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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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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5. 13:37 횃불/1990년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

배역자(背逆者)도 회복될 수 있습니까?

데이비드 뉴얼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그렇다! 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 예수님을 떠나 경건치 못한 세상의 생활방식으로 빠져 들어가기가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떠나 방황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영접하시기를 몹시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누가복음에서 나타난 탕자의 비유의 주제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배역자의 회개, 돌아옴, 영접).

그러나 회복보다는 예방이 훨씬 더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탕자를 회복하실 수 있고, 또 회복하실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주의 한 품행을 조장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울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앞으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3:13~14).

그렇다면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배역하는 일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그것은 하루 아침에 닥치는 불행이 아니라 더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일어난 점진적인 이탈의 결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증상은 매우 다양할지라도 원인은 언제나 다음과 같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4). 얼마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 학생이 성경의 창조와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의 한 증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낀 저는 그와 더 대화를 나눈 결과 그가 말씀묵상과 기도를 진작 그만 두어버린 것을 간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직 그가 주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고 나서, 그 문제를 충분히 다룰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영적 수준에 도달해야만 해결이 가능합니다.

* 배역자(backslider)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주님을 떠나 불순종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실패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경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하락을 다음과 같이 7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자만심(33)

가련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준비하였나이다.” 주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은 비록 그의 말이 진실한 것이었을지라도 그의 하락의 시발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의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우리의 자만심, 곧 나는 영적으로 잘해 나갈 수 있다든지 혹은, 적어도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더 낫다라고 여기는 마음을 자극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에 반해 요한은 자기를 일컬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21:20)라 했으며 예수를 사랑하는 그 제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3:3), 형제도 신뢰하지 아니하고( 118:8~9),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 바로 이것만이 믿는 자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아무리 주님의 보혈로 영원토록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17:9), 사단과 세상의 합동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15:19), 연약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은 우리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과 연관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구원받기 전에 행한 행위에 달려있지도 않고, 구원받은 후에 행한 행위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납니다.”

물론 이것은 초보적인 교훈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구주는 전능하십니다.

 

[2] 기도하지 않음(45~46)

제가 만일 혼자 힘으로 잘해 나갈 수 있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잘못 평가하여, 기도하고 있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26:40).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귀한 것으로써 이것을 소홀히 하면 우리의 영적 생활은 모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실 때 그분은,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낙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행정 업무의 와중에서도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기도를 드렸던 다니엘의 본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6:10). 하지만 이 습관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철저한 훈련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럼 바로 지금부터 견고한 기도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3] 충동적이었음(49~51)

주님이 붙잡히신 그 동산의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군병들이 주님을 체포하려고 움직이자 제자들은 겁에 질려, 저항을 해야 할지 어떨지 주님께 질문했으며, 이 때 베드로는 성급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49절에 나오고, 주님의 대답은 51절에 나오는데 베드로의 성급한 실수는 50절에 나오고 있습니다(이것을 요 18:10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감에 빠진 베드로는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마음과 그의 마음 사이에 틈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들이 성급한 행동으로 인해 얼마나 피해를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4] 거리를 둠(54)

성경은 베드로의 영전인 거리(, 주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벌어진 거리-역주)를 다음과 같이 실제적인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 베드로는 여전히 거기에 있긴 했지만 그 멸시 받는 나사렛 사람과 공공연하게 연합하는 것을 꺼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평(世評)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늘 속으로 도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5] 옳지 않은 사람들과 동석(同席)(55)

이것은 고린도후서 6 14~18절에 나온 바울의 가르침을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젊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배역의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과 뒤섞이기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세상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커녕, 비참하게도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롯에게도 일어났고( 19) 삼손에게도 일어났으며( 16:4~21), 솔로몬에게도 일어났고(왕상 11:1~4), 또 베드로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동석합시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역시 교회, 곧 우리의 동류(同類)”라 불리는 사람들과 연합해야 합니다( 4:23).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인근교회들의 성서적인 활동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성도들의 교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6] 말씀을 잊어버림(57~60)

베드로는 닭이 울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의 34절에서 하신 말씀을 상기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으로 빠져들어갈 때에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경고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멈추고 우리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편기자의 말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119:11).

 

[7] 명백한 부인(否認, 57~60)

지속적인 배역은 결국 기독교 신앙을 외적(外的)으로 고백하는 일조차 포기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두 주인을 섬기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6:24). 베드로의 처지는 33절에 표현된 자만심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C·H· 매킨토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을 의뢰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만일 은혜로 보호하심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심각한 죄에라도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바나바가 사도행전 11 23절에서 권한 것처럼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경험을 본으로 삼아 우리가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1990 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