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할 예의가 언제부터 이 같은 모습으로 자리잡았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별로 반발을 느끼지도 않으며 자연스레 순응하는 기질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애써 배우려는 태도까지도 갖고 있는 듯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론 양(洋) 의 동서(東西)와 금석(今昔)의 차이에서 동일한 사실이지만 다른 에티켓이 요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How old are you?”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선 흔히 년로(年老)해 보이는 분에게 춘추 또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여쭙고 이에 상응하는 예우(禮遇)를 하는 것이 상례(常例)였으며 또 질문을 받는 사람도 기꺼이 대답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회고(回顧)와 함께 일촌광음(一寸光陰)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귓뜸을 해주는 것이 도리인양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우리의 풍습과 예의에 도전해 오고 있는 에티켓이 바로 “How old are you?”인 것입니다. 백발과 얼굴의 주름이 70을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하고 질문을 했던 것이 꽤 섭섭하셨는지 아니면 자신의 연륜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서구적 감각에 예민한 것을 과시(誇示)하고자 하셔서인지····?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야. 너는 얼마나 늙었느냐는 말인데 내가 1898년 생으로 19세기 말에 태어난 늙은이로서 Body(몸)는 늙었지만 Sprit(심령)은 새롭단 말이야!”하고 응수(應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80노인께서 유창하진 못하셔도 영어를 사용하시면서 일가견(一家見)을 갖고 말씀해 주시는데 흠칫 놀랐습니다. 전에도 상대방의 나이를 묻는다거나 수입을 묻는 것이 실례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은 있습니다. 그 밖에도 갓 태어난 아기에게 “누굴 닮았을까?” 묻는 것도 쉬운 질문이면서도 큰 실례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 같은 말이 실례가 되기까지엔 숱한 애환(哀歡)과 희비(喜悲)가 범벅이 되며 흘러오는 동안에 풍습으로 굳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더욱이 젊은이들에게도 How old are you?는 큰 파문을 일으키는 모양입니다. “왜 그래 20살 넘었다”고 응수 할라치면 마치 나이를 묻는 다는 것은 임전태세를 갖춘 뒤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설명인즉 20대는 그 세대대로 내가 어리기 때문에 깔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착각을 하는가 하면 30살이 넘은 숙녀들에겐 나를 벌써 늙었다고 빈정대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곡해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나는 나의 실례를 가리우기 위하여 장광설(長廣舌)을 늘어놓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社會)통념(通念)이 규정하는 대로 실례를 시인하며 다만 하나님은 이 일에 무슨 말씀을 주시는지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최초로 창세기 47장 8절에 바로가 야곱에게 “네 연세가 얼마뇨?”라고 묻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야곱은 130년의 인생역정이 별빛 흐르듯 뇌리에 스쳐가 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단 한마디이지만 의미심장하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회고했습니다. 과연 시편기자로 더불어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각 사람이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여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한다(시 39:6)는 말씀은 인생의 맹목(盲目)을 통렬(痛烈)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옛 글에도 인무백세한(人無百才限)이나 광작천년계(匡作千年計)라고 죽을 줄 알지 못하는 인생을 교훈했고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마치 멸망하는 짐승 같다(시 49:12)고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연세는 얼마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자랑은 무엇이었으며 포부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인생의 미련과 어리석음을 해학적(諧謔的)으로 경고하셨습니다. 사업의 확장과 여생의 안정이 지상의 행복으로 알고 있었지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요
(1978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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