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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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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5. 13:39 횃불/1990년

기도와 기도집회(3)

C. H. 매킨토쉬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5~10).

 

위의 말씀이 제자들의, “우리에게도(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 중의 일부임을 감안할 때 지극히 고차원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히 우리가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떠맡아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머리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독자들의 영혼을 인도하여 직접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하게 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이 복되신 우리의 주님이자 선생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기도와 기도집회가 하나님의 표준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를 직접 판단해보도록 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1장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이처럼 명확한 필요가 느껴졌고 표현되어졌습니다. 마음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사항만이 있었고, 그는 오직 그 한 가지 사항에만 집착했습니다. 그의 요구는 온갖 종류의 사항들을 언급하는 길고, 산만하고, 종착 없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확하고 단도직입적이며, 목적을 향한 촛점이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떡 세 덩이를 원한다. 나는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상황은 긴박하며, 나는 그것을 꼭 가져야 한다.” 시간은 밤이었고, 모든 상황은 명백하면서도 간절한 호소를 자아냈습니다. 그는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는 이 한 가지 초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밤중이라는 시간은 무엇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성가신 때입니다.

친구는 잠자리에 들었고, 문은 이미 닫혔으며, 아이들은 그와 함께 침소(寢所)에 누웠기 때문에 그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에 그는 낙심하지만 절박한 필요가 그를 압박합니다. 그는 세 덩이의 떡을 꼭 구해야만 했습니다.

이상의 사항들을 우리의 기도와 기도집회에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집회가 길고 산만하며 종착없는 기도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기도집회가 다 끝난 후에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너희가 나에게 진짜로 요구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지?”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몹시 당황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 모든 사항들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제목들을 가지고 함께 모이기만 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가도집회에 간절함과 신선함, 열렬함, 깊이, 진실, 능력을 크게 더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온갖 사항들에 관하여 한꺼번에 길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의 기도내용 중에 많은 사항들이 매우 합당하고 좋은 것들임은 틀림 없는 사실이지만 그처럼 복잡하고 많은 제목들로 인해 동참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혼동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나아와 그것을 간절히 구하고 끝냄으로써 성령님이 다른 사람을 같은 식으로 인도하셔서 같은 사항에 대해서나 다른 사항에 대해서 기도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더 나은 일이겠습니까!

장황한 기도는 대단히 지루하며, 사실, 여러 경우에 있어서 그런 기도들은 분명히 고통입니다. 우리는 장황한 기도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런 기도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어지기는 하지만 인정은 거의 못 받습니다. 이 차제에 첨언하고 싶은 것은 제가 대단히 신령하고, 헌신적이며, 지성적이고, 경험 많은 형제들을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관찰해 본 결과, 그들의 기도는 구체적이고 단순명료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선하고 올바르며 성경적이며, 덕을 세우고 위로와 축복을 갖다 줍니다. 간단하면서도 목적이 분명한, 열렬한 기도는 기도집회에 신선함과 흥미를 더해 주지만 장황하고 산만한 기도는 참여한 모두에게 대단히 부담을 주고 힘 빠지게 만드는 영향을 줍니다. 누가복음 11장에 제시된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강청함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단순히 간절한 강청함(간절한 끈덕짐) 때문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는 떡 세 덩이를 구해야만 했으며, 이것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친구의 신분을 주장하는 것이 효과가 없을 때 조차 강청함은 효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목표에만 집착했으며,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다시 말해서, 그는 거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 중대한 교훈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그분은 결코 안에서대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의 참된 벗이요, 즐거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에 모든 찬양을 돌릴지어다! 그분은 강청함(끈덕짐)을 촉구하시며,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을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기도집회에는 강청함이 빠져있습니다. 사실, 구체적인 기도가 결핍되는 것에 비례하여 강청함도 결핍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두 요소는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요구되어지는 것이 떡 세 덩이처럼 분명하고 구체적일 때, 즉 확고부동한 목표가 있을 때는 일반적으로 강청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도에 있어서나 우리의 기도집회에 있어서나 너무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구하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도집회를 망가뜨리고 있으며, 속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집회 대신 촛점이나 능력이 없이 그저 가르침이나 대화식의 집회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온 교회가 철저히 각성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 때문에 우리는 차후에 다룰 다음과 같은 제안들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주제를 더 깊이 묵상하면 할 수록,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온 교회의 상태를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기도라는 문제에 관하여 어디서든 철저히 각성해야 할 긴박한 필요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집회가 일반적으로 냉랭하고 황량하고 죽은 것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여기저기에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예외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령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우리의 기도집회가 몹시 침체되어 있다는 것과 그 원인을 심사숙고 해 보아야 할 절대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다음 호에 계속

 

(1990 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