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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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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7. 16:34 횃불/1993년

요한계시록 강해(1)

(1 1~10)

-어거스트 반린 -

서언

 

본 강해는 빛과 자유”(Light and Liberty)() 3년 이상 연재된 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계시록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강해들이 씌어졌으므로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이 글도 사용하셔서 그분의 성도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그 믿음과 열정을 고무해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후천년설에서 무천년설에 이르기까지 계시록에 대한 여타 견해들이 있지만 여전히, 이 놀라운 책의 3장 이후에 나오는 사건들을 다니엘의 제 70이레 동안, 즉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본향으로 끌어올리신 후에 이 세상에 임할 환난 기간 동안 행해질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미래적인 관점이 온전한 진리에 가장 근접하는 해석이라고 마음 깊이 확신하게 됩니다. 내가 믿기에 비록 다른 적용들이 제시될 수 있겠으나 이 견해야말로 참된 해석입니다.

그러나 나는 본서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로 근신하고 경성하도록 도전을 주고, 주님께서 우리를 본향에 인도하고자 강림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주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자 하는 일념에서 씌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내용의 독창성에 대한 하등의 주장도 없으며, 어떤 놀랄만한 예언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아는 주님의 백성들이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땅에 얼마나 두려운 심판이 임할 것인지를 깨닫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는데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주님께서 모든 성경의 주제가 되시기에 이 위대한 책의 주제도 되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러한 목적을 이뤄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서론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시록 1:1~7).

 

본 계시록 전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위대한 주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을 나타내는 어떤 상()의 계시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죽으셨으나 이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1:18). 이 땅에서 심히 낮아진 모습으로 계시는 동안 그분은 육신 속에, 비천한 인성 안에 자신의 영광을 감추셨습니다( 10:20). 그러나 이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그분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신성의 모든 충만을 나타내고 계신데 이는 친히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상고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 주제가 전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지금은 영화롭게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점입니다. 반드시 속히 될일을 상고하는 동안 우리의 시선을 그분에게서 떼지 않도록 합시다(1:1).

그분은 자신의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 요한에게 이 계시를 보내고 인치셨습니다. 이 놀라운 계시들은 암시나 상징을 통해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이 계시록 책은 우화적인 형태로 이 놀라운 사건들을 제시하며, 따라서 여기에 밝혀진 대부분 내용들은 문자적이 아닌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물론, 이 중대한 계시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 전체에 대한 열의있고 꾸준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 대한 격려가 주어져 있습니다(1:3).

이 말씀은 필경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이기 위해 주어졌습니다(1:1). 그러므로 요한이 이 메시지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낼 때(1:4) 그것은 당시에 존재하던 에베소 등지의 일곱 교회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수 세기 동안 성경학자들이 이해해온 대로 전 기독교 시대에 걸친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합니다. 이 교회들은 2장과 3장을 상고할 때 살펴보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독교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을 제시해 줍니다.

이 서론 부분에는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하게 숫자 3의 개념이 빈번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이 성경의 마지막 책이 성령의 영감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들의 영광에 대한 계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1) 충성된 증인이요, (2)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요, (3) 땅의 임금들의 머리시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1) 주님의 선지자로서의 지상생애와, (2)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우리의 제사장으로 앉아계신 모습과, (3) 주님의 왕으로서의 미래통치를 보여줌으로써 (1) 과거 (2) 현재 (3) 미래의 세 시제를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1) 우리를 사랑하사 (2)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3)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라는 3의 개념이 또 나오는데, 이것은 (1)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랑(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2)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그 피로 말미암은 그분의 구속과, (3) 그분과 함께 할 우리의 미래의 통치(비록 현재 이 제사장직의 큰 특권을 누리고 있지만)를 보여줍니다.

또 다른 3의 개념이 7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2)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3)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스라엘을 가리키므로 모든 지파-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모든 눈은 예수께서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 그분을 보게 될 온 세상을 가리키며, “그를 찌른 자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특별히 가리킨 말입니다. 요한복음 19:37은 스가랴 12:10의 성취가 아닌데 이는 그 예언이, 이스라엘이 그 찌른 분을 바라볼 때 얼마나 애곡하고 후회할 것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들은 확실히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분의 강림시에 그 찌른 분을 바라볼 때 그 때 그들은 여기 7절의 세번째에 언급된 대로 그들의 죄로 인해 애곡할 것입니다. 스가랴 12:10, 이사야 60:20 61:2과 같은 구절들은 그들이 애곡하고 뉘우치는 중에 전에 멸시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분을 그들의 주님으로 영접할 그 날을 가리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1:8).

 

알파와 오메가”(처음과 끝) 21:6 22:13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그분이 말씀”, 즉 모든 하나님의 생각의 계시자임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문자인 알파와 오메가이며 그로써 그 사이의 모든 문자를 포함하십니다. 알파벳 중 몇개를 조합하면 무한히 많은 생각들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목적, 즉 은혜와 영광의 모든 무한한 자원은 그분 안에서 발견되며 그분에 의해 알려집니다. 그분이 첫번째 화자(話者)이신데 이는 그분이 알파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뒤에는 아무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데 이는 그분이 마지막 문자, 즉 오메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나는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사용합니다. 그분은 말씀(the Word)이시며 지금까지 발해진 모든 말과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생각 위에 뛰어나십니다. 그분은 만물의 계시자이십니다. 아울러 그분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자이신데 이는 그분을 보고 들음으로써 우리는 아버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아(Ah)-알파-이시며, (Oh)-오메가-이십니다. 이 두 낱말은 흔히 놀람과 경이감을 표현하는 감탄사로 사용됩니다. 확실히, 우리는 그분께서 자신의 삶과 죽음 및 영광의 승리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이렇게 탄복해합니다: “! ! 얼마나 놀라운 구주 예수님이신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1:9).

 

기자는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황량한 섬에 갇혀 그의 보배로운 주님에 대한 충성으로 인해 극심한 고난을 받는 중에 이제까지 인간의 눈앞에 펼쳐진 가장 놀라운 일련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 큰 은혜야말로 이 외로이 고난당하는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감화를 주었겠는가! 요한은 그가 이 땅에서 그토록 사랑한 주님을 다시 대했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것입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은 모습이 아니라 높임을 받고 영화롭게 되신 그분을 뵈었을 때! 그분은 그의 눈 앞에 세상을 심판하고 권능으로 다스리시기 위해 곧 오실 분으로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또한 요한이 직접 목격했듯이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런 모습을 뵈옵고 마음에 한없는 기쁨과 감화를 경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그분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그분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현재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동안은, 그분은 자신의 대적이 자신의 발등상이 될 그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5은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내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신 후로 1900년 동안 죄악된 인간의 거역과 완악함을 견디어 오셨으니 이 얼마나 무한한 인내인지요!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오래 참으십니다. 그분은 당황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백성 가운데 임하실 그 영광의 날을 그토록 오래참음 가운데 기다리십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머물며 그분의 고난에 잠시 동참하는 동안 그와같이 오래 기다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1:10).

어떤 이들은 여기에 언급된 주의 날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종종 나오는, 장차 임할 세상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승리의 날을 가리키는 여호와의 날과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문구는 전혀 다르며 신약성경에서는 이곳과, 주의 만찬과 관련된 고린도전서 11:20에서만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쿠리아코스라는 단어로서 교회를 가리키는 스코틀랜드어 커크”(kirk)는 이 단어의 축약형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교회가 주님께 속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교회(the Church)와 관련하여 이 주의”(Lord’s)라는 어구의 사용속에는 다음 두가지 점이 두드러집니다: (1)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에 보내는 일곱 메시지를 통해서 교회의 전체 역사가 요한에게 계시되었다. (2) “주의”(Lord’s)라는 동일한 표현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외적인 의식인,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일과 관련되어 사용되어 있다. 교회와 주의 만찬은 둘 다 주의 날과 직접 관계가 있는데 이는 교회는 바로 그날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으며 주의 만찬 역시 주의 첫 날에 기념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상황과 조화를 이루었는지요!

그가 뒤에서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된 개념들을 부각시키는데 왜냐하면 주의 날에 성도들이 십자가를 뒤돌아보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동안 요한은 뒤에서 나는 음성으로 인해 주위를 둘러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뒤를 돌아보는데서 눈길을 돌려 앞을 바라보도록 부름을 받게 되는데 이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전편에 걸쳐 그는 계속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와 더불어 조만간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찾으실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영안(靈眼)이 밝아져 그분의 영광을 뵈옵고 우리의 마음이 크게 감화를 입을 수 있다면! -다음 호에 계속-

 

(1993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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