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약속, 임재, 능력
마가복음 4장 1~9절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35~41절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각각 복음서는 그 각각에 해당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복음서에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는 직접 주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면 마가와 누가는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마가는 베드로로부터 정보를 얻었을 것입니다. 아마 누가는 여기저기 자료를 모아서 한 것으로 보입니다.(마태 요한은 직접 받은 것을 기록하고 마가 누가는 간접 방식으로 기록) 누가는 자기가 기록하는 것이 올바른 것을 알았습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주님의 종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마가복음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읽는다면 주님의 종으로서 여러분이 행하여야 할 행동수칙을 적어놓은 핸드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가장 짧은 복음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짧은데 비해서 큰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직접 운영하는 훈련학교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위대한 교사인 것을 한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3년 가량 보냈을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3년이라는 것은 아주 위대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보다도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영향력 많게 가르친 분이 주님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 과정을 읽는 것입니다. 3시간을 통해서 이 마가복음 전체를 다룰 수는 없습니다. 어제 말씀드린대로 주님이 행하신 배를 타신 3가지 사건을 통해서 말씀드릴 것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첫번째는 4장에 바로 근접해 있습니다. 36절을 보면 배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장 21절로 가서고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항해 가운데 두가지 다른 무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배를 타고 거라사인으로 가셨습니다. 21절에서는 다시 거라사인에서 갈릴리로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를 타시기 전에 어떤 가르침을 하셨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이유 때문에 4장 초반부를 읽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큰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은 임무를 3장 14,15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큰 이유를 볼 수 있는데요. 14절에 보면 전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서는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주셔서 이것을 행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능력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을 논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4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에게 그 책임을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두 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는 증거에 대한 책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파할 책임을 가졌습니다. 항해할 그 시간에 그들이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두 책임이 있는데 하나는 증거하는 것이고 하나는 항해하면서 주님을 의뢰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우선 증거하는 책임을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씨를 뿌리는 책임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가 씨뿌리는 비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1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뿌리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인데 밭은 세상을 말합니다. 또한 말씀을 뿌림받는 세상이 각각 다른 반응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짧게만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 때문에 받은 말씀이 죽어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땅처럼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씨는 언제나 좋은 씨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씨가 아니라 항상 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4장 4,5,7절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성경에는 더러는 해서 복수이지만 주님께서 원래 사용하실 때에는 하나의 씨가 떨어졌다고 사용하셨습니다. 4,5,7절에 더러는 해서 우리 성경에는 여러 개 씨처럼 되어 있지만 원래는 씨가 하나였습니다. 단 하나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씨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왜 마가복음이 마태복음과 다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에 대한 복음서입니다. 많은 종들은 많은 씨를 뿌릴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합니다. 종들은 아주 적게 뿌립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나는 씨를 많이 뿌리고 싶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수천명의 사람들 앞에 주님을 증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말할 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씨 하나를 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 뿌려라. 전도지 한 장을 어떤 사람에게 주라. 주님은 그 씨 하나 하나에 가치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씨가 어디에 떨어지는 지를 주님은 아십니다. 또한 그 씨가 떨어지는 땅의 사람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씨 하나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치가 있기 때문에 씨 하나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인 것입니다. 씨를 뿌릴 뿐만 아니라 21절에서는 등불을 밝힙니다. 등불을 가져와서 어떤 사람은 평상 아래 두거나 말 아래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잠을 잘 때 평상(침대)아래 등불을 둔다면 제가 어리석을 것이며, 아마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말은 곡식 같은 것을 재는 도구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장사하는 도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밀을 판다면 이 말로 재어서 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등불을 말 아래 두고 한 사람은 등불을 침대(평상) 아래 둡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둘 다 등불을 비추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양쪽 다 제자로서 빛을 발하는데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에서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은 우리가 사업하고 바빠서 빛을 비추지 못하는 교훈입니다. 또한 평상(침대)은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빛을 비추지 못하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무 바빠서도 안되고 너무 게을러서도 안 된다고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드러내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등불은 말 아래 두지도 말고 평상 즉 침대 아래에 두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번째로 가겠습니다. 우선 24,5절입니다. 여기는 우리들에게 모으는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르침 받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며 모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듣는가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르침 받는 듣는 것을 잃지 말고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그대로 말씀의 가르침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내가 받은 진리를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갖고 있는 진리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진하던가 후퇴하던가 둘 중의 하나이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영적으로 더 전진한다면 점점 진리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만약 내가 가르침 받은 것을 행하지 않으면 내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가던가 뒤로 물러가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으로서 세가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책임, 세상에 빛은 발하는 책임, 또한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을 간직하는 책임입니다.
35절로 가면 여기는 두번째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는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제자의 삶은 힘듭니다. 그래서 이 항해는 힘든 항해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움이 있는 항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려워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을 당하면 그가 잘못 행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한다면 대부분이 주님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을 따라갔지만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이들이 주님을 순종해서 배에 탔습니다. 왜 이렇게 순종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는가. 주님께서는 이 어려움에 그들에게 신뢰함을 즉 주님을 의뢰함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의 어려울 때에 주님을 의뢰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항해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 여행의 목적을 보시겠습니다. 거라사인 지방으로 주님이 가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항해가 하늘로 가는 항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좀처럼 어려운 말입니다. 여기서는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망이 있는 땅으로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 사이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는 데로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거라사인 지방에서 죽어가는 여인을 주님이 만납니다. 25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죽은 소녀아이를 주님이 만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항해의 목적은 주님이 죽음을 어떻게 다루시는 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어난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은 광풍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 광풍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여러분이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37절에서 그 상황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4명의 아주 총명한 어부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폭풍 속에서 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잘 아는 어부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가 어부들이 다룰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도움의 한계를 넘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황은 희망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말합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는 지금 죽기 직전입니다. 주님은 어떤 남녀도 도울 수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상황으로 가야 할지도 무르겠습니다. 여기는 절망적인 위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주님은 자고 있었습니다. 광풍 속에서 주님은 주무셨습니다. 여러분이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어디에서 주님이 앉아계십니까? 38절에 보면 배의 뒤쪽 고물에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개를 베시고 주무셨습니다. 이 베개는 잠자는 베개가 아니고 배의 키를 잡는 사공이 앉아 있는 그 쿠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항해는 배를 움직이는 이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키를 잡고 계신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이 배를 안내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주무시고 계십니다. 키를 잡는 조타수가 잡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놀랐고 두려워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배의 문제가 키를 잡고 있는 분이 자는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아마 오늘날 살아가는 믿는 자들이 그렇게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광풍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보이기에는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무시는 듯이 보이며, 대답을 안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문제는 제자들에게 있지 주님께 있지 않으며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문제는 여러분이 항해하는 시기에 안내하시는 분이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기일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는지를 보아 주십시오. 여기서 제자들이 얻은 것 세가지를 제가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첫번째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35절에서 이 약속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이것은 약속이라기보다 어떤 면에서 명령입니다. 명령을 약속으로 우리는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했을 때 제자들은 건너가기 위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약속을 한 것이 됩니다. 두번째는 그들은 주님의 임재를 획득했습니다. 주님이 타고 있는 한 배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습니다. 가라앉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배에 물이 가득했습니다. 이 배가 물이 가득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계시는 한 이 배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습니다. 주님이 함께하는 한 끝까지 가라앉지 않고 그 어려움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항해에서 주님이 계시는 한 어떤 일이 있어도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시고, 임재하시고, 이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이 광풍에서 아무것도 못했지만 주님이 행하시는 것은 많이 보았습니다. 주님이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약간의 숙제를 내겠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제자들이 주님께 질문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오늘날도 어떤 믿는 자들이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라고. 그러나 주무시던 그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상황을 제어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것을 보시겠습니다. 주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문제는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아주 엄하게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다를 또한 꾸짖으셨습니다. 바다를 향해서는 그냥 잠잠하라 하셨고 바람을 향해서는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주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여기에 아주 기적적인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에 광풍이 일어나서 파도가 일게 되면 바람이 잔잔해져도 파도가 잔잔해지는 데는 오랫동안 시간이 걸립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보면 이러한 파도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에 형제에게 말하기를 ‘얼마나 큰 파도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그 형제님은 어부였습니다. 내가 볼 때는 큰 파도인데 그 형제님은 이것은 보통 있는 파도라고 말했습니다. 저한테는 큰 파도로 보였습니다. 그때 그 형제님은 배를 한번 타보겠느냐 해서 저는 안타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배가 이와같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 때문에… 저는 그 형제님에게 물었습니다. ‘파도가 잔잔해지려면 얼마나 오래 걸립니까?’ 그 형제님은 말하기를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바람이 멈춤과 동시에 파도가 멈춘 유일한 곳입니다. 바람이 멈추자 바다가 곧바로 잠잠해졌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큰 기적입니다. 왜 주님이 광풍을 취하셨습니까? 여기서 가정입니다만 어떤 제자가 광풍이 이는 것을 보았다면 가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안 갔기 때문에 나는 정말 지혜로웠다고, 이런 광풍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들어가기 싫다고, 바닷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주 지혜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닷가에 머물러 있는 한 주님이 하시는 일을 가까이서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광풍을 잃음과 동시에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기회도 잃은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광풍으로 들어갔다면 주님께서 광풍을 다스리는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나를 섬겨라. 너는 광풍을 만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려움이라는 문제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내가 그 광풍을 다스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내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해도 주님이 그것을 다스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제자됨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36절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여기에 다른 배들도 함께한 것이 좀 이상스럽습니다. 이들도 또한 광풍을 만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한 이들도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타신 배에는 이들이 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보다 더 주님 가까이 가 있지를 못했습니다. 이들 다른 배에 탄 사람들이 잔잔함을 맛보았지만 그러나 맛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일하시는 것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어야만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는 자만이 어떻게 파도가 잔잔해졌는지를 올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지 말고 가까이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님 가까이 계실 때에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매우 두려워하며 서로 말했습니다. 복음서 내에서 제자들이 주님께 말하지 않고 서로간에 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기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누가 바다를 명령했는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아무리 우리가 기술이 발달할지라도 바다를 명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가 뉘기에’는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과 얼마나 다른 분인가’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과 이분은 얼마나 다른가 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이세상의 사람과는 다르다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바람이나 바다가 이분의 말씀을 들었다. 어떻게 해서 바람과 파도가 이분의 말을 들었습니까? 이분이 바로 바다와 바람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사단이 이 광풍을 조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장에 보게되면 신하 중 한 사람을 사단이 죽이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마귀는 여러분에게 접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힘보다 위대합니다.
이제 주님이 건너편으로 갔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금 보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5장은 죽음의 장입니다. 아주 엄한 그리고 어두운 장입니다. 여기서의 나쁘게 된 세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몸을 스스로 상하게 했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 살고 있었습니다. 쇠사슬을 채워도 그것을 끊어버렸습니다. 돌로 자기 몸을 상케 했습니다. 광풍을 아무도 조절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 사람도 아무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귀신이 들렸습니다. 귀신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여러분은 들으십니까? 12절에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왜 이렇게 했습니까?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귀신이 몸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앞에서는 사람의 몸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우리가 그럼 돼지에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주님께 허락을 구했습니다. 주님께서 들어가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왜 귀신들은 돼지에게 들어가려고 했겠습니까? 이런 식의 이유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몸이 올바르게 쓰이지 않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동물들은 키우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 귀신들은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귀와 그의 부하들은 힘이 있습니다. 그 귀신들과 마귀를 비웃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귀신은 주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돼지에게 못 들어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돼지에게 들어가기를 허락은 했지만 왜 들어가게 했는지를 귀신들은 몰랐습니다. 이후에 돼지들이 물에 빠져 죽었기 때문에 귀신은 더 이상 몸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다른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전체 장을 통해서 세 사람들이 한 것을 보겠습니다. 첫번째 귀신들린 사람은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1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 네 친속에게 고하라” 그는 주님을 떠나 돌아가서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15절을 보면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는 안정되게 앉아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있었습니다. 정신이 온전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거라사인 지방에서 큰 증인이 되었습니다.
25절부터 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자기 몸을 스스로 상하게 했지마는 혈루증 환자는 남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27절에 보면 의사를 통해서 이 사람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와서 손을 대었습니다. 왜냐하면 옷에만 손을 대도 났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이 여인이 지속적으로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중 사이에 들어가서 여러 번 시도하는 가운데 마침내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아마 병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매우 열렬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옷에 손이 닿는 순간에 12해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12년 동안의 병이 일순간에 없어졌습니다. 그저 주님의 옷에 손이 닿는 것으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둘러 보셨습니다. 누가 나에게 손은 대었느냐고 주님께서 둘러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 손을 대었는지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녀를 보려고 둘러 보셨습니다. 32절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여인은 엎드리고 말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주님을 증거했지만 이 여인은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야이로의 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열 두 살이었습니다. 여인이 병을 앓은 햇수와 거의 같습니다. 여인은 열 두 해를 앓았고 이 가정에는 열 두 해 동안 아이 때문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한 쪽 열 두 해는 기쁨이 있었고 한 쪽 열 두 해는 아이가 죽으므로 기쁨이 그만 사라졌습니다. 죽은 아이의 집에 가셨습니다. 죽은 소녀에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세가지의 경우는 주님께서 말을 하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 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소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주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열 두 살 아이로 일어났습니다.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훈을 보십시다. 한 증인을 주님이 일으키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예배자를 남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양육을 남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 해야 합니다. 우리는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양육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유가 바로 이러합니다. 소녀도 건강했고 여인도 건강했고 귀신들린 자도 건강했습니다. 이제 기쁨 가운데 이들이 살도록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애에 손을 대시면 우리의 생애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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