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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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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롬 11:21-2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상고하게 됨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주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라도 구원의 문을 닫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적막한 처지에 있겠습니까? 기회가 소중하다는 것은 그 기회를 잃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서는 제3의 기회가 없다는데 그 엄숙함이 더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의 회개치 아니함과 믿지 아니함은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며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분들에게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2:5).

성령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이유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은 그 마음의 완악함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집은 자기와 자기의 것에 대한 애착심 또는 자존심의 변형입니다. 그런 사람은 근시안적입니다. 그 생각하는 세계가 좁고 자기가 주인입니다. 또한 절대적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합리적이고 순리적으로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실한 친구도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진실로 고집은 이익도 타당성도 승산도 없는 백해무익한 병폐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스라엘이 꼭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꼭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불신에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빛을 등진 사람의 얼굴이 밝을 리 없고 사랑을 버린 사람의 마음이 행복할 리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회개치 아니한 마음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마음의 변형입니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은 잘못을 하면 그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려고 하는 대신에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변명을 하려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서 종종 듣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빌리면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쁘니 예수님 믿기를 원하지 않으며 내 마음만 잘 지켜 간직하면 된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못 믿겠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일종의 책임전가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반성하며 회개하려 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판단하는 그들도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2:1-5).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라

그러면 이제부터 난해구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로마서 11 21,2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이 말씀도 언뜻 보면 구원얻은 사람이 그 얻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구원의 절대성에 관해서는 로마서 8 30-39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미 증거했습니다. 30절을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함으로 구원얻은 사람이 실제로 이미 영화롭게 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31절에서 그런즉 이 일(30절의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면...”라고 말하지 않고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한 이 누가라는 말속에는 하늘의 천사들과 공중의 권세잡은 자 마귀와 이 땅의 모든 피조물, 기타 땅 아래에 또 다른 피조물이 있다면 그것도 다 포함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대적하여 이길 자가 천상천하에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33절을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이상 누가 우리를 송사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마귀나 우리 양심이 우리를 송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송사라 할지라도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상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34절에 말씀하시기를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하고 묻고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취소되지 않는 이상, 또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쫓겨나지 않는 이상,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에 대해 예수님께 벌을 내리시고 또다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35절에 보면 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누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지 않고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라면 그 무엇 하나 내세울만한 것이 없겠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른 것입니다. 아가서 8 7절의 말씀대로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흥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사야 49 14-16절에 기록된대로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 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8:39)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그러면 로마서 8장에 우리의 구원을 절대 확증하고 있는 말씀이 가득히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마서 11장에서는 그 얻은 구원을 잃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와는 다른 대상을 주제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의 주제, 즉 전 세상 사람들의 구원 문제를 논하고 있다면, 9장부터 11장까지는 섭리상으로 본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별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장부터 8장까지에는 구원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지만, 9장부터 11장까지에는 그것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문제 자체를 논하고 있지만, 9장부터 11장까지는 구원 문제 자체보다는 이방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 11절에서는 “...저희의(이스라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12절에서도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희”, 즉 이스라엘 민족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넘어짐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의 뜻입니다. 또한 15절에서도 저희를(이스라엘)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이라는 말씀도 이스라엘 민족을 버린 것 그 자체가 세상의 화목을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버림받은 것이 세상의 화목의 기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본문의 말씀인 21,22절의 말씀을 본다면 그 뜻 역시 구원받은 우리가 꺾이우고 찍히우고 버림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주어진 그 구원의 축복의 기회가 끊기운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이방인은 머지않아 이 구원의 기회가 끊기우고 원 가지인 이스라엘 민족이 그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본문의 말씀의 경고 그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당신의 행위에 의지하려 하는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시인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의 고백이 이와 같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와인자가 당신에게 머물 것입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