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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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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2. 01:13 횃불/2001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이 현 웅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은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세우시며 주셨던 말씀이다( 1:7).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상기시키는 것은 간혹 개인과 교회에 갈등과 어려움을 가져다 주고 있는 율법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나게 된 치우침 현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율법주의가 한국교계의 과거의 치우침의 문제였다면 이에 반발한 신앙현상은 오늘의 개인과 교회들을 신앙의 정도(正道)에서 치우치게 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치우침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혹자들이 이 현상을 무법주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이것이 얼마나 많은 개인과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는 가도 알고 있다.

 

1. 율법주의로 인한 치우침

그러면 이 치우침의 현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율법주의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자.

혹자는 율법주의가 하나의 치우침 현상이라 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율법은 거룩한 것이며 의롭고 선하며 신령한 것이다( 7:12,14).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하자도 없다. 왜냐 하면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 있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은 율법주의가 문제이다. 곧 인간의 구원의 길을 율법준수에 두고 있는 율법주의 말이다.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하며 구약만이 유일한 정경이며 율법준수가 구원의 길이라 믿는 유대교와, 그리스도를 믿되 율법 준수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갈라디아주의가 바로 이와 같은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유형이다. 한국의 기독교계가 이같은 갈라디아주의에 빠져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 준수로 인해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다( 3:20, 2:16).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성경주의가 아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유를 오해한데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며( 3:24),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이 증거 해주고 있다( 3:20). 곧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라든지( 2:16~19),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7:4). 그러나 현재도 많은 교인들이 여전히 율법주의적 가르침 아래 있으며 이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면서도 율법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을 하고 있다. 이들은 믿는 자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유함을 누리기보다는 늘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며 자신을 정죄하며 반복되는 회개와 거룩한 삶을 살려는 애씀의 얽매임 가운데 있다. 이들에게는 진리로 인한 자유나( 8:32),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가 없다는 말씀이나( 8:1),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 2:8) 같은 말씀이 자신의 것으로 경험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와 같은 말씀들을 듣고 배워 알고 있고 그래서 입술로 고백은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마음으로 정말 그렇다고 화답을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말씀이 자신에게 합당한 말씀이라 여겨지며 화답이 된다.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지금까지 한국교계의 치우침 현상의 하나인 율법주의의 문제이며 이것으로 인한 폐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온전하지 못한 구속으로 받아들여 결국 십자가의 구속을 부정하게 만든다.

 

2. 율법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또 다른 치우침 현상

또 다른 치우침 현상은 결국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현상이다. 그러므로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율법주의적인 것들을 거부하며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들을 추구하는 현상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 반발현상을 우려하여 이렇게 경고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5:13).

결국 이 반발현상은 성도가 얻은 율법에서의 자유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율법주의가 율법을 주신 이유를 오해한데서 생겨난 것이라면 또 다른 치우침 현상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난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가 문제가 아니라 자유를 주신 목적을 오해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게 하려 하셔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위의 말씀이 알려 주고 있다. 자유는 매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자에게 다시 종노릇을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자유와 종노릇은 얼마나 상반된 개념의 단어인가?

자유를 주신 목적 중 하나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데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로 그저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주님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여기는 치우침에 빠져 있다. 물론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틀림없이 주셨다.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에게로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7:4).

이 말씀은 율법에 대한 자유를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다는 말씀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죽음은 그 전에 매었던 모든 것에서 자유를 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율법에 대한 확실한 자유를 선사하셨다. 그러나 이는 이제 다른 이 곧 부활하신 주님께로 와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라고 자유를 주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곧 율법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셔서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에는 없는데 다만 율법의 강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생애를 불태웠던 것도 율법의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고후 5:13,14).

지독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후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육체대로 살지도 아니했다. 오히려 그가 고백한 것처럼 주님께 매여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마음의 평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주하시는 주님의 평강을 위해서 살았던 것이다( 3:15).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후에도 주님의 사랑과 영혼들로 인한 심령의 매임 가운데 살았다( 20:22).

그러므로 성도들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이후에 결코 율법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처럼 주님께로 가서 주님을 위해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유하다 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자신의 마음의 평강이나 기분 내키는 대로 살면서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는 것이라는 치우침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 이 땅에서 높음과 같이 다르므로 때로는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 하며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어찌 주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살 수 있겠는가?

사람의 본성은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기를 원하고, 남을 나보다 나은 자로 여기기 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로 여김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자기 마음의 평화(자기 기분)를 좇아서 사는 것은 결코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치우침 현상에 빠진 것뿐이다.

성경은 또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외에 또 다른 자유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도 바로 이해하게 될 때에 이 치우침 현상에 대한 바른 분별을 같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8:32에서 주님께서 이 자유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에서 이 자유는 진리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데 36절에서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유를 주시는 진리가 바로 주님 자신이심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여기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어디서부터의 자유인가?

34절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여기서 자유는 죄의 종노릇으로부터의 자유를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주신 자유는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서 죄로부터의 자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님의 보혈로 인한 죄 사함으로만 국한을 시키고 마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이것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주님의 보혈은 우리의 범죄들에 대한 값을 영원히 대속해 주셔서 죄책으로부터 자유를 주셨다( 9:12).

그러나 이 범죄들의 뿌리가 되는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케 되는가?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 5:19)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죄라고 정의 내릴 수 있게 되는데 이 불순종은 곧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죄의 종이라는 말의 의미는 자기의 종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인생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기 전에 모두 자기에게만 매여서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살지 않으며 오직 자기 기분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또한 자기 뜻을 이루려는 인생만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신앙조차도 자기 뜻을 이루려는 방편으로 삼거나, 신앙생활조차도 자기 기분대로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들은 비록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여기며 또 자신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오히려 자기에게 매이는 삶이며 죄로부터 자유케 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자유를 빙자해서 이와 같은 삶을 산다면 지금까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본대로 이것은 죄로 인해서 우리 안에 형성되어진 육체대로 사는 삶이고 주님이 주신 자유를 헛되게 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곧 또 다른 치우침 현상에 빠져 있는 삶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8:2).

죄책에 대한 해결책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있음과 같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결책이 생명의 성령의 능력()에 있음을 위의 말씀이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죄로부터 자유하는 길은 성령님께 매여 사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3. 율법주의에 반발한 또 다른 치우침 현상의 구체적인 문제점

문제는 이것이 정상적인(성경적인) 신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 현상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으며 그 숫자가 점점 불어나서 이제는 세력을 형성하였고 심지어는 자신들과 분별을 같이 하는 자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치우침 현상의 주요 가르침과 교제는 자유하라”, “누려라가 주류를 이루며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은 주님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율법주의자, 혹은 외식주의자로 낙인을 찍어 버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에 주님이 주신 자유가 무엇인지를 오해한데서 나타나는 치우침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분별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이것은 오히려 육체대로 사는 것이며 세상에 매여 사는 것이며 주님이 주신 자유를 헛되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치우침 현상은 율법주의의 반발로 생겨난 것이므로 이 현상에 빠진 이들은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것을 가장 싫어하게 되어 있다. 이는 공산주의자가 된 지주의 아들이 부르조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이 현상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식 중심의 율법주의에 식상한 이들이 주로 빠져들게 되기 때문에 이들의 모임은 지나치게 자유스럽고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임을 만들어야 하지만 이들에게는 성경의 진리보다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 그리고 자유를 누림이 더 큰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떤 형식과 의식이 배제된 자유스럽고 친밀한 교제 모임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지도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권위와 위엄의 옷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연약함이나 범죄를 내려놓게 된다. 이쯤 되면 이제 마음에 자유를 얻는 멤버들이 너도나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삶을 개방하는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길거리에서 혼자 옷을 벗고 있으면 부자연스럽고 부끄럽지만, 모두가 벗고 있는 목욕탕에서는 벗는 것이 자연스럽고 부끄럽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현상에 빠져들게 되면 분위기상 자신의 부끄러움도 자연스럽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현상에 빠진 이들의 문제 중의 하나는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다른 이들에게나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내려놓는다.

물론 요한일서 1:9에서 자백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고, 잠언 28:13에서는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죄를 숨기고 자백치 않는 것은 성도에게 합당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죄를 숨기거나 변명해서는 안되며 드러내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자백을 하는데 있어서도 죄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이 있어야 그 자백이 진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범죄 후 자신의 죄를 자백한 시이다. 특별히 17절에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시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고 했는데 이는 자백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말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바로 자백하는 다윗의 마음임을 보여 주고 있으며 자백하는 마음의 태도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백할 때 평상시와 다른 목소리, 즉 슬픈 목소리로 또는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한다는 외식을 교훈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이 분위기에 편승해서 부끄러운 범죄를 지나치게 자세히 자백을 하는 것은 마치 아무 데서나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누드모델이나 아무 앞에서나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 매춘의 행위와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지금부터 약 20여년 전에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한 책이 있었다. 이 책은 부와 명예를 위해서 진실을 저버린 채 허위와 가식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를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빗대서 통렬하게 비판한 내용들이었으며, 또한 저자는 이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식과 위선의 옷을 벗기려고 자신의 옷을 다 벗어버린다. 곧 자신의 치부들을 스스럼없이 글로 대중 앞에 드러내 버린 것이다.

물론 우리의 믿음의 대 선배이신 사도 바울께서도 휘황찬란한 가식의 옷 속에 숨겨진,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어진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글로 드러내었다. 그는 유대 사회의 존경받은 지도자였던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다(딤전 1:15). 이렇게 회개, 혹은 자백은 죄를 숨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고백은 다른 이들에게서 동일한 고백을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결코 자신의 위인 됨이나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음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삶을 나눈다든지 투명한 교제를 한다는 명목으로 부끄럼 없이, 쓸데없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어 상대방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연약함과 범죄의 자백도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며 그분에게 영광이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이와 같은 무분별한 교제가 그리스도가 빠진 애정행각으로 변해 버려서 성도 개인과 교회에 문제로 되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와 같이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또 다른 치우침 현상은 율법주의 못지 않은 폐해를 성도 개인과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끼치고 있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누림을 바로 알자

이제는 분명히 하여야겠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누려지는가를····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부터, 자신으로부터, 세상(사탄)의 매임으로부터 주님의 몸으로 자유를 주셨고 여기로부터 이제 자유케 되어진 자들로 주님을 위해서, 다른 이를 위해서 사는 삶으로 이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원하신다( 5:13).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기편의주의적인 삶에 매여 살면서 이것이 주님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하고 싶으면 한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셨지만 하기 싫어서 안 하고, 기분이 나쁘면 안 하는 고집스럽고 방종하는 삶을 자유하는 삶이라 착각하고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라고 하셨지만 자기 마음 편한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며 산다. 이러한 경향은 개인의 신앙을 좀먹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또 다른 치우침 현상일 뿐이며 결코 주님 주신 자유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죄악된 삶이다.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은 자유하다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가당찮은 일인가? 이는 마치 남편과 사별한 과부가 이제는 남편의 죽음으로 얻은 자유를 누려야겠다며 이 남자, 저 남자와 마음에 내키는 대로 잠자리를 하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를 어찌 자유라 하겠는가? 이것은 음행하는 범죄이며 방탕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5:20).

지금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논한 참된 자유와 누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성도에게 율법과 죄와 세상에 대해서 자유를 주셨다. 곧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가지셨으며 그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결코 율법으로 돌아가거나 죄에 매이거나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며 주님께 매이며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자유이며 자유를 누리는 참된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율법)를 매지 마라”( 5:1).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5:18).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그러므로 진리를 옳게 분별하며 기록되어진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므로 치우치지 아니한 정도를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걸어야 하겠다. 혹 잘못 분별하여 치우친 길을 걷고 있었다면 즉시 자백하고 바른 길로 돌아와 근심하며, 기다리시는 주님과 성도들에게 기쁨을 드려야 하겠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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