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위
로마서
로마서
로마서
야고보서
야고보서
야고보서
야고보서
모든 성경 중에서 야고보와 바울 보다 서로 모순되게 보이는 성경 저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중요한 교리에 관해서 한 기자는 어떤 사람도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기자는 그 사람의 선행이 구원에 한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 의롭다함은 행함이 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된다는 것과 야고보가 말하는 바 의롭다함은 행함과 함께 한다는 말은 확실히 풀리지 않는 교리의 불일치인 것 같이 보입니다. 이 분명한 모순은 위대한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성경의 정경에서 보다 낮은 수준으로 야고보서를 여겼다는 것으로서 그 중요도가 큽니다! 몇몇 학자들은 루터의 야고보서에 대한 입장은 과장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야고보서를 ‘보잘것없는 서신서’ 로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과 야고보는 성경 기자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바로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분명한 기자이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이제 천국에서 신학의 서로 다른 것을 화해하고 있다고 상상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으로서 이 서신서들이 서로 모순될 수 없기 때문에 바울과 야고보의 서신들이 조화될 방법이 있습니까?
바울과 야고보가 말하지 않은 것
이 서신들의 조화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우리는 그들이 말한 것과 정확하게 비교함으로써 영감을 받은 두 사람의 저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선행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마치 50%의 믿음과 50%의 행함과 같이- 믿음과 행함이 어느 정도 혼합된 결과로 의롭다함이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음을 주시하십시오. 그가 말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선행이 구원받는 믿음과 분명하게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슨 믿음이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구원받는 믿음이 선행의 결과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시하십시오. 그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함은 구원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야고보와 바울의 서신이 충돌노선상의 필연적인 충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처음에는 철저하게 모순되게 보일지라도 진실로 정반대 되는 의견도 아니고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보다 상세하게 말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질문: 동시에 정사각형과 정삼각형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간오답 :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깊고 올바른 대답 : 피라미드입니다! 한면 -지면에서 보면 그 것은 삼각형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공중에서 보면 그 것은 정사각형입니다.
위의 묘사가 우리들을 바울과 야고보의 말을 보다 더 이해하게 합니다. 야고보와 바울이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 기록했을 때 서로 모순되고 있지 않습니다-단지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믿음을 본 것입니다! 바울은 위에서부터 보았고 -신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믿음의 질을 그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믿음의 질은 선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 것에 의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한편 야고보는 땅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믿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할 수 있듯이 사람의 심장을 볼 수 없습니다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의 삶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선행으로 그 믿음의 고백을 증명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는 믿음은 보여지는 투시도에 그 믿음이 어떻게 정의되는 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믿음의 두 가지 정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믿음의 두 가지 정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받는 믿음이 행함과 관계없는 믿음이지만 사람의 관점에서 믿음이 사람이 볼 수 있는 선행이 따르는 믿음이라면 구원받는 믿음의 정의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필수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
야고보와 바울이 둘 다 예로서 아브라함을 인용한 것은 확실히 이 구절의 조화에 있어 중요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그가 할례(순종의 행위)받기 전에 그리고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바울에게서 더 자세히
바울이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말해야 했던 것을 고려해볼 때 그가 다른 서신서에서 그가 기록했던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갈
야고보에게서 더 자세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관한 다음 구절은 야고보 혹은 바울의 소리처럼 들립니까?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마치 로마서의 바울 사도의 그것처럼 분명하게 들리죠. 그렇죠? 아닙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서 1:18절의 야고보의 기록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야고보의 강조가 공로로 구원을 얻는 공로구원을 의식한 것이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관하여 말한 것을 생각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
믿음을 빼면 아브라함과 라합은 전혀 선행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의 행위”는 인정받을 만한 선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선행에 믿음을 더하는 것은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의 요점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가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이미 있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라합이 사회적, 종교적 전혀 다른 배경에서 언급되었더라도, 그들 둘은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로 그들의 가장 가까운 것- 각각 가족과 조국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위에 대해 어떻게 논쟁을 시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고보
복음을 위한 접근
바울과 야고보에 의해 제기된 ‘믿음/행위’에 대한 의문의 다른 접근이 오늘날 다른 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데 좋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기 위해 공을 쌓아야 한다거나 천국에 가기에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에게 로마서의 진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구원은 행위와 별개입니다!! 다른 한편 “느슨한 생활”을 하는 개인이 “모임에 나가고”, “손을 들거나”혹은 그들이 어렸을 때 복음 전도단에서 “회원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과 함께 야고보의 진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순종의 삶으로 그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믿음은 미심쩍습니다. 왜냐하면 행위를 뺀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충돌부분은 단지 겉 부분일 뿐입니다! 영감을 받은 기자로서 그들의 말은 일치됨이 분명하며 그들이 일치시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함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홀로만 됩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홀로 있는 믿음만은 아닙니다. 선행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을 동반하지 않습니다만 구원의 증거로서 믿음을 동반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죽은, 지적인, 비활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로 구원받은 믿음은 순종 행위가 따르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은 믿음은 행위가 따르는 믿음입니다.
데이빗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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