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무라 타다시 - 6
어제 이어서 고린도서 13:7절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절을 보기 전에 앞부분을 조금 복습을 하겠습니다.
4절에 나와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받아들이는 것과 베푸는 것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대인 관계이기 때문에 가장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절에 나오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즉 온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는 것, 자랑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 대한 태도라고 보여집니다. 이 세 가지는 겸손에 대한 것을 생각한다고 생각합니다.
5절에 나오는 다섯 번째 이유는 다른 사람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절에 두 가지는 두 가지 전체가 다 진리에 대한 행위인 것을 말합니다.
7절에 나오는 오늘 다루고자 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동정을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각각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사랑이 표출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여기에 믿음, 사랑, 소망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역사 일을 말합니다. 믿음에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수고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소망은 인내하게 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님들은 바울로 말미암아 사랑에 대해서 칭찬을 듣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9-10절을 보면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이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에 있는 믿는 분들은 사랑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행하고 더 많이 하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모임은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마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사랑이 풍부했습니다. 박해가 있고 형제자매들이 다 같이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끼리 교제가 깊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는 쓸 것이 없다고 했지만 더 많이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7절로 돌아가서 4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는 말씀드린 대로 동정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박해를 받는 가운데 피차 간에 서로 동정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7절에 네 가지를 차례대로 하나씩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달리 다른 해석으로서는 그것을 덮으며라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는다는 말은 그 드러난 것들에 대해서 덮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은 많은 죄를 덮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아마 베드로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다마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이 베드로를 위해서 그가 부인하기 전에 미리 예수님은 믿음이 없어지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회복이 됩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허물이 덮어졌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구약 성경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9:20-29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오십 세에 죽었더라”
이 기록을 보면 홍수 이후에 노아의 삶에서 실패한 것이 드러나 있습니다. 농업을 시작해서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버렸습니다.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 함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형제에게 그 아버지가 벗은 것을 고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그 몸을 덮으려고 했습니다. 두 형제가 옷을 걸치고 뒷걸음질 쳐서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이 두 형제는 아버지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함은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두 형제에게 고했습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이 벌거벗은 하체를 덮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인 실패를 수치를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두 형제 셈과 야벳은 사랑의 옷으로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함 같은 행위를 저지릅니다. 어떤 사람의 실패 결정, 잘못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합니다. 언젠가는 그 이야기가 당사자의 귀에 들어갑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참는다는 말은 그런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 그 이야기가 들어오면 자기 선에서 그것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셈과 야벳은 자기에게 차례가 왔을 때 거기서 멈추게 했습니다.
고전 13:7절에서 “모든 것을 참으며”라는 의미가 “모든 것을 덮으며”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의미와 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잠시 하나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지도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송사하려고 여인을 데려갔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 여인을 세웠습니다. 즉 청중 앞에 이 여인을 세웠기 때문에 여러분 이 여인을 봐주십시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행위였던 걸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7절에 있는 것처럼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한 말씀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여기에 남아 있던 사람은 이 여인과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고소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한마디가 이 사람들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으로 이 여인의 허물을 덮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정말로 회개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많은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고린도전서 13:7절에 나오는 “모든 것을 믿으며”라는 항목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많은 기본적인 전제는 동정이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마는 상대방에 대한, 앞으로의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말씀에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에 있는 그대로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문제가 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그렇게 믿어주는 것입니다. 협력해서 선을 이룰 것이라고 믿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믿어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슬하에서 떠나갔던 탕자에 관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방탕할지 모르지만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은 믿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만나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즉 이방인의 사도로 예수님이 바울을 부른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서 일할 것이라고 주님이 믿어주시면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는 “모든 것을 바라며”라는 것입니다. 일본어 다른 번역에는 “모든 것을 기대하며”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을 신뢰할 뿐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간음 중에 잡힌 여인도 그랬습니다. 앞으로 회개해서 잘될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이 여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성경에 안 나오지만은 분명히 주님이 기대하신 대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기 전에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수님이 신뢰하고 믿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역시 베드로가 나옵니다. 세 번이나 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예수님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예수님이 사랑하느냐는 사랑과 베드로가 사랑한다는 사랑을 원어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느냐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을 말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사랑은 형제 사랑(필레오)이라고 하는 그리스를 썼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무한의 사랑을 베드로 스스로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고받는 말이 동일하게 세 번 반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내 양을 먹이리라고 마지막 세 번째 말씀하셨습니다. 16절에서도 내 양을 치라 말씀하셨습니다. 17절로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머지않아 베드로는 이와 같이 양을 치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5:2-3절을 보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예수님으로부터 베드로는 내양을 치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장로 중에 한 사람으로서 다른 장로들에게 양을 칠 것을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을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더러운 일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라.”
예수님이 기대한 대로 베드로가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기대하면서 본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어떤 행위를 수반하는지를 지금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15가지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15가지는 전부 다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일들을 실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15번째 항목인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항목입니다.
일본어 성경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 서 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해놓았습니다. 다른 말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전쟁 중에 자기 진지에서 자기 위치를 그대로 지킨다는 의미로 모든 것을 견딘다는 뜻입니다. 지금 현재 나에게 주어진 그 위치를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이죠. 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하는 그 일을 그만두신 적이 없습니다. 사랑에서 꼼짝하지 않고 그 사랑이라는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한번 되돌아보면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복음을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낳게 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계속 전하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들에게 그 사랑을 분명히 나타내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은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양손, 양발의 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와 같이 네 가지를 보았습니다. 7절에 나오는 사랑의 4가지 항목, 마지막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들의 죄를 가리워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최선을 믿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기대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계속 머물러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 놀라운 예수님을 우리는 더 알고 싶은 겁니다.
에베소서 3:17-19절을 보면
“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13장에서 사랑을 말했습니다만, 에베소서 3:17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해달라”고 바울은 기도합니다.
19절에서는 그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사랑은 지식의 넘치는 우리의 생각하는 것에 넘치는 그러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넘치게 되기를 바울은 기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3장에는 15가지 사랑에 관한 항목이 개설되어 있습니다마는 15가지만 아니고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른 것을 마지막으로 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대인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사랑을 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분이며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인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가 있을 터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아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등장합니다. 병 나은 병자도 등장, 예수님을 대적하는 데도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것이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소유자는 하나님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 사람의 소유주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43:4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사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야곱에 대한 것입니다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점에서도 하나님이 보시는 방법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통한 사람을 보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14:15절에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여기는 형제자매님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특히 형제 자매님들은 다른 사람도 그렇습니다마는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대상입니다. 저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동일하게 홍 형제도 그렇고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도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의 가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실 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보든지, 또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든지,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든지 간에 사람의 가치를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이와 같이 우리들을 이렇게 인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의 성질이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서는 바로 이러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모임에 있는 형제자매님들 들을 생각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신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모임에 더하게 해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성원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가 그 모임을 택해서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형제님이나 저 형제님이나 강서모임에 속한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볼 수 있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의 15가지 항목의 사랑을 우리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때 이것들이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읽은 것과는 반대로 고전 13장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는 겁니다.
나는 사랑이 없으므로 오래 참지 못합니다.
나는 사랑이 없으므로 온유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이 없으므로 질투합니다. 나는 자랑합니다.
나는 교만하고 싶습니다. 나는 사랑이 없으므로 무례히 행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유익을 구하겠습니다.
나는 초조해하고 성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악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생각을 하겠습니다.
불의를 기뻐하겠습니다. 진리를 기뻐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을 참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을 못 믿겠습니다.
모든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지 않겠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어 있다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알림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그 반대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세상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또한 한편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도님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닮으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이러한 목표가 빠른 시간 내에 성취가 되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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