그랏탄 긴네스 기타 수명이 있고 D.L. 무디와 아이라 D. 쌩키는 그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 특히 D. L. 무디로 말하면 그가 전도인이 되기전에 YMCA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헨리 무어하우스 형제가 시카고에 와서 대부흥집회를 인도할 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씀에 크게 감동되어 무디도 전도인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디에게 절대적으로 그리고 직접 영향을 주어 전도인으로 만든 것은 주님 이외로 이 헨리 무어하우스 형제이다.
주님의 일에 자기의 전 시간을 드리도록 특별한 소명을 받은 헨리는 “모자 안쓴 전도인”으로서 알려진 열심있는 부흥사이었다. 어느 날 저녁 헨리가 잡화의 경매인으로서 목 청을 돋구어 외치고 있었다. 그때에 모자 쓰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그 앞에 나타나서 큰소리로 외치기를 “당신은 당신의 성경을 손에 들고 군중들 앞에 나타나서 외쳐야지 마귀를 위한 망치를 들어선 안되오”하고는 즉시 사라졌다. 그 짧은 그러고 끔찍한 소리가 벼락처럼 헨리에게 느껴졌고 그 말은 그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큰 힘으로 불어왔다. 그는 즉시 경매인의 망치를 던지고 리버풀로 가서 햄블톤을 찾아 그와 함께 각지방으로 순회 전도 여행에 들어갔다. 그날 이후로 헨리는 고정된 급료를 받지 않고 또는 인간적인 지원의 약속도 받지않고 전도인으로서의 특별한 일에 전력하게 되었다. 전도인 죤 햄블톤과 가수 에드와드 엇쉬와 젊은 제자 헨리 무어하우스가 힘을 합쳐서 스트라트 포드에서 있었던 윌리암 섹스피어의 300주년 기념식에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위한 그리스도! 주 찬양! 무료속죄!”라는 말을 쓴 간판을 만들어 들고 다니며 외쳤고 “그날에” 풍성히 갚아주실 열매를 거두었다.
이 세분이 악의 구렁이 빈민굴의 죄인들, 경기장 등에 나타나서 전도한 이야기며 극장에서의 전도 등은 유명하다. 런던에서는 14개의 극장을 순회하며 천도했는데 어느 주일날 저녁에는 극장들이 꽉꽉차서 “구원의 도”를 들었다. 어떤 때는 사형 집행장에서 전도했고 아일랜드의 수많은 천주교 마을에서 전도했다. 이렇게 수고하며 전도한 일꾼에게 “더욱 풍성한 열매가 맺혔고 꽃이 피고 봉우리가 맺혔다”고 사람들은 평했다.
영국에서 너무 고되게 일하여 지친 헨리 무어하우스 형제는 좀 쉬어야 할 입장에 들어갔다. 그는 미국을 향하여 출발하여 1868년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하였다. 그에 대한 환영은 굉장했다. 그의 사역은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십년동안 다섯번이나 미국을 방문하였다. “헨리 무어하우스가 어떻게 세계를 움직인 사람이 되었는가”를 DL 무디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 알 수 있다. “1867년에 내가 더블린에 갔었는데 집회가 끝나고 아주 젊은이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오더니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전도하기 위하여 가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녀는 「당신과 약간 다르게 전한다」고 하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가르치며 당신도 그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나는 그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나와 반대로 전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토요일 날 밤에 가서 ‘듣자니 나와 다르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나는 당신을 좋아할 수 없소’라고 했다. 그러나 그 후 나도 헨리가 전한 “하나님의 사랑”(요
(197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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