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침례)
세례라는 용어는 아시는 것처럼 원어에서는 침례인데 그 침례가 밥티조라고 발음이 되면서 그리스에서는 마치 옷에 물감을 드릴 때 쓰는 용어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부분으로 형제님이 강조하셨는데 하나는 우선 물에 담그되 천을 물에 넣는 것, 두번째는 물에 완전히 잠기게 하는 것, 세번째는 물에서 나오는 것을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보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세례의 종류와 그 세례의 의미를 믿는 성도들의 삶과 관련시켜서 보고자 합니다.
세례의 종류
세례의 종류는 성경에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는 물로 말미암지 않는 세례이고 네 가지는 물로서 주는 세례를 말합니다.
1) 물로 말미암지 않는 세례
행
마
눅
주님께서 직접 주님께 일어날 일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받은 물세례가 아님이 확실합니다. 이 말씀 하실 때 이미 물세례를 주님은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받은 세례는 무엇인가? 그리고 기록된 성경을 보면 이후로 다시는 주님이 물세례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로서 이 세례는 다른 세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막
누가복음에서는 “나의 받을 세례”라고 하셨는데 여기는 “나의 받는 세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시제는 미래시제입니다. 현재이면서도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35절부터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내지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와가지고 다름 곳에서 보면 어머니가 아들 둘을 위해서 자리를 구했습니다. 이번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영광 중에 앉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주님께서 조건을 내셨는데 그 조건이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맥에서 보면 이 세례는 주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인데 주님이 세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로서 물로 말미암지 않은 세례가 세 가지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행
행
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요한이 주님께서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실 분임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세례를 어떤 분들은 불과 연결시켜서 두가지 견해를 보통 기독교계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나 불이나 둘 다 믿는 분 들에게 긍정적으로 내린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보이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불은 12절에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라는 말씀을 11절의 설명으로 보게 되면 성령세례는 알곡에 해당되는 것이고 불세례는 쭉정이에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문맥적으로 맞습니다. 성령세례는 행
그러면 누가복음에서는 나의 받을 세례가 있다고 말씀하셨기에 아직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말하면서 마가복음에서는 잔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비유적으로 “나의 마실 잔”과 “받을 세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한번은 “잔”을 한번은 “세례”를 말씀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데 잔과 세례의 차이를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잔과 세례는 둘 다 액체와 관련이 됩니다. 세례는 전반적으로 세례받는 그 사람을 완전히 감싸는 것인데, 즉 그 사람을 완전히 침몰시키는 것입니다. 세례와 관련된 물질이 그 사람을 휩싸고 그 세례를 받는 사람보다는 최소한도 양(量)이 많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매키온 형제님은 이전에 성공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태어나자 마자 물방울(유아)세례를 받았었습니다. 물방울 세례가 침례와 다른 것은 세례받는 사람보다 물방울이 적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세례는 반드시 세례를 베푸는 그 물질이 세례 받는 사람보다는 많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로를 한 번은 세례로, 한번은 잔으로 말했을까? 이것은 둘 다 고난입니다. 잔은 항상 마시는 사람보다 양(量)이 적어야 하며 많으면 안됩니다. 내 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양이 10리터인데 이보다 많으면 내 몸 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세례는 이와 반대가 됩니다. 물질이 항상 그 사람보다 많아야 되고 잔은 항상 그 사람보다 적어야 됩니다. 그 원리는 잔은 그 사람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리고 세례는 그 사람의 외면을 휩싸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왜 이렇게 표현했느냐 하면 잔과 세례 둘 다 주님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잔은 주님의 내면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고 침례는 외적으로 고통을 휩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큰 물결이 나를 덮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큰 물결이 하나님의 진노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대적이기도 하고 주님의 고난이 주님 전체를 휩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잔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는 고난인데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보면 주님이 내면으로 심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침례가 어떤 의미인가를, 즉 물로 말미암지 않으면서도 물과 관계되는 교훈 세가지가 나왔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세례라는 말이 나올 때는 세례와 관련되는 물질이 그 사람을 휩싼다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라는 말을 들을 때 최소한도 성령이 성령세례를 받는 사람을 전부 감싸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잔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지 않고 세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생각할 때 성령이 조금 내려왔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성령세례 받는 그 대상을 감싼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성령세례로 표현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물세례를 통해서 성령세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조금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으로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휩싸서 그 사람 전체를 합당하게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세례도 보면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도 그 지옥 불에 완전히 압도를 당하는 것입니다. 물세례도 물에 잠가버리니까 세례받는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세례 받는 사람도 압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세례도 지옥 들어가는 모든 사람을 압도해 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어마어마한 경고이고 한편으로는 어마어마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이 얻는 복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 다시 잔을 곁들여서 말씀하셨기에 내면적으로 고난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야고보와 요한보고 받을 수 있느냐고 그러셨던 것인데 “예” 하고 대답을 했는데 그래서 야고보가 제자들 중 최초로 순교를 당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모르고 함부로 말했지만 물론 주님의 은혜이며 야고보에게는 영광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야고보는 순전하게 접근했기 때문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도록 고난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물로 말미암지 않는 세례에 관한 교훈입니다.
2) 물로 말미암는 세례의 네 가지
특이한 세례가 있는데 읽다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
물로 받는 세례 중에 요한의 세례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
여기에 특이한 세례가 나오는데 사도행전 2장 이전에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세례라고 해서는 안되며 ‘예수님의 제자들의 세례’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을 것인데 이 세례가 또 하나 포함됩니다.
그 다음에 유대인들의 세례가 있고 이방인의 세례가 있는데 유대인의 세례를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행
여기의 순서를 잘 보면 세례가 먼저 나오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 마지막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받는 세례의 순서입니다. 교회시대 속한 구원받은 유대인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10장으로 가면 이 순서와 반대 되는 것이 등장합니다. 고넬료가 세례를 받을 때 모습이 나오는데
44~48절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여기는 2장과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2장에서는 세례를 먼저 받고 성령을 받았는데 10장에서는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았는데 차이는 유대인은 세례를 먼저 받았습니다. 그리고 안수해서 성령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인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열왕기 때의 사건 즉 앗수르 왕이 북방 이스라엘을 침공한 다음에 하나님의 징계로 사마리아에다가 거기에 살던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아가버리고 이방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심어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잡종이 되었는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의 세례는 유대인에 준한 세례입니다. 유대인의 원칙은 남편이든 아내든 한 쪽이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지금 유대인을 공격하면 이스라엘은 지금 전략방침을 세워 놓았는데 자기 민족을 보호하는 전략지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는 에디오피아를 공격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바로 핵무기를 사용하여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에디오피아 인들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국가로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시바 여왕의 후손들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전략상으로 에디오피아를 같은 민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쪽에 피가 섞이면 유대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유대인 여자가 이방인과 결혼하면 그의 자손은 유대인으로 봐줍니다. 사마리아에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서 살았던 자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경륜상에도 유대인으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준 유대인인데 이들도 하나님이 유대인으로 본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정리할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세례도 유대인은 먼저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오고, 사도행전에 보면 안수하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옵니다. 바울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따랐습니다. 19장에 보면 안수하여 성령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1~3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여기는 유대인이라는 명칭의 표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아서 유대인일 가능성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도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을 계승했거나 반(半)유대인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성령 받는 순서를 보면
4~6절에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이것을 교파에서 오해하여서 성령 받으라고 안수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경우임을 알 수 있고, 2장과 같은 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교회시대에 속한 사람들도 유대인과 이방인이 성령이 내리는 순서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례를 먼저 받고 2장에서는 안수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여기는 안수를 하는데 이것은 특수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원리가 이러한데 유대인들은 물세례를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는 순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는 순간에 먼저 성령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물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이방세계에 전도하는 전도의 원리는 이와 같이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은 다음에 세례를 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물로 받지 않는 세례의 세 가지, 물로 받는 세례의 네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속한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금 전에 행
세례요한의 세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마
그러나 신약에 속한 우리 성도들이 받는 세례는 다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의 고백하는 세례였지만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죄의 고백하는 세례가 아니라 이미 죄용서를 받고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도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세례는 과거에 처했던 문제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미 죄를 고백했고, 회개했고, 죄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함께 죽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의 세례와 신약성도들이 받는 세례를 정리하자면 만약에 세례요한의 세례를 올바로 받은 사람은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올바른 세례요한의 제자는 전부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세례요한의 세례와 신약성도들이 받는 세례의 차이가 구분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계에서 보게 되면 매키온 형제님이 의왕에서 첫날 우리의 세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좀 더 교훈을 받고자 하면 성경에서 세례를 말할 때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잔과 연결되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매키온 형제님이 첫날은 세례를 둘째 날은 만찬을 교제 하셨는데 만찬은 잔이고 세례는 물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천주교에서는 7가지 의식(儀式) 중에 하나로 보고 있는데 성경에는 두 가지 의식만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이며 하나는 만찬입니다. 세례를 생각할 때 세례를 표현할 때 옷 입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 갈라디아서 3장이었으며, 다음에 세례를 영적으로 설명하면서 물을 그대로 이용한 곳이 로마서 6장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6장에 물에 관한 것을 가지고 장례를 연결시키면서 교훈한 것이 바울이었고 그러나 베드로는 각도를 조금 달리하고 있는데 성도들의 삶을 교훈하다가 세례를 언급한 것이 베드로전서 3장입니다. 이 부분을 영적으로 교훈이 되기 때문에 살펴보겠습니다.
노아 홍수와 관련시켜서 세례를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벧전 3: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갑자기 베드로가 세례 문제를 들고 나왔는데 홍수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의 문맥은 13절부터 나가는 가르침 가운데서 21절이 나온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가를 교훈하면서 교훈한 것인데 로마서 6장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과의 관계에서는 성도들이 물에 잠길 때에 장사 지내는 것과 물에서 나올 때에 부활을 의미했는데 노아가 경험했던 홍수와 무슨 관계이겠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방주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노아가 살던 세상과 노아 방주와의 사이를 갈라놓았던 것은 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을 통해서 노아는 이전에 살던 세상과의 결별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의도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물을 통해서 이전에 살던 영역과는 완전히 결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에 있는 동안에 노아가 이전에 살던 곳과는 완전히 구별되었습니다. 노아는 살아 있고 세상은 완전히 멸망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6장을 보면 세상은 그대로 있고 물에 잠긴 사람이 죽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말하는 각도가 다른 것을 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죽기 위해서 물에 잠기는 것을 말하는데 노아는 살아 있고 세상은 완전히 멸망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6장도 잘 생각하면 물에 잠길 때 죽었지만 그 다음에 올라왔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로 방주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과 차단이 되었다가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방주에서 나왔을 때 노아가 만난 세상은 딴 세상이었습니다. 이전에 있던 죄인들은 다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노아를 깨끗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 새로운 세상에 나왔어도 노아가 맨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그 다음에 한 일은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죄가 나왔는데 그 점을 베드로는 권면하는데 침례를 받아도 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려져야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서 바울은 세례를 통해서 삶을 교훈하는데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교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연상시키느냐 하면 창 3장에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두 가지 옷을 가지게 됩니다. 첫번째 옷은 무화과 잎으로 자기가 만든 옷이고 두번째 옷은 하나님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 주신 옷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을 통해서 그것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든 옷은 종교입니다. 자기 문제를 발견하고 자기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와 믿음의 차이는 종교는 그 출발이 사람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출발이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주님을 섬길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갖기 전에 편의적으로 자기로부터 출발해버리면 종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모임 내에서도 자기 개인의 삶에서나 집단적인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급해도 무화과 잎으로 만들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만든 것을 기다리거나 주님이 만든 것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옷에 관한 것을 말씀하는데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가죽옷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옷을 입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번째, 옷은 그 사람의 어떠함을 나타내는데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아닌 자기를 위해서 돌아가신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옷이 원래 어떤 자인가를 나타내는데 다른 말로 하면 아담과 하와는 어떤 타인의 아름다움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것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자기를 위해서 죽음 가죽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어떤 타인의 아름다움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그 타인이 자기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피를 흘리게 한 존재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피는 사람의 피가 아닌 짐승의 피가 가장 먼저 흘려졌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보여진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세례는 영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나를 위해 돌아가신(사실은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아름다움을 입는 것입니다. 주님 편에서 보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원해서 죽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과 연관 시키는 세례를 생각할 때 또 하나는 여호수아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인데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가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요단강물은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강 한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제사장은 강 가운데 언약궤를 메고 서 있고 그 다음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건너게 됩니다. 문제는 다 건넌 다음의 한가지를 지시하셨는데, 요단강 한 가운데 12개의 돌멩이를 취해서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강 한가운데의 돌 12개를 가져 나와서 돌무더기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돌 무더기가 두 개가 생겼는데 하나는 요단강 한 복판에 또 하나는 진에 무더기가 있습니다.
수 4: 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 있더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이 말씀을 통해서 한 무더기는 언약궤가 서 있던 강 가운데 있고 또 하나는 자기들의 유숙할 곳에 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요단강 가운데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은 것을 의미하며 세례와 관계되는 것을 봅니다. 그 다음에 요단강에서 나와 유숙할 곳에 있는 돌무더기는 요단강을 무사히 통과해서 나와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물로 된 세례를 생각할 때 하나는 홍수를 생각하고,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가 입었던 가죽옷을 생각하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침례에 관한 영적 의미를 생각할 때 이미 우리는 노아의 방주가 나타내듯이 이 세상과는 침례를 받음으로 물로 말미암아 관계가 끝났음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도 본 성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우리의 내면을 씻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을 씻는 것은 반드시 말씀으로 우리가 반드시 말씀을 따라 순종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때도 주님의 은혜가 있어도 사람의 책임이 있듯이 주님 편에서 하실 것이 있고 사람 편에서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반드시 인격적인 말씀에 대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 그 사람이 믿음만 보이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그 물질이 그 사람을 휘감아버립니다. 성령세례를 생각하면 성령이 조금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온통 나 자신과 몸된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휘감고도 남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성령이 처음에 내려오실 때 성령을 부었다고 했습니다. 부었다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할 때 주님께서 찔끔찔끔 주신다기보다도 그 사람이 목욕하고도 남을 정도로 마치 에스겔서처럼 말하면 물이 문지방에서 나와서 발목에서 무릎으로… 나중에 헤엄할 물이 되는 것처럼 이렇게 연상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편은 세상과의 단절을 한편으로는 그 성도가 주님 앞에서 넉넉하게 영적으로 헤엄을 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함을 보이는 연상을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이런 관계들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제자들이 준 세례를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이유 중에 하나는 짧지만 문맥을 통해 보면 이런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주님의 사자인 세례요한을 사람들이 죽였기 때문에 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이었느냐 하면 ‘이제 나는 주님을 거절하는 사람들 편에 서지 않고 주님 편에 서 있습니다’ 하는 선언을 나타내는 것이 주님의 제자들이 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자세였습니다. 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사도행전에서 몸된교회로 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세례를 생각해 보면 ‘지금도 순수한 유대인이 있느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순수한 유대인이라고 만약에 말한다면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을 말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현재는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들이 순수한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순수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고로 교회에 속해버렸습니다. 지금 만약에 사도행전 2장부터 주님 공중에 오실 때까지 순수한 유대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신약에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순수한 유대인은 없는 것입니다. 전부다 주님을 대적하고 패역했습니다. 그럼 언제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몸된교회가 휴거됨과 동시에 7년 환난이 시작되고 이 때 교회에 속하지 아니한 유대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시대는 순수한 유대인은 100% 구원을 받고 몸된교회에 속해야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성령 받는 것과 세례 받는 순서를 구분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 현재 교파에서 행하는 것처럼 유대인에게 적용될 것을 이방인에게 안수해서 성령 받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모든 이방인들은 먼저 복음을 받고 성령을 받고 그 다음에 물세례를 받는 순서를 취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침례들-편집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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