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A. 바네스
우리가 보았듯이 칼빈주의의 가르침 중 일부와 더불어 특히 무조건적인 택함과 성도들의 보존에 대해 매우 만족할 수 있다 - 적어도 적절하게 정의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점들 특히 제한된 속죄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점에 분명히 해왔다. 물론, 우리가 말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거의 두 세기 동안 주님의 백성들 모임들에서 일반적으로 합의된 관점이었다(C.H. 매킨토시의 일방적 신학에 관한 글, www.stempublishing.com 과 F.B. 홀의 주권과 책임 www.biblecentre.org에서 참조). 그러나, 우리가 이 시리즈를 마무리 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추가 사항이 있다.
“균형 잡힌 관점”의 간단한 예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두 위대한 설교자, D.L. 무디와 C.H. 스펄젼은 칼빈주의에 대해 아주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무디는 반 칼빈주의였고, 스펄젼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국 칼빈주의자”로 불렸다(F.F. 브루스, 질문에 대한 답변, 주기도문 출판 엑세터, 1972). 이러한 이분법을 감안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행복하게 공존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주 인용하는 단순하지만 유용한 예들을 우리에게 제공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무디는 이 점을 설명하면서 “아름다운 저택에서 문 현관 위 쪽에 ‘누구든지 오고자 하는 사람은 올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그 안으로 들어간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들어오라’ 당신은 안으로 들어간다. 당신을 둘러보며 살핀다. 안쪽 문 위에는 ‘세상이 있기 이전에 그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문구가 있다.”(무디는 “택함 받은 자는 원하는 자들이고 선택받지 못함은 원하지 않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은혜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가 1858년 8월 1일 일요일 아침에 런던, 왕실 서리 정원, 음악 홀에서 최초로 말해졌다, 스펄젼이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는 것과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두 가지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진리가 인간의 어떤 모루에도 하나로 결합될 수 없다고 믿으며 그들은 영원토록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들은 너무나 평행하는 두 선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장 멀리 쫓는 마음은 결코 그것들이 집중한다는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모여들며, 모든 진리가 솟아나는 하나님의 왕좌 가까운 영원의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 둘을 조화시키라고 요청한다. 나는 대답하건대 그들은 어떤 화해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자신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나는 결코 불일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둘 다 사실이다. 어떤 두 가지 진리도 서로 모순될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둘을 모두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가?
칼빈주의자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책임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얼핏 보면 두 구절이 이 견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딘 알포드를 비롯하여 F.F. 브루스, A.T. 로버슨, W.E.바인, C.I. 스코필드, 케네스 S. 웨스트, 마빈 R. 빈센트 등 신약 헬라어 전문가들은 엡 2:8-10에 헬라어의 구조가 믿음이 말하는 선물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말은 다뤄지는 전체의 주제, 즉 믿음으로 말미암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지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둘째, 베드로는 “우리와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벧후 1:1)라고 썼다. 다시 한번 믿음이 선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윌리엄 켈리는 이 서신에 대한(Stempublishing.com) 자신의 주석에서 여기에 믿음은 “믿어진 것”, 즉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보이는 믿음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당신이 구원받을 것이다”(행 16:31)라는 명령이다.
결론
우리는 다시 한번 윌리엄 켈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호세아 대언자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의 경향은 알미니안파 또는 칼빈주의자 중 하나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으로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균형을 유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에게는 너무 어려운 것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둘 중 어느 것으로부터 확실한 방부제이다. 나는 완벽하게 설득된다 … 알미니안주의나 칼빈주의는 성경에 없으며, 그들은 심지어 최소한의 의도 없이 철저하게 양쪽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어느 쪽을 택하려는 경향은 새로워지지 않은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즉 같은 사람이 한 때는 알미니안주의자일 수 있고 다른 때는 칼빈주의자일 수 있으며, 그가 어느 날 극단적인 알미니안주의자일 수 있으며 내일은 그가 극단적인 칼빈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모두의 뿌리는 사람과 사람의 일방적인 면에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성령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그분의 말씀 안에 있으며 그 밖의 다른 어디에도 있지 않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둘 다 잘못되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보다 이성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사람의 책임을 강탈하지 말고, 또한 알미니안주의자들과 함께 서서 그분의 주권을 강탈하지 말자.
우리는 이 연재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C.F. 호그의 지혜로운 말을 인용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은 작은 위로가 아니다 …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하나님께 복종한 사람의 의지는 또한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언젠가 … 우리는 사람의 삶에서 이 두 가지 요소가 그리스도안에서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 한편, 화평과 효과적인 섬김의 비결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주저하지 않고 슬기롭게 전파하는 것이다.”(성경은 무엇인가? 피커링과 잉글리스, 런던,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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