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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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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8. 15:23 횃불/1990년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할 수 있을까요?(1)

-데이비드 뉴얼 -

며칠 전에 어떤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묘사하는 글인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책을 다시 읽다가 저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글에는 에드문드 고세(Edmund Gosse)의 어머니가 지녔던, 불굴의 전도 열정이 놀랍게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기차나 버스에 타기만 하면 이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거나 또는 예수님의 피가 인간의 죄를 씻어 주셨다는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애쓰지 않으실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열정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구원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장 중대한 소식을 세상에 전하라고 부탁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고후 5:20)이며,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이며, 어두운 데서 부름받아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왕같은 제사장들”(벧전 2:9)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주의 증인이 되어야 할 책임감을 어느 정도 인식하면서도 복음의 내용이나 이것을 전하는 방법에 관하여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만 복음의 골자만을 간략하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복음을 틀림 없이, 정확하게 전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은 사신(대사)에 대한 바울의 이미지(image)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1 8절이 엄숙한 말씀 가운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따라서 교회 통합운동 단체들이 사용하는 타협적이고 태평스러운 어휘들이나 화평이란 미명 아래 사용되는 관대한 말들은 피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직 하나님이 제시하신 조건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라면 바울이 그 조건들을 올바로 제시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생()과 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결코 실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약사의 처방이 조금만 변경될지라도 생명을 구하는 약이 치명적인 독으로 변할 수도 있듯이 하나님의 복음의 토대를 이루는 것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로버트 앤더슨 경은 어떤 군인장교를 해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가 법을 위반했으므로 나는 그를 해임시킨다. 그는 그저 읽기만해야 할 명령을 쉬운 말로 풀어 썼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특별 멧세지, 곧 반역하는 세상에게 주어진 평화안을 위탁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안전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스겔 33 2~9절은 이것을 잘 보여주는, 도전적이면서도 기억할만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멧세지이기 때문에 사용된 말씀들은 모두 중요합니다(고후 2:17, 고전 15:1~2).

오늘날 우리는 두 종류의 극단에서 야기되는 오류에 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다 뭔가를 더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구원을 확실히 받으려면 갈보리 십자가만으론 충분히 못하고 이것에다 성례전(聖禮典)이나 선행, 의식, 은사의 경험(이것은 소위 방언 등 초자연적인 경험을 가리킴 - 역주) 등을 보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2 8~9절의 말씀과 모순됩니다.

손 안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의 십자가만 붙드나이다.

반면에 또 어떤 인기 있는 전도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에서 뭔가를 빼버리고 있습니다. 이런 복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철저한 죄악성, 지옥의 존재 등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어떤 진리들을 결하고 있습니다. 세상 냄새를 더 풍기는 유흥을 종종 동반하기도 하는, 이런 매끄러운 복음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의미심장하게 상술(詳述)하는 구원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아주 경박하게 들립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이 그것을 전파할 때에는 자기가 진리를, 모든 진리를, 오직 진리만을다루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강단에 서 있을 때이든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이든지를 막론하고 우리는 어떤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로마서 5 1~11절에서 우리는 네 가지의 중요한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8) - 파멸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의 상태는 절망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연약하다(6). 우리는 경건치 못하다(6).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그러기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한다. 우리는 완전이라는, 하나님의 과녁을 훨씬 빗나가고 말았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없이 그릇간 죄인이다(8). 그리고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서 우리의 창조주와 불화 가운데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철저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조그만 실책이나 경미한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재난인 것입니다.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는 오직 구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3장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다 죄 아래 있다는 달갑지 않은 진리로 우리 의 급소를 타격하고 있습니다( 3:9).

 

[2] 진노(9) - 보응

이 엄숙한 단어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우주를 더럽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쏟아부으실 의로운 분노로서 복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지옥의 존재에 대하여 함구하거나 또는 그것을 경박하게 다룬다면 이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심판의 확실성을 말씀하시기 전에, 이 심판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시고 먼저 눈물을 흘리신( 19:41~44) 그 가장 위대한 전도자의 본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요한복음 3 16절에 언급된, “멸망치 않고라는 표현은 심판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렇다고 저를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갈보리에서 영광스럽게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라는 것과 우리는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충분히 음미될 수 없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기 전에( 5:8)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계시했습니다( 1:16~18, 2:5~6).

 

[3] 보혈(9) - 치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밖에 없습니다. “지옥는 인기없는 단어이지만 성경에는 이 단어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물론 이 피의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구약성경을 공부해야 하며, 로마서 5장의 문맥을 볼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정당하게 죄인을 용서해 주시도록 만드는 희생적인 죽음을 의미 합니다( 9:22). 그저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고만 전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우리는 그분이 왜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그분의 죽음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따라서 교리적인 설명도 역시 복음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영원토록 부를 우리의 찬양이 될 것입니다( 5:9)!

 

[4] 믿음(1)-책임

가인 이래로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이 믿음이란 한 단어로 분쇄되고 맙니다. 그 이유는 이 믿음이 인간의 노력을 용납하지 않으며,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도 용납하지 않으며 ( 3:5), 개혁이나 눈물이나 의식준수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심으로, 영원토록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믿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젊은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이 전하고 있는 멧세지를 주의깊게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그 진리에 철저히 헌신할 때 여러분은 그것을 나의 복음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딤후 2:8). - 다음 호에 계속 -

(199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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