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교회에서 사용되는 은사
이번 시간에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때 사용되는 은사에 대해서 인도함을 받겠습니다. 은사가 앞 시간에서 언급되었던 복음과 연관된다는 측면을 강조드리고 인도 받겠습니다. 복음과 연관된다는 측면에서 조금 전에 알렉스 윌슨 형제님이 후반 부분에 강조한 말씀은 우리가 만찬에 대해서 너무 친숙하다 보면 주님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해서도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과 구원에 관심을 갖기 보다 내가 깨달은 복음에 대해서 고집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만약에 이 점을 회복하게 되면 그 다음에 주님의 마음을 확보하는데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에서 출발하겠습니다.
요한복음
그래서 39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기독교 영역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종교인들입니다. 종교와 믿음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니 종교는 불교처럼 기독교 아닌 다른 사람들만이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모형을 가지고 성경을 갖고 있어도, 영생에 관한 강론이 강대상에서 나와도, 예수 그리스도를 확보하지 못하면 종교입니다. 윌슨 형제님이 후반부에 강조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만찬이 행해져도 만찬에서 주님이 확보되지 않으면 종교입니다. 만찬도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만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임 형제들이 왜 복음에 대해서, 교회진리에 대해서 희미해지고 약해지는 것은 이 주님의 주권을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왜 복음답지 못합니까? 구원을 받았으면 왜 그 사람의 사고가 복음으로 지배되지 않습니까? 왜 진화론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 문화를 이기지 못합니까? 왜 취직에 대해서 이기지 못합니까? 왜 주님 아닌 것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주님 이외의 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기록한 것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말씀으로부터 지배를 당하는 것이 지킨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리니” 그 지키는 것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킨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 자체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교회진리가 나와도 지역모임이 지역 모임으로 자라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진리가 처음 선포가 될 때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기도할 때는 자주 말하면서도 실제로 행할 때는 반대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 이러한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놓고 대화를 나누는데 우리들만의 대화입니다. 사실은 하늘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말하는 순간에도 그 사실에 내 마음 속에 또 내 전 인격에 현실로 와 닿아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형식적으로 복음을 말하지만 또는 모임의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주님의 주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거절한 다음에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있어도 AD 70년에 망했습니다. 주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 관한 논리를 아무리 말해도 주님을 확보하지 않으면 힘을 잃습니다. 스스로 전해보고 스스로 생활 해보면 압니다. 스스로 조용히 기도해 보아도 알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 속에 주님의 복음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벌거숭이 임금님 동화에 대해서 알 것입니다. 그 동화에서 어떤 거짓말쟁이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자기가 짠 베가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서 임금이 자기가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아름답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복음과 교회진리를 대할 때 이런 자세가 되면 정말로 위험한 것입니다.
만찬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자기 속에는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 주님을 놀랍도록 입술로 고백을 해도 그 사실이 자기에게는 현실로 와 닿지 않는 비참한 상황, 이 상황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것입니다. 윌슨 형제님이 고린도전서 11장을 오늘 잘 설명해 주셨으며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가르침을 내기 전에 한가지 먼저 한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그러나 믿음은 십자가 이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 점이 약하기 때문에 고린도 성도들은 지역교회 증거에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드리지만 복음과 구원을 생각할 때 구원 자체도 중요하지만 구원자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확보될 때 비로소 그 성도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십자가를 마지막으로 생각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데려다가 못을 박았습니까? 예수님을 끝내려고 데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없애려고 데려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보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한 것입니다. 어느 모 종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자기가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까지만 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 주님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활에 대해서 이 세상 지혜는 결코 반응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법률문제를 다루다가 관련이 되어서 제가 아는 한 세계에 있는 여러 헌법들을 조사해본 적이 있습니다. 모든 나라들은 헌법이라는 법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만든 영역들을 자기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에게 법적인 권리를 부여하는 헌법을 가진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처럼 이 세상은 죽음까지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는 다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들에게 법률적인 지위나 권리를 부여하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백성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성도들의 머리 속에 이 생각이 없는 가운데 이 세상 법체계 개념으로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전체 문제를 바울이 다룰 때 1:18절부터 시작하는 것은 대단한 의미인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스스로도 모임에 속한 성도들도 교회교회진리를 다룰 때 먼저 복음의 문제를 한 번 다루어서 내가 과연 유대인처럼 기록된 말씀을 갖고 있으면서도 살아계신 주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이 됩니다. 모임하고 비슷해도 사실은 종교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을, 구원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앞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한 번 점검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으며 그렇게 하면 성도들의 마음에 생기가 돌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이 주님의 주권으로 말미암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성도들은 사도행전이 말하는 구도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구도는 두 가지 라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1장에서 승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교리가 아니고 현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들은 하나님 보좌 우편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는 종교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복음을 통해서 이것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에게 하나님 보좌 우편이 현실이라면 그 성도는 지금부터 힘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어떠한 도전도 그 성도를 꺾지 못할 것입니다.
이 복음이 확인 되었다면 왜 우리가 교회진리를 밝혀야 되는가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사실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 몸을 주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약 115번 정도 나옵니다. 헬라어에도 동일하게 나오는데 3,4회 정도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닌 교회라는 단어가 몇 군데 나오는데 이것을 빼면 111이나 112번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계시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더 이상 뺄 수도 더할 수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우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교회는 말씀 안에서 분별해서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사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교회가 계시되었습니다. 나머지 복음서에는 교회라는 말이 없습니다. 왜 마태복음에만 교회를 말한 것입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1장에서 예수님이 출생에 대해서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28장 마지막 절에도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임마누엘의 복음입니다. 즉 1장에도, 28장에도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에 16,18장에 교회가 계시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경 전체에서 보면 115번 중에 교회가 아닌 것을 빼고는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국에는 둘러보면 건물에다가 교회라는 말을 붙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하기가 참 쉽습니다. 제가 모임 앞에 서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건물을 가리키며 교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때로는 30분정도씩 설명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교회 개념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건물에다가 교회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건물이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교회가 건물로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과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를 두 가지로만 말합니다. 하나는 이 땅에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없는 의미를 가진 개념의 교회가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사도행전 2장부터 시작해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사이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일컬어서 부르는 교회는 이 땅에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습니다. 이 교회를 우리 성경은 몸인 교회 즉 몸된 교회로 해석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항상 개수가 하나뿐인 단수로 표현됩니다. 이 교회는 이 땅에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없기 때문에 떡을 뗄 수 없습니다. 이 교회는 한 자리에 모여서 사람의 관리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로가 없습니다. 이것을 몸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비해서 성경에서 실제로 교회를 언급한 최후의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일곱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주님께서 이 일곱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한 자리에 모일 수 없는 교회가 아니며,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항상 온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이것과 더불어서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교회는 한 지역, 즉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시간대에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이는 무리입니다. 이것에 대한 성경에서는 용어가 안 나오지만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지역이기 때문에 지역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까지 마태복음
은사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원리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을 주님이 명하실 때 복음과 더불어 침례를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형제님이 물었습니다. ‘왜 주님이 복음을 명령할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했는가?’였습니다. 매키온 형제님의 설명으로 ‘어떤 영혼이 구원받는데는 삼위가 역사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때는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역사했습니다. 구원을 생각할 때 구원자를 잊지 말아야 할 것과 나를 구원할 때 역사하신 삼위의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말할 때 반드시 삼위를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가 공통으로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금방 구원 받을 때 모를 수 있습니다. 구원을 가르침 받을 때 인식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장의 큰 밑바탕이 됩니다. 이것을 가르침 받지 못하면 아마 구원에 대한 폭이 좁아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역교회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림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이 개입되는 순간에 교회에 대한 증거는 끝나는 것입니다. 육이 개입되고 사람이 개입되는 순간에 지역교회 증거는 끝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사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생각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아닌 것을 도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겠습니까? 지역교회 증거를 망치고 싶으면 말씀이 아닌 것을 도입하십시오. 주님을 정말 나의 주님으로 사랑한다면 절대로 도입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아닌 것을 도입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말씀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지역교회에서 성장하는 가운데 말씀을 모르는 모임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역교회간의 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지역교회도 은사를 다 가지고 있는 모임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낮추어서 물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지역교회가 결정해 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말씀이 나가면 그 지역교회가 분별해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보여준 것이 이것인데 주님 결정하겠습니다 하며 결정하는 것에 대해 주님의 은혜에 맡기는 태도가 있으면 위험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왜 은사가 필요한지 아시겠죠?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활용하지 않으면 지역교회 증거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상적인 가르침을 받아도 실행될 수가 없습니다. 은사는 절대적인 것이며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이 땅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싶으면 반드시 주님께로부터 능력을 경험해야 됩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이 세상 지혜는 주님의 십자가 이후를 거절합니다. 제가 있는 직장의 기관에서도 소위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중에 부활을 말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부다 십자가 이전까지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학교 사업에 적용시키거나 도덕에 적용시키거나 사회적 선에 적용시키거나 인도적인 흐름인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증거하는 주님은 우선 복음을 증거하는 단계에서 승천하신 주님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옆에 계신 것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도 그것에 어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이 나에게 현실이 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실 때 선물을 가져 오셨습니다. 은사를 다루는 곳은 성경에서 세 곳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지역교회에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은사를 우선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에서도 우리가 이해를 했듯이 구원자체보다도 구원자가 중요할 때 구원이 정말 구원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구원이 내가 이해하는 구원으로 폭이 좁아지거나 의미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선 구원이 구원답게 회복되는 길은 구원자에게 관심을 갖고 구원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를 구원한 자를 사랑하게 되면 구원에 관한 의미가 구원자 그분의 목적대로 이해하는데 길이 열릴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구원이라는 영생을 경험하는 것은 요한복음 17장에 주님이 기도하실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독생자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 주님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폭이 넓은 것입니다. 만약 이런 폭을 성도들이 갖게 되면 당연히 겸손할 것입니다. 당연히 무릎을 꿇는 횟수가 많아질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을 사랑할 것이며 죄를 키우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키우지 않는다는 말을 쓴 것은 우리는 구원을 받아도 우리 속에는 죄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은사를 언급한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말한 다음에
그러면 앞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죄의 크기를 알아야 하는 것 때문에 죄에 관한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하와에게 아담을 통해서 축복을 나누도록 하셨는데 하와가 혼자 있을 때 뱀이 접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유혹할 때 주의할 점은 사단은 아무리 간악해도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지금 세대가 위험한 세대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단이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하와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남편에게 들은 말씀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뱀이 유혹하기를 ‘네가 선악과 열매를 먹는 날에는 하나님 같이 된다’고 뱀이 말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이지만 원어 성경에는 하나님들(신들)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게 자기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 속에서 움직일 때 어디까지를 요구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 되기를 원하는 것이며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개인의 죄가 드러날 때 밖으로 보이는 죄는 극히 일부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가정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도 평화가 깨졌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최초의 살인은 타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형이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왜 가인의 가정에 평화가 깨졌습니까? 뱀이 말한대로 그 가정에는 하나님이 둘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와고 하나는 아담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가정은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솔직하게 다 위선입니다. 성도들 가정도 다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말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정도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야 만족하느냐 하면 하나님 자리에 가야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가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영원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원히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에는 있겠습니까? 아무리 민주주의가 되어도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제도인데 국민이 어디까지 주인이 되기를 원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죄에 따라 이해하면 국민들은 자기를 하나님 대우 안 해주면 아무리 복지를 펼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상입니다. 성도들은 여기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 자리를 노리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자리를 누구에게 내어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에게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의 고백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도마의 고백 속에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하나님 자리를 노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우리는 그 의미를 모른 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고백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정말로 내어드리는 자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죄의 본질이며 나머지는 모두가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참된 죄의 본질은 자기가 하나님 자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모임 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저항도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하나님 자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단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들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추구하던 추구를 포기한 것이며 하나님께 굴복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마의 고백인 것입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그러면 은사가 언급되었는데 은사의 개수가 전체 몇 개인고 하면 에베소서에 5개, 로마서 12장에 8개, 고린도전서 12장에 세가지 목록에서 중복된 것을 빼면 14개입니다. 총 합쳐서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20개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총 개수인데 문제는 이것을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만 중요한 것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고린도 성도들이 잘못한 것은 은사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전 시간에 윌슨 형제님이 주님의 주권문제를 다루고, 주님의 머리되심을 다루셨습니다. 정말로 합당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이런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은사를 통해 유익을 얻는 사람이 놓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은사 자체에 그만 휘둘린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임 이야기를 들으니까 자기가 은사를 받았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행동과 태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태도가 나오겠습니까? 복음과 원리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교만해지는 것은 구원자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자를 생각하면 절대로 구원을 가지고 교만에다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식구들이 구원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구원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주님이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0.001%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가 복음 전하러 가서 구원시켰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전도자에게 복음 전하라고 하셨지 구원시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 구원시키는 자가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교만해지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자를 놓치기 때문이며 구원받은 사람도 놓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놓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가 점점 교만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원리로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교만해지는 이유는 은사를 생각할 때 은사를 주신 분보다 은사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 탓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바울 스스로는 늘 겸손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은사와 관련되는 항목을 세 개를 개설하고 하나는 성령이 주신 은사를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했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언급했습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은사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은사 자체를 가지고 시기하거나 시비 걸거나 휘둘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봐야 하는고 하면 은사를 주신 분을 생각하고 보라는 것입니다. 한 지역교회에서 은사가 잘못 사용되는 것은 대부분 분쟁이 생기는 원인을 보면 은사를 가진 사람이 많이 일으키는 문제입니다.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은사 자체를 가지고 논하는 것, 자기가 복음전하는 은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 만약 이 사람에게 참으로 은사가 있다면 은사를 주신 분에게 고개를 숙이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그분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이 임재하는 지역은 구약에서는 모두 거룩했습니다. 모세가 가시떨기에서 음성을 들었습니다. 형체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제일 먼저 들은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야 모세야 신발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고 했습니다. 가시떨기가 어찌 거룩합니까? 주님의 임재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속에 동일한 성령이 임재했습니다. 가시떨기에는 임재했다가 떠났지만 성도들에게는 한번 임재하고 난 이후에는 영원히 떠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성도들에게 임재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영원히 임재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만큼 완벽한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다른 것이 아닌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형제님이 잘 설명해 주신 것처럼 주님은 놀랍게도 주님이 만드신 그 어떤 것을 주시지 않고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저도 이 표현을 생각할 때마다 말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친히 창조하신 어떤 물건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 삼위가 하나님의 교회를 증거하기 위해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은사를 주신 것이지요.
그러면 이 은사를 생각하거나 이 은사를 받을 때에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은사를 받는 사람이나 무엇을 생각해야 되는지 자명해지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점이 문제였습니다. 은사를 은사 주신 자보다 우선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은사를 언급할 때에 성령님이 예수님의 승천을 언급했습니다. 은사를 언급하는데 승천을 언급한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은사를 사용할 때는 이 땅의 현상을 보고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분에 의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임 내에서는 절대로 육신적인 요구나 육신적인 다툼이나 고린도에서처럼 분열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분열이 생기는 것은 은사가 없어서가 아니고 은사에 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은사보다도 은사를 주신 분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처음에는 하나님께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율법 전체를 마무리 할 때 주님께서는 첫번째는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번째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지역모임 내에서 이 계명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으로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은 15개의 사랑은 한번도 사람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 아가페 사랑으로 15번 사용했습니다. 사람으로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모임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그러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포함될 수도 있지만 본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에 은사를 말한 다음에 14장에 은사의 활용을 말하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들어가므로 성도에 관한 사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구원은 구원자체보다도 구원하신 분이 중요하듯이 은사도 은사 자체보다도 은사를 주신 분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이나 은사를 통해 유익을 받는 사람이나. 그러면 그 사람 개인의 마음이나 생활에서도 주님이 높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주님이 높아질 것입니다. 나머지 구체적인 것들은 주님께서 언젠가 기회를 주셔서 성도들 각자, 그리고 모임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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