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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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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구스타프슨

히브리서: “부지런히 살펴 …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히 12:15). 다수결로 어떤 것을 결정하는 것, 심지어 새로운 홀을 지을 장소와 같은 세속적인 것조차도 때로는 씁쓸함을 자아낼 수 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히 6:10). 히브리서 저자는 형제애에 대해 칭찬하면서도 “형제의 사랑을 지속하고”(히 13:1)라고 썼다. 그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막지 않는다면 그것은 계속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야고보서: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화평하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이 없고 위선이 없나니”(약 3:17). 우리는 그것이 먼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타협을 조장할 것이다. 우선 순결하지만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순결함과 일치하여 가능한 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일곱 번째 복에서 동일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이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요”(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복을 받는 유일한 화평은 앞 구절과 일치한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마 5:8). 모임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만장일치로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는 그 지혜에 대한 같은 근원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약 4:11). “형제들아, 서로 불평하지 말라”(약 5:9). 형제라는 단어를 알아보는 것은 이 두 구절을 준수하는데 도움이 되고 우리가 한 마음에 더 쉽게 다가갈 것이다.

 

베드로전서: “끝으로 너희는 다 한마음이 되어 서로를 동정하며 형제로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예의 바르게 행하라”(벧전 3:8).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고 프랭크 녹스는 강철 막대에 열을 가하는 대장장이를 말하면서 이 구절을 묘사했다. 대장장이가 막대기를 흑열로 가열하면서 만지면 손가락에 화상을 입지만 흑열로 구부릴 수는 없다. 만약 그가 그것을 구부리고 싶다면, 그는 그것을 붉은 열로 가열해야 하며 그가 원하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구부릴 수 있다. 다른 막대에 용접하려면 붉은 열로 용접을 할 수 없다. 그는 그것을 백열로 가열해야 한다. 우리가 함께 결합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후서: 믿음에 추가할 마지막 두 가지는 형제간의 친절과 사랑이다. “그런즉 이 모든 것이 해체될진대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모든 거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벧후 3:11).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벧후 3:18).

 

요한일서: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었나니”(요일 2:5).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요일 3:14). “그러나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그를 피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일 4: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 아나니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요일 5:2-3).

 

요한이서: 우리는 처음 네 구절에는 진리가 다섯 번 있고, 처음 여섯 구절에서는 사랑이 네 번 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걷는 것은 우리가 서로 잘 지내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따라 걷는 것이요”(요이 1:6).

 

요한삼서: 가이오가 교제하고 있던 모임은 으뜸되기를 좋아하고 행실이 나쁜 디오드레베 때문에 슬픈 상태에 있었다. 요한이 가이오에게 편지를 써서 데메드리오를 비롯한 다른 좋은 형제들과 함께 모여 또 다른 모임을 시작하자고 하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모든 모임이 만장일치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들은 동료 한 사람 때문에 행동이나 결정을 영원히 보류할 의무는 없다. 모임은 같은 판단에 도달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주어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복수를 하는 소수자의 다스림이 될 것이다!

 

유다서: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3절) 배교하는 날에도 성도들마다 성령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너희 자신을 지키며”(21절)라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게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 예수님께서 항상 책망하기 전에 칭찬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책망이 필요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실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조금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계 2:4). 우리에게 첫사랑이 있거나, 빌라델피아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조건이 있다면(계 3:7-12) 우리는 더욱 쉽게 만장일치로 다가갈 것이다.

 

G.H. 랭은 이렇게 썼다. “이 계획이 정말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한가지 질문이 있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인가?” 만약 성경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가능하다. 손 마른 사람이 그것을 펴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주께서 그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니,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졌다. 이는 권능에 관한 문제가 명령을 내리신 주님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 질문과 다른 그분의 모든 계명도 마찬가지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