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다림질을 했다. 두 아이들을 다 재우고, 여느 저녁 때와 다름없이 책을 읽고 있는 남편 곁에서, 낮에는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기에 할 수 없었던 다림질을 하기 위해 몇가지 옷들을 꺼내어 다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그들 결에 누워 있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한꺼번에 온 몸으로 밀려든다. 그냥 이대로 내쳐 꿈의 나라로 빠져들고 싶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에 그냥 쉴 수 만은 없었다. 전원을 꼽고, 다리미가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림질할 옷들을 살펴보았다. 모두가 남편의 옷이다.
결혼 초에도 이렇듯 남편의 옷가지를 챙기며 오늘처럼 옷들을 다렸었다. 그런데 그 때의 나의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었다. 나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뻤고, 즐거웠고, 또 행복했었다.
왜 날 사랑할까?
재물, 학식, 외모, 가문····?
오늘날의 그 어떤 조건 좋은 신부감이 전혀 아닌데, 누가 보아도 어느 것 하나 사랑 받을 것이 없었다. 게다가 자타가 인정하듯이 난 서른이 넘은 노처녀가 아니었나. 그런 나를 사랑한다며 결혼하여 함께 살자고 그렇게 조르는 그와 나는-나는 그때 인하의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 상대 자로는 안된다고 얼마나 힘주어 열강(?)을 하고 다녔던가! -결혼을 했다. 나의 꿈과 나의 상식과 나의 이론, 그리고 나의 모든 고정관념을 벗고 연하의 상대와 결혼한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행복하고 신나는 일이다. 또 사랑 받고 있음으로 인해 그 사랑에 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더 즐겁고 행복하게 했다. 그를 위한 모든 일들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그 중에서도 남편의 하얀 와이셔츠를 다리면서 나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좋았다. 나의 수고로 그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면 또 기뻤고 즐거웠다. 깨끗이 다려진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의젓하게 섰을 그를 생각하면 멋졌다. 또 멋진 그의 곁에 함께 섰는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나를 복 있는 여자라며 부러워하겠지라고 황홀경에 빠져 자기 도취에 젖어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한지 6년이 지났다.
다른이들이 얘기하는 권태기일까?
며칠간 우리 두 사람 사이엔 긴장감이 있다.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 음식을 해도 땀을 흘려가며 정성껏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은 짰고, 어느 날은 싱거웠다. 아이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해야지 하고 여러 모양으로 신경을 했지만, 어느 날은 소란스럽게 또 어느 날은 어수선하게 하루가 짜증과 신경질 섞인 잔소리로 이어지는 날이 많아졌다. 생각해보니 오늘도 여느 날과 같은 하루였다고 여겨졌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서는 안되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옷을 다렸다.
이 바지와 어느 셔츠가 어울릴까? 몇벌 안되는 옷들을 머리 속으로 맞춰보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싶어졌다. 나의 이런 생각들이 남편의 생각과 일치되어야 될텐데 요즈음은 내 생각과 많이 다르다. 난 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난 그를 기쁘게 해 주기보다 이 무더위에 그를 더 짜증나게 해주고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다림질하는 중에 계속되는 이런 생각들이 나를 더 우울하게 했고, 다리미에서 뿜어대는 열기로 그렇잖아도 후덥지근한 여름 밤은 더욱 후끈거렸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핑 돈다.
그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를 즐겁게 해 주기는커녕, 그를 즐겁게 해 주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편지 초라하고 애처롭게 비쳐져 버렸다.
생각을 떨어버릴 양으로 머리를 흔들며 눈을 떴을 땐, 변함없이 나의 곁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남편이 있었다.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다.
마음을 스스로 가라앉히며 다 다려진 옷들을 챙겨 옷걸이에 걸었다.
“도마도 쥬스 한잔 드실래요?” 물었더니 그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한 여름 밤의 무더위에도 꼼짝않고 책을 읽고 있는 그가 위대해 보이기도 했지만, 무심해 보이기도 했다. 말랑말랑하게 잘 익은 도마도 몇개로 쥬스를 두 잔 만들어 그이 앞에 놓으며, 지금 다림질을 하면서 느낀 나의 기분을 푸념을 하듯 얘기했다.
“····전에는 당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그냥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느낌으로 만도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왜 애써 당신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데도 행복한 느낌은커녕 씁쓰레한 마음만이 가득하죠?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다시금 뜨거워졌지만, 애써 감추면서 얘기하고 있는 내 기분과는 아랑곳 없이, 그이는 안경너머로 두 눈을 껌뻑이며 “응, 당신 그 내용을 글로 쓰면 참 좋겠는 걸. 아주 멋진 작품이 나오겠는 걸!” 하는 것이었다. 그이에겐 요즈음 좋은 글, 좋은 잡지, 좋은 책, 좋은 출판사. 이런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동문서답을 하는 것이었을까? 나는 말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잠자리에 누우며,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이는 나를 꼭 끌어 안았다.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복잡하게 변하고 있는 것은 나의 마음
순간 매일의 일과 속에서 짜증나고 귀찮고 별 하찮은 얘기들을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그리고 진지하게 들어주며 대꾸해 주는 곁에 있는 나의 남편이 얼마나 멋지고 듬직해 보였든지!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입에 달았구나”(아가서
(1993년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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