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제10장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행
윌리암 윌리암즈
히브리인들에 관한 말씀으로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애정과 빠른 감지(感知)는 늘 동행합니다. 우리가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 그분의 방법들을 배우기가 쉬워졌습니다. 브로크애브뉴 집회소에서의 성경 공부는 우리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대화식의 성경 공부에서 4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잇따라 공부했습니다. 그 공부에는 표든 사람들이 참석하여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임이 주님의 신학교라고 말하는 일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실천되어져야 할 진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배워지며 이것으로부터 경험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 세 가지가 반드시 동행해야 합니다. 세 개의 다리가 있는 의자가 견고히 서려면 세 개의 다리가 다 같은 길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한 개의 다리가 2피이트 이고, 다른 한 개가 1피이트 반, 나머지 한 개가 1피이트라면 의자는 한 쪽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문제들을 급히 해치우려 한다거나 학생을 “졸업시킬” 목적으로 “공부 과정들”을 몇 개월 안으로 때려 넣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과 흡사합니다. “머리로 아는 지식”의 다리가 2피이트이고 “실천”의 다리가 1피이트 반이며 “경험”의 다리가 1피이트라면 바로 그것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교만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훌륭하다는 성경 강사들 중의 일부의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때때로 그들이 전하는 내용이 좋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마음을 휘어잡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주님의 종들에 의해 마음과 경험으로부터 전해지는 능력 있는 말씀이 가져 오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결과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에서 만든 빵과 제과점에서 만든 빵의 차이를 압니다. 하나는 개인경험의 산물로 섞음질(adulteration)이 없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기계의 산물로서 보기에 좋도록 하여 제과점주인의 이익에 기여하는 모든 재료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화요일 밤과 주일 오후에 있는 성경 공부에 가능한 한 빠지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기도 집회도 역시 우리에게는 새로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또 복음 집회도 집회소에서 활발히 열렸으며 날씨가 허락될 때는 옥외에서도 열렸습니다. 저는 어떤 집회에서건 말씀을 전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트래트포드로 간 이래로 저는 공적인 집회에서 말씀을 전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느 주일 저녁에 말씀을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 안에서 잘못 배운 것들은 버려야 하고 새로 배워야 할 것들은 너무 많다는 사실이 저로 하여금 많은 자유를 즐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백성들은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이후에 번번이 복음집회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토요일 밤에 권 스트리트에서 열리는 옥외 집회에 종종 참석 했습니다. 거기에서 현재는 주님 나라로 간 죠오지 왓슨 씨가 젊은이들을 격려하여 그 옥외 집회에서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육중한 시가 전차가 굴러갈 때에는 소음이 너무 커서 듣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사람이 옥외집회에서 은사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을 갖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들을 붙잡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녹이는 전도자(melting preachers)”로 불렸습니다. 그렇게 불렸던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전도자는 어떤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심지어는 개똥지바퀴의 보금자리를 사용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장소에서 몇 피이트 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 한 마리의 말이 급사(急死)하자 그것을 본 연사들 중 적어도 세 명이 그 죽은 말을 주제로 삼아 사람들을 붙잡은 적이 있습니다. 이 옥외 집회에서 우리는 간결하게 말하는 법과 요점을 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느 날 밤 지혜보다 말이 더 많은 형제 하나가 모두 지쳐 버릴 때까지 계속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내 그의 전도가 끝나자 전혀 호전적(好戰的)이 아닌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피로가 더 커지는 법이죠.”
그 다음에 우리는 전도지를 나눠 주는 무리한테로 가서 도와 주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활동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일
번번히 저에게 요청했던 그 형제님은 방문의 은사를 가지고 계셨으며 그분과 함께 앉아 관찰하고 보는 일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큰 광고판이 서 있는 공터를 보면 그분은 “우리 함께 잠깐 기도합시다”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으며 우리는 광고판 뒤로 가 병든 자나 슬픔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훈련은 대부분의 신학교의 교육 과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페어뱅크스에서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영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집회소와 천막으로 그들을 데려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개중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명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전해 주기 위해 저는 때때로
성경 공부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호주머니 속에 늘 휴대하고 다니다가 짬이 나면 그것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주님의 백성들은 대개 이 집회소 또는 저 집회소에서 공휴일을 위한 말씀집회를 마련했으며 말씀 집회가 열리는 도시에 제가 있는 한 저는 모든 집회에다 참석했습니다. 한 때 브로드뷰 집회소에서 한 장로 형제님이 저보고 말씀을 잠깐 전해 보라고 격려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주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해 보려고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 날 오후 첫 시도를 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지가 못했으며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장로 형제님이 저 보고 자기는 제가 나눈 말씀을 즐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가 제 연령 때에 주님의 백성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었더라면 지금쯤 더 유용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젊은 선교사들을 “부풀어 올리는(puffing up, 자만케 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불어 내리는(puffing down)” 위험도 잊고 있습니다. 그 형제님의 격려의 말은 저로 하여금 다시 시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장(章)을 끝맺기 전에 저는 그 당시 캐나다에서나 미국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수양회들 중 가장 큰 수양회였던 토론토 이스터 수양회에 관해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수요일 밤에 센트럴 집회소에서 기도 집회로 시작하여 월요일
우리는 베네주엘라의 여러 수양회에서 이와 같은 원칙들을 아직도 실천하고 있으며, 금년 아로아 수양회에서는 4천끼의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었습니다. 문에다 상자들을 놔 두는 것이나 경비(經費)를 호소하는 것과 같이 현대식의 초라한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의뢰하는 것보다 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없습니다. 수 천 끼의 좋은 식사가 무료로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비가 채워지고도 항상 많은 잔액이 남아 주님의 일에 시간을 드리는 사람들에게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198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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