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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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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8. 15:28 횃불/1990년

믿는 자들의 적(1)

존 슬라보

1. 세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지 얼마 안되는 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며, 그들은 자기 영혼의 적이 있으며 이제 그 적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받은 직후에 있었던 기쁨과 행복한 감정은 그러한 영혼의 적들과 싸움에서 패배를 겪고 나서 갑자기 좌절로 변할 대가 많습니다.

믿는 자의 싸움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원수와의 싸움이므로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처음에는 자기의 원수가 누구인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는 원수의 전략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가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마련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조로이 항해할 수 있으리라 하던 기대가 무너진 다음, 그가 다시 일어나서 영적 싸움에 임하기까지는 아마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글이 어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적이 누구이며, 또 그 적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하면 승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세 부류의 적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세상, 육신 그리고 마귀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이 세상이나 혹은 그들에게 미치는 육신의 영향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데서부터 위험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선 세상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사랑은 지금까지 그 어떤 주제보다도 더 많이 시나 혹은 소설의 주제가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또한 너무나 자주 그것을 무의미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왜곡되거나 격하되어 왔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때로는 욕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정확한 표현일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용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자신에 대하여 기록했던 요한은 신약 성경의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일서 2 15절에서, 그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여기에서 요한은 아버지와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명확하게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과 그의 서신서에서 똑같이 사랑그리고 세상이라는 헬라어 두 단어를 사용한 점을 주목해 볼만 합니다.

이 역설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세상(Kosmos)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를 세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서로 다른 이 세가지 의미는 요한복음 1 10절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세상(,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 계셨으며 세상(물질 세계)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세상 체계 또는 조직, the world system)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 세상의 체계를 사랑치 말라는 명령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

헬라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로써 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단어들은 모두 “Love”(사랑)라는 한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본래 그 각각의 단어들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사랑을 뜻합니다. 첫 번째는 에로틱”(erotic)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명사형 에로스(eros)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화답하는 사랑”(Love of response)을 뜻하는 필레오(phileo)입니다. 이것은 함께 나누는 사랑, 즉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에게 반응을 표하는 상호간의 사랑”(mutual love)입니다. 필레오는 형제들의 사랑”(the love of the brethren)을 뜻하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라는 지명(地名)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가족간의 사랑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세 번째로 사랑을 나타내는 명사는 아가페(agape)인데, 이 말은 어떠한 대상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무제한적으로 베푸는 관대한 사랑”(generous love) 혹은, “선택의 사랑”(love of choice)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실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하실 때, 그분은 이러한 선택의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이 세상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바로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영향

육신, 그리고 마귀와 더불어 세상은 믿는 자들의 최대의 적입니다 이것들은 각각 믿는 자의 내부로부터, 외부로부터, 흑은 기타 다른 교활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공격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대하여 관대하게 대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인격적인 연약함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 때문에 육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육신이나 세상에 대한 문제로 인하여 이처럼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마귀에 대한 어려움은 가장 적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인해 겪은 가장 큰 위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재미있는 예를, 우리는 개구리에 관한 한 실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뜨거운 물 속에 개구리를 갑자기 집어넣는다면 개구리는 놀라서 펄쩍 뛰며 뛰쳐나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은 다음 점차로 물을 데우면 개구리를 뜨거운 물 속에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물을 점차로 뜨겁게 하면 개구리의 근육은 힘을 잃게 되어 나중에는 못견딜 정도로 뜨거워져도 물에서 뛰쳐나올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도 악한 세상에 의해 이와 비슷한 함정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유혹을 만날 때 즉시 벗어나지 못한다면, 후에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믿는 자들과 교회(모임)들도 역시 정치, 교육, 오락 또는 사업 등의 세상에 속한 여러가지 면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이라는 말은 실제로 드러난 우리의 행동뿐만 아니라 태도까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는 육신적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따르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십시오!

 

세상을 이루는 요소들

이것은 요한일서 2 16절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세속화된 사회”(Vulgarization of society)에 대하여 암시해 줍니다. 또한 이 구절은 죄악이 관영했던 소돔성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이 세상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줍니다. 지금은 참으로 저속한 세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대의 가장 악한 행위는 본받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세상의 정욕이 은밀하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에 점차 무감각해져서 결국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정욕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가 부패된 것을 말합니다(벧후 1:4). 다시 말해서 식욕이나 수면욕, 성욕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점들에 있어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 술 취하는 것, 태만, 그리고 부도덕한 행실 등은 이러한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를 더럽히는 것이므로 언제나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일반적으로 사회의 세속화”(Secularization of Society)라고 표현할 수 있는 오늘날의 상태를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의 이러한 면에 대해서는 애굽을 통해 비춰볼 수 있으며, “여자(이브)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기록된 창세기 3 6절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일에 대해 지배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회입니다.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은 없다 하나이다”( 10:4). 책이나 TV같은 오늘날의 대중매체들은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대중매체들은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들에 대한 의견이나 인식에 있어서 상당한 일치를 만들어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하여 형성된 생각이나 태초에 의해서 잘못된 영향을 입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이 우리의 생각을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이라는 말씀은 사회의 양극화”(polarization of society)라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현상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만과 자랑이 특심했던 고대 바벨론 시대에도 있었으며, 또한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자랑(교만)은 장벽을 만들어냅니다. 여기에는 민족적인 교만, 즉 자신의 민족적인 배경이 다른 민족보다 더 낫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민족 내지는 인종적인 장벽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장벽은 없어지는 대신, 오히려 여성해방운동(Women’s Lib), 또는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경시하는 현세대 운동”(New generation)과 같이 대중적인 운동들에 의하여 더 높아져가기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종파나 교육의 장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랑(교만)은 세계 종교사회의 한 특징이며, 커다란 명성, 혹은 몇 년 전에 크게 유행했던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와 같은 프로그램의 제목 이면에 숨겨져 있습니다. 지식이나 직분, 그리고 은사에 대한 영적인 자랑(교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향

요한일서 2 15절은 세상의 영향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이 말씀의 문맥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다른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요일 3:10).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실제적인 또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어느 정도나 분리되어 있느냐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방해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6:24). 하나님 아버지와 이 세상은 똑같이 우리의 마음을 요구합니다. 믿는 자는 세상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마음 가운데 아버지의 사랑이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의 애정을 빼앗기면 이것은 결국 실망과 슬픔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무기력을 초래합니다. 어떤 성경은 로마서 12 2절을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번역했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자기의 틀에 밀어 넣지 않도록 하십시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종말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 세상에 관하여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요일 2:17).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잠시 뿐이며 일시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일시적인 세상의 모든 것에 비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은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우리의 생애를 투자해야 하겠습니까?

 

(1990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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