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교사 샘터
고침 받은 중풍병자
(누가복음
마태복음 9장 1-8절과 마가복음 2장 1-12절에 기록된 유사한 설명을 비교해 보라. 누가는 단순히 “어떤 도시에” 마태는 “그 자신(예수)의 도시” 마가는 “가버나움”과 “집에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곳은 그분이 성장하신 나사렛이 아니라 “가버나움”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마태복음 4장 13절에서 보는 대로 “나사렛을 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이 누가복음 4장 29절에서 일어난 사건의 결과였다.
가버나움의 그리스도께서 유하신 집에서 이 이적이 일어난 것 같다. 그리고 그 이적이 어떤 낯선 사람의 집에서 잃어났다면, 지붕 뜯는 이유가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무셨던 집은 시몬 베드로의 집이었던 것 같다(눅
지금도 마비 또는 중풍으로 불려지는 이 병은 죄로 인한 인간의 무력함을 상징한다. 로마서 5장 6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가 연약할 때”와 같이 이 사람도 분명히 자기 침대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서만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을 메고 온 사람들은 네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친구들은 그의 질병을 고치는데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환자를 데려오기 위하여 많은 장애물들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그의 친구와 부모, 교사,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그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다.
그분을 보려고 애쓰던 삭개오나 그리스도의 옷가를 만지러 애쓰던 여인에게 있었던 장애물이 이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에게도 있었으니, 그것은 그 집에 모여든 군중들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경우에 믿음과 진지함은 그 장애를 극복하고 길을 발견케 했다.
17절에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혼의 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놀랄만한 설명이 있다. 그러나 중풍병자 외에는 그들 중에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병고침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9장 11절에 “고침을 받을 필요를 느꼈던 사람을 다 고치셨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5장 31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는 기록을 보라. 죄인이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일이다.
율법학자들은 그들 자신도 고침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기술로는 병자를 고칠 수 없었다. 병자의 네 친구는 무능함을 알았기 때문에 즉시 권능있는 위대한 의사에게 그를 데려 올 수 있었다. 이것이 모든 전도자와 교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20절에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는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이었다.
20절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죄를 다루셨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항상 그래왔다. 지금 용서받은 사람은 그 후에 일어서서 하나님의 길로 걸어간다. 이 두 가지 일은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똑같이 쉬운 일이었다. 이 두 가지는 저들 율법학자들의 힘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전에는 자기를 운반하던 것을 이제는 자기가 그것을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25절에, 그는 이로 인해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25절에서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98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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