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ucifixion & The Veil 고든 윌리암스 | |
Is there a contradiction between John’s timing of the crucifixion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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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힌 요한복음의 시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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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rites, “It was the preparation of the Passover and about the sixth hour.” Mark records, “it was the third hour, and they crucified him.”
A number of solutions have been suggested to explain the difference:
1. John is writing of the Jewish day of preparation which began at the previous sunset. He is referring to the sixth hour of the night or midnight when the Lord stood in judgment before the priests. This hardly seems plausible in light of the context.
2. Many scholars believe the explanation lies with the Greek texts. In many ancient languages letters had numerical values, so a writer, instead of writing the words “third” or “sixth,” would use the third or sixth letter of the alphabet. As manuscripts are copied an interchange of two similar letters is possible. There are also some manuscripts of John 19 which have tritos (third) instead of hekton (sixth). While there is some merit in this explanation, the majority of manuscripts show the reading as the sixth h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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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그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여섯 시쯤이더라”라고 기록했고, 마가는 “때가 세 시가 되매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로 기록했다. 해석에 관한 숫자는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 1. 요한은 일몰 이전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시작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주님께서 제사장 앞에 심문받기 위해 서 있을 때 밤이나 한밤중의 여섯째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문맥에 비추어 거의 그럴듯하게 보인다. 2. 많은 학자들이 헬라어가 가진 의미의 거짓말들을 믿는다. 많은 고대 언어 문자들에는 숫자적인 값들을 가졌다, 그래서 기록자들은 “셋째” 또는 “여섯째” 단어들을 쓰는 대신에 알파벳의 세 번째 또는 여섯 번째 문자를 사용할 것이다. 사본들이 복사되는 것에 따라 2개의 유사한 문자들의 교체가 가능하다. 또한 요한복음 19장의 일부 사본들이 e{kto"(헥토스, 여섯 번째) 대신 trivto"(트리토스, 세 번째)를 취하고 있다. 동시에 이 설명으로 일부 장점이 있으며, 사본들의 대부분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나타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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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While the day was divided into 12 hours, the ancients also divided the night and day into watches of three hours each. In Matth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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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날이 12시간으로 나누어지는 동시에, 고대에도 또한 각각의 세 시간으로 낮과 밤을 나누었다. 마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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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n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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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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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notice that Matthew and Mark tell us that the veil was rent after the Lord dismissed His spirit; but Luke tells us that the veil was rent before He dismissed His spirit. Why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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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와 마가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이 떠나셨던 후에 휘장이 찢어졌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휘장이 그분의 영이 떠나시기 전에 찢어졌던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왜 차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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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spels in their fourfold view of the life of the Lord Jesus, generally run sequentially; but there are occasions where the chronological order is not followed. Matthew, writing of the temptation, gives the order as the bread, the temple, and the kingdoms, Mark mentions the temptation, but omits the details; Luke gives the order as the bread, the kingdoms, and the temple. John makes no reference to the temptation. Matthew, the gospel of the King puts the kingdoms last, but Luke, the Gospel of the perfect man shows the sinless servant Who would “not tempt the Lord thy God.” Matthew gives the dispensational order and Luke gives the moral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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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님의 삶에 관해 사중으로 보이는 복음서들은 일반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연대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마태복음이 광야의 시험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빵, 성전과 왕국의 순서를 제시하고, 마가복음은 광야의 시험을 언급하지만, 세부 사항을 생략하고; 누가복음은 빵, 왕국 성전, 등의 순서를 제시한다. 요한복음은 광야의 시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왕에 관한 복음 마태복음은 왕국을 마지막에 두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완전한 사람에 관한 복음으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 것을 죄 없는 종되신 그분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은 분배적인 순서를 제시하고 누가복음은 도덕적 순서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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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principles should be considered in dealing with apparent discrepancies. First – Are the events the same? To confuse similar events is to introduce difficulties. However, there could be only one rending of the veil on the day of the crucifix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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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원칙은 명백한 불일치를 가지고 다룸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 사건들은 동일한가? 유사한 사건들을 혼동하는 것은 어려움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의 날에 휘장 중 하나만 찢어졌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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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 Does the context imply a strict sequence of events? In Matthew 27:50, 51, we read “Jesus when He had cried again with a loud voice, yielded up the ghost and behold the veil of the temple was rent in twain.” The words “and behold” are also translated “and lo,” “and suddenly,” “and instantly,” so it seems certain that the rending of the veil follows the loud cry of the Lord Jesus. However, Luke does not use these words of seq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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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 문맥이 사건들의 세밀한 연속을 의미하는가? 마태복음 27:50, 51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를 읽는다. 단어들 “이에 보라”는 또한 “보라”, “갑자기”, “즉시”로 번역되었으며, 그래서 휘장의 찢어짐은 주 예수님의 큰 외침을 따르는 것이 확실함을 보인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연속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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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d – Where sequence is not explicitly seen, has the writer changed the order for a thematic purpose? Many of the verses in this section of Luke 23 are connected events joined by the little word “and.” This does not necessarily imply chronological order. Verse 47: “Now when the centurion saw,” obviously points to a moment of time. Matthew gives us the sequence and links the rending of the veil with the loud cry, while Luke connects the rending of the veil with the dark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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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 연속으로 명백하게 볼 수 없는 경우, 저자가 주제의 목적을 위해 순서를 변경했는가? 누가복음 23장의 이 항목에 있는 구절의 대부분은 작은 단어 “그리고”로 결합된 사건들을 연결했다. 이것은 반드시 시간적인 순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47절은 “이제 백부장이 일어난 일을 보고,” 분명하게 시간의 순간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은 큰 외침과 함께 휘장의 찢어짐을 연속적으로 연결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며, 동시에 누가복음은 어둠과 함께 휘장의 찢어짐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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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ud cry indicates the finished work of the cross; the rent veil, while obviously connected with the finished work, has other implications. The veil of the tabernacle and temple were a dividing line between the inside and the outside, between the place of God and the place of man. Sin put man “outside” the garden; sin brought spiritual death and spiritual darkness. 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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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외침은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을 나타낸다; 찢어진 휘장은 분명히 완성된 사역에 연결됨과 동시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막과 성전의 휘장은 하나님의 자리와 사람의 자리 사이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분하는 선이었다. 죄는 에덴동산 “외부”에 사람을 두었다; 죄는 영적 죽음과 영적인 어둠을 가져왔다. 갈보리에서 태양의 빛이 끊어졌고 세상은 어둠 속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스도 세상의 빛은 죽음의 어둠 속으로 들어 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휘장이 찢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일반 가르침에서 그 휘장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일 것이다. 규정은 사람이 죽음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어둠에서 빛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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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enturion at the cross could not have known of the rent veil but he heard the loud cry.
The priest at the golden altar could not have heard the cry but may have known of the rent veil.
Matthew, the Gospel of the King relates the centurion’s words, “Truly this was the Son of God.”
Luke, the Gospel of the Sinless One relates the centurion’s words, “Truly this was a righteous man.” Both statements are true, both were said, both are recorded, but not by the same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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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백부장은 휘장의 찢어짐을 알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는 큰 소리로 외침을 들었다.
금제단에서 제사장은 외침을 듣지 못했지만, 휘장의 찢어짐을 알았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 왕의 복음은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백부장의 말과 관련시킨다
누가복음, 죄 없으신 분의 복음은 “진실로 이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백부장의 말과 관련시킨다. 두 문장은 정확하다, 모두 말했고, 모두 기록되어 있지만,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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