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 속의 빈 터(下)
백갑연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그의 말씀은 나의 사상을 모조리 정리해 놓은 것 같았다. 인생은 진정 苦海였으며 무상한 것이었다. 나는 이 고통의 바다를 해탈하여 부처가 되고 싶었다. 불보살이 되어 고통의 항해를 계속하는 중생을 건지고 싶었다. 그리하여 보살의 원(願)을 세우고 선(禪)의 경지를 깨달으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진리를 O(원)이라고 정의하는 사상에 나는 적극 찬동했다. O은 무(無)였다. 그런데 그것은 무한히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다. 無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그리고 그것 운 시작도 끝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저것 골아프게 생각해 보아도 내가 변한 것은 없었다.
여전히 지구는 돌고 있었으며 사회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 하나쯤은 이 거대 사회조직에서 이탈된다 해도 조금도 부족을 느끼지 않을 사회를 바라보며 나의 존재가 너무나 미약함에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정확한 나 자신의 가치를 알고 싶어 했다. 내가 꼭 필요한 곳에 놓여지기를 원했으며 내가 없어도 될 이곳이 싫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실망을 느꼈던 것은 나의 의지로 꼭 진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어긋났음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根本이 없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인생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이었으며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나는 「O이란」오는 곳도, 가는 곳도, 없고 보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없는 절대의 자리라고 억지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보이는 것도, 생각도, 느낌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근본에 대한, 진리를 찾는 갈급함을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을 바라보며 하잘것없는 生에 집착을 두고 있다고 비웃었다.
내가 상당히 지쳐있음을 발견하였지만 나는 쉬이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나의 정신이 피곤 하고 악해짐과 같이 나의 육체도 썩어버리고 싶었고 악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날 잡고 있는 어떤 끈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나이가 나이니만큼 궁상 그만 떨고 시집이나 가 눈앞에서 없어져 버려달라는 혈육들의 요구를 받아드려 적당한 자리에 시집가서 아이 낳고 키워가며 남편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싸워도 보고 웃기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소박한 행복이라고 하는 감정이 생겨 나리란 기대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는 또 강하게 거부하는 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너는 자신을 불완전한 사회나 어떤 사람을 위하여 바치려, 그 가운데서 자신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인간의 제도가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거기에 의탁한다는 것은 정말 수치스런 일이며 비굴한 일이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끝까지-결과야 어떻든 간에- 나 자신과 싸울 것이라는 각오를 다지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 이라고 일컫는 성경을 독파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으며 읽기 시작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며 또 신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 어느 쪽이나 하면 나는 철저하게 무신론자였으며 나의 사고는 합리적이었다. 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들의 헛점을 깨닫고 필요에 따라 이상적인 상(像)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이라 불렀으며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 한다”는 사상에 젖어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 첫 장에 내가 그렇게도 찾고 찾던 우주의 근본에 대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답이 나와 있었다.그렇지만 그 엄청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을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그 거대하고도 정확한 답을 믿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태초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사실을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면····?
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또 나 자신과 인간의 나약함을 돌아보며 지식의 한계와 그로 인한 외로움과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사는 것 같이 보였다. 자신들이 가질 것을, 자신들이 갖고자 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비록 순간적인 것일지라도. 그리고 그들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 확실한 불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난 단 한번도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다른 사람을 부러워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를 매우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사랑할 가치가 조금도 없고 사랑할 수 없는 나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나」이기에 소중한 것이었다. 남의 밥 속에 콩이 커 보았자 나와 무슨 상관인가.
만신창이 된 나의 의지는 참으로 쉬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알지도, 믿을 수도 없던 하나님이라는 분과 협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신이 진정 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라면 나로 하여금 절대적인 당신을 알게 하시고 날 쉬게 하소서. 이 세대 가운데서 날 건지시고 내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와 필요를 보이소서-.
그리고 나는 믿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해 오던 하나님을 부르며 나에게 참 안식을 주시기를 구했으며 나에게 필요한 참 안식은 죽음밖에 없음을 告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그 때 하나님은 조용히 나에게 오시었다. 그리고 나를 부르시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마
나의 눈이 경이로 가득찰 때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있는 자”(출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며 땅도 창조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나는 진리 가운데 행하는 하나님의 몸되신 교회를 다니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조상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죽은 아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나에게 허락하셨는데도 내가 진정 그분을 사랑할 수 없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난 그분이 나의 모든 피를 대신 지고 가셨음을 겸손하게 알려주었을 때 그것은 예수쟁이들이 으례히 하는 소리라며 나 자신은 당신들의 입으로 하는 가장된 사랑보다는 몸으로 실천하고 있노라고 속으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난 그분이 1980여 년 전에 내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그분을 저주했었던 것이었다.
조용히 나를 반성하며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어 죽으신 예수님의 손과 발에 계속 못박고 있는 자신의 악했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죄악의 정도가 너무나도 악함을 깨닫고 무릎을 꿇었다.
내가 간절히 죄사함을 구했을 때 그분은 친히 말씀해 주시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
내가 진리를 간절히 구했을 때 그분은 친히 그것이 되어 주시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그리하여 나의 심령이 살아나며(요
그렇게도 무의미하고 답답하고 암울하고 허무하던 내가 밟을 한치의 땅도, 내가 마실 한 홉의 공기도 없다고 허공을 치며 통탄하던 세상이 금빛 찬란하게도 나의 눈앞에 굴복하고 있음을 나는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세상을 나는 내 主 예수님을 통하여 바라보며 소유하게 되었다.
감사. 주께 감사. 다만 감사········
*** ***
저는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자나 늙어서 할 일이 없게 된 자나 자신의 의지가 약하여 세상 살아가기 힘든 자만이 믿는 줄로 알았더랬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감옥살이 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소망없는 사형수들이 살아가는 동안 위로 받으려고 불러대는 이름인줄 알았더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확실히 압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정말로 자신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아는 자들이며 늙어서 할 일이 없게 됨을 아는 자들이며 자신의 의지가 약하므로 세상 살아가기가 힘듦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소망없는 사형수임을 아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압니다.
그리고 저는 또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세상 사람은 모두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며 늙어서 할 일이 없게 되었으며 의지가 약하여 혼자서는 세상 살아가기 힘겹다는 것을! 이세상 모든 사람이 살인을 했기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고 있으며 사형집행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소망없는 사형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제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 중에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망없는 사형수에게 특별사면을 내리는 복음(福音)입니다.
그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기본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분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죽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사죄하고 평안을 얻기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나의 문을 조용히 두드리셨듯이 모든 이의 마음의 문 앞에서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 피흘리시던 구멍난 손으로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198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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