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눅
열 두살 되던 해에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은 분명 순례자들의 큰 무리와 더불어 여행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절기 기간 동안 같은 또래의 소년들이 함께 어울려 지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다른 소년들과 함께 행렬 어디엔가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룻길을 간 뒤에 비로소 그들은 그가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야 했으며 사흘 후에 거기서 그를 찾았습니다.
여기에는 우리 모두를 위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없으신 데도 우리와 동행 중에 일는 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은 우리 영혼과 구주 사이에 죄가 들어왔는데 스스로 그분과의 사귐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하락은 눈에 보이지 않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냉냉함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전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실상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로 보아 우리가 첫 사랑에서 떠났으며 세상적인 관심사가 영적인 관심사 위에 있음을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애굽의 부추와 양파와 마늘을 식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전에는 인자하고 친절했었는데 비판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우리가 시온의 언어보다 불신 세상의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이 알아채든 못하든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잃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불행하고 비참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비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도를 하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서의 도전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별다른 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예수님이 동행 중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는 어떤 충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어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친구가 다정하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 자신의 하락한 영적인 상태를 지적해 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질병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같은 어떤 비판을 통해서 우리의 잠자는 영혼을 각성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요셉과 마리아처럼 전에 그분을 본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죄로 인해 그분과의 교제가 단절된 그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죄를 자백하고 버림으로써 우리는 용서를 발견하고, 다시금 예수님과 동행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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