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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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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1. 11:32 횃불/1993년

영적 부흥(2)

O. J. 깁슨

 

이 글은 1992 8 8~10일까지 동대문 교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지면에 옮긴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성(蘇醒)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계신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소성과 부흥은 하나님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일 같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그저 통독하는 게 아니라, 설교를 듣는 것만이 아니라, 이 말씀을 여러분의 속에 한 부분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 반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19 25절을 보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조건을 우리가 들으면 부흥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는 회개입니다. 이것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하는 말씀의 뜻입니다. 여러분은 일시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기 만족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적 생활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회개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움직입니다. 이때 부흥이 가까이 오게 됩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 이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취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게 됩니다.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에게 변화를 갖다 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부흥되면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93절을 보시면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금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진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그 법도를 기억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자기에게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에서 이 즐거움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109절입니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여기 이 경우는 고난을 통해서 각성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고난이 여러분에게 임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큰 어려움을 당함으로 부흥되기를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면 하나님께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전 1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엄중한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징계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하지만 굳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징계하심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149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부흥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루나 이틀이나 삼일동안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부흥을 원한다면 계속적으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흥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계속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무엇을 원할 때는 이 애들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의 등을 두드리면서 계속 달라고 합니다. 한국 아이들도 그렇게 하나요? 왜 그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똑똑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효과가 있는걸 아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안주면 와서 계속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면 효과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두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두가지 비유는 우리에게 똑 같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권하는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부흥이 오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쉬지 못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기도하면서 여러분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계속적인 기도를 통해 그것을 입증하시기를 바랍니다.

154절입니다.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156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하소서.”

159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기자가 몇 번이나 이렇게 소성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여러분이 주목해 보시 기 바랍니다. 분명하게 소성시켜달라고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이 시편 기자는 주님과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탕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 앞에 가까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놀라운 119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176절이나 되는 이 시를 쓴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의하면 시편 119편은 알파벳 순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백성이 이 부흥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능력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영적인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연약에 특징이 있지 강건함에 특징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복음적인 교회들 안에는 능력 보다는 약함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교회의 연약함에 대해 마치 물을 땅바닥에 버린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가운데 명목상 교인들이 가장 많은 때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주위의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때가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게 될 때 여러분들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명기 32 36절에 흥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이 없어진 것을 보십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과 같이 우리는 능력을 상실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대한 존경심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국가 지도자들에게서 불미스런 일들을 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에게서 위선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삶이 다른 점이 없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대책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조처를 취하기를 원하느냐 입니다.

 

이사야서 57 15절을 보십시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

부흥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님에 대한 높은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되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좋지 못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낮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높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존무상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영원하시며 높은 곳에 거하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높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높은 것을 보게 될 때 우리의 죄악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과 우리자신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우리 자신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교제할 때에, 그 교제는 거룩한 교제여야만 됩니다. 우리는 이 거룩의 높은 표준에 와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상태가 이 거룩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영혼의 상태를 보고 통회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통회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의 기도하는 사람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회개하는 죄인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높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압니다. 이러한 사람은 내가 주님의 상의 부스러기도 먹기에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주의 발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자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있기를 원하시면 겸손한 자가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만으로부터 도망가기를 마치 독사로부터 도망가는 것처럼 도망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부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 44 3절을 보면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한 자에게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육신적인 갈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물에 대해서 목말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을 때는 이러한 깊은 갈망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더불어 더욱 가까이 걷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위치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저에게 세상에 무서운 것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 제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저는 그 사람에게 저도 무서워하는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무서워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노하게 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 27절에 보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년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 무자격자로 발견될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저도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복음을 전할 때에 내 입술이 진흙이 될까 봐, 내 삶과 내 사역에 영향력이 없을까 봐, 내 기도에 효과가 없을까 봐, 말씀에 기쁨이 없을까 봐, 저는 그런 사람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제가 주님 앞에 가까이 갈수록 저는 이러한 것을 더 느낍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성경에도 그와 같은 일이 나와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알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과 가까이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그것은 비극입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평범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제 마음에서 그것을 보시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어느 날엔가 주님께로부터 저의 삶이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백보좌 심판에서 오는 정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가는 심판대입니다. 여러분의 삶과 사역(봉사)에 대한 심판대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축복에 비례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 주님 앞에 나는 많이 바치지 못했는데····” “! 나는 주님께 많이 받지 않았는데····그러나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남에게 나눌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석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사용해야 되며 발전시켜야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이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또 시간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생명을 연장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새로운 해를 달라고 기도하지만 마지막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하나님나라에서 잃은 것이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10%의 사람들만이 교회의 90%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마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나아가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여러분이 평가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헐어버린 이 제단을 다시 쌓아야 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제단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제단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제단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제단은 하나님과 만나는 곳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매일같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약속한 그 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사람의 얼굴을 보기 전에 주님의 얼굴을 먼저 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십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하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제단은 헐어진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제단을 다시 쌓아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그와 같은 제단이 다시 지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과 매일 같이 열매가 풍성한 가까운 교제를 하지 않는 사람과 저는 함께 일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가 그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그런 사람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만나는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면 절대로 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일주일에 한번의 설교만 듣고서 일주일을 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시간을 다 빼앗아가는 그 모든 것, 여러분이 염려하는 그 모든 것, 영원한 중요성이 없는데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그 모든 것,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필요한 것을 내가 다 돌봐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너의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나에게 관계된 것을 먼저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해 주겠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에 기준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부흥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원하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대해서 내 삶을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삶에 대하여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해서 죽은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교회당에 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가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나의 제자가 될 수가 없다.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같이 주님을 따르지 않는 제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셔서 깊은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쉬지 못하시게 하기 바랍니다. 하늘나라의 문을 항상 두드리시기 바랍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 주님! 저를 소성시켜 주십시오. 주님의 능력이! 주님의 힘이! 주님의 생명이! 주님의 축복이 제 안에 임하도록,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제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아멘.” 

 

(1993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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