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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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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28. 19:00 횃불/1989년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

성령의 은사운동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까요?

- 데이비드 뉴얼 -

금세기에 들어서서 우리는 한 운동이 전통적인 교파의 테두리들을 벗어나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각적인 영적 성공과 초자연적인 경험, 그리고 신약성경의 기적들을 부흥시키겠다고 주장하는 이 성령 은사운동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데 초신자들은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지난 호에서 저는 성령님의 현재사역 중 네 가지 원칙을 강조했으며, 그 중에 한 가지는 성령님이 성경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일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성령의 은사운동을 왜 불신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저는 매우 오용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Charismatic)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유래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恩惠)의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감안할 때 성경적인 의미로는 첫째로,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점에서( 5:15-16, 6:23), 둘째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섬기라고 주신 은사를 적어도 한 가지 이상 받았다는 점에서 모두가 다 각기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12:6).

제가 현대의 성령 은사운동의 주장과 행동을 부인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1]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의 목적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에 관하여 맨 먼저 언급하고 싶은 사항들 중의 하나는 기적이 성경에서 이따금씩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은 구속(救贖)의 역사(歷史)가운데서 어떤 중대한 순간에(출애굽시에,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구주와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서), 대개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일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때 드문드문 나타납니다. 다음과 같이 경건했으면서도 기적을 전혀 일으키지 않았던 사람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 다윗, 예레미야, 다니엘, 침례요한(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이).

따라서 우리는 기적이 궁극적으로는 믿음이나 혹은 영성(靈性)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달려 있다고 결론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과거에 하셨던 일을 오늘 날에도 하실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변역(變易)지 아니하시는분이기 때문입니다( 3:6).

중대한 문제는 오늘 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입니다. 신약성경에는

(1) 어떤 사자(使者)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표가 바로 기적이라는 것과( 11:20, 5:36, 10:24-26),

(2) 특히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한다는 것(고전 1:22),

(3) 그리고 표적은 주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신원을 보증했습니다( 2:22, 5:12, 고후 12:12, 2:2-4).

사도들이 교회의 터를 놓았기 때문에 ( 2:20), 그리고 오늘날 사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1:14), 그 신임장들의 효력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며, 현재의 믿는 자들은 기적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도들을 통하여 주어진, 완성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벧후 3:2).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의를 일으킬만한 굉장한 어떤 것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을 단순히 믿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영광을 돌리는지 모릅니다!

 

[2] 그것은 참된 기적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이 말은 초자연적인 치료와 환상, , 방언 둥을 자랑하는 운동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의 요지는 아주 단순합니다. 성경의 기적들은 한결같이 그 누가 보아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하면서도 놀라운 것들이었다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고( 3:10),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며 ( 3:16), 모든 사람들이 선명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공개된 사건이었습니다( 3:16, 4:14). 이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의 실증과 비교해 볼 때 소위 현대의 기적들은 시시하며, 회의적이며, 은밀한 것들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사(奇事)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공연한 것들입니다!

오순절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원래의 기적들을 재현하는 일에 분명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이 있었다는 것과(2),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것(3), 그리고 갈릴리 제자들에게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재능이 초자연적으로 주어졌다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4). 성령 은사운동 주창자들은 앞에 언급한 사항들 중에서 처음 두 가지 현상을 재현하지 못할뿐더러 세 번째 사항도 결핍되어있습니다.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은 팔레스틴 밖에서 살던 유대인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제자들이 초자연적으로 말하는 언어를 알아듣고 그것이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현대판 방언들은 참된 언어가 아니라 무아지경에서 지껄이는, 의미 없는 말로서 하나님의 권능이 영광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성령 은사운동 주창자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바로 그 영역에서 성경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기적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3] 그것은 경험을 성경보다 우위에 둡니다.

특별한 은사와 경험, 느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령 은사운동은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믿는 자들의 눈을, 변함없는, 견고한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감정 위에 세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감정이 있을 동안만 지속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훨씬 더 좋은 토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요동함이 없는 반석인 성경입니다( 7:24).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있었던 경험을 회상하는 기쁨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확증하는 말로 다음과 같이 옮아가고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6-19). 사무엘 콕스(Samuel Cox)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표적과 기사보다 더 나은 믿음의 기초 토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놀라운 경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자기 몸이 그들을 떠나갈 것을 대비하여 제자들에게 기적들이 아닌 진리의 말씀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무덤에 간 여자들에게는 그분의 말씀이 상기시키셨으며(6-8),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성경을 가지고 교훈하셨습니다(25-27). 그리고 다락방에서는 주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제자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사용하셨습니다(44-48). 오늘날 구주께서는 표적과 기사들을 통하여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알려지십니다. 오직 이것만이 믿는 자들을 오류에서 보존해 줄 것입니다( 119:104).

 

[4] 그것은 하나님의 순서를 무시합니다.

방언이 성령 은사의 중대한 특징이며, 특별한 축복의 표시로 여김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관한 가르침을 알기 위해 성경 말씀을 대강 훑어보기만 해도 방언이 다른 은사들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처해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바울은 이것을 여러 번 증명했습니다. 방언은 은사들이 열거된 두 목록 중에서 맨 나중에 언급되고 있으며(고전 12:10,28), 예언의 은사보다 훨씬 못한 것입니다(고전 14:4). 더욱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중에서 방언을 말했던 교회가 근본적으로 경건함이 부족한 교회였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은사들이 곧 영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3:3).

그리고 바울은 방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은사가 아니라(고전 14:19)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진 표적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고전 14:21-2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국가적으로 다루시던 기간이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더불어 끝나자 그 표적의 은사(방언)도 역사가 증거하는 바대로 급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대의 은사 운동은 바울의 가르침을 거의 무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맨 나중에 두신 우선순위를 맨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본다면 은사운동의 기적들과 흥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와 있는 객관적인 진리와 맞지 않기 때문에 미혹일 뿐입니다.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권하는 베드로의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벧후 3:18).

 

(1989 11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