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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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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6. 10:03 빛 가운데로 걸으며

그리스도인의 특권

(에베소서 1:1~3)

H. A. 아이언사이드

하나님의 말씀은 불필요한 부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책을 쓸 때 질이나 양에 있어서 그 내용을 부풀리기를 잘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습니다(12:6). 그러므로 거기에 사용된 모든 용어와 표현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에베소서는 어떤 주제가 분명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이 서신은 그리스도의 지체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의 특권과 책임이라는 진리로 가득합니다. 에베소서는 신자로서의 우리의 신분(부활하여 높아져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있는)에 대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에베소서를 우리의 목적에 따라 단순하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처음 세 장은 교리적인 내용을, 나중 세 장은 실천적인 내용을 보여 줍니다. 첫 부분은 우리의 기업을 제시하며, 나중 부분은 그런 풍성한 축복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할 삶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순서입니다. 즉 먼저 진리로 가르침을 받고 그 후에 진리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우리는 곧바로 이 서신을 기록한 바울이라는 이름을 접하게 됩니다(1). 신약에 나오는 13개의 서신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서신(히브리서)도 분명 바울이 기록했다고 믿지만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단어로 시작됩니다.

어떻게 해서 그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본래 그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의 본명은 사울입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 또 그 이름은 이스라엘의 첫째 왕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그 왕도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여러 해 동안 그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바리새인이었고 자기의 족보와 자기의 종교와 자기 개인의 경건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후 그는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당신도 주님과 이런 만남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바리새인인 사울을 겸손하고 낮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시킨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곧바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구브로에서 서기오 바울을 회심시킨 후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듯합니다.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으로, 한 때 자신을 큰 자로 여겼던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3:7,8).

사울은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모든 것을,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3:8)로 만족했습니다. 그에게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나는 어느 캠프에 참석해서 다음과 같은 흑인 민요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가장 빨리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것이며

가장 빨리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것이네.

그대여, 높이 오를 수 있으니,

오르라, 오르라.

그러나 가장 빨리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것이네.

우리는 이 진리를 배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요? 우리는 무엇인가 되려고 하지만 이 진리는 잊어버리고 삽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5).

왕실 가문의 사울이 구주의 발에 입을 맞추며 작은 자 바울이 되었을 때 그는 복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습니다. 사도란, 사자 또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다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특별한 사명을 받아 세상에 보내져 교회를 통해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사도라는 말이 사용될 때는 좀 더 고차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바울은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 26:16).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없이 말합니다. 그 까닭은 사본들을 복사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신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유다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는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이름입니다. 그분은 부활을 통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이 땅에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신 예수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분을 그렇게 알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분을 처음 본 것은 영광 중에 계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그 광경에 너무나 감동되어 그분에 대하여 영광의 모습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에서 일정하게 그리스도 예수라고 쓴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영광의 복음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불려집니다. 다른 제자들은 지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동행했습니다. 그래서 지상에 계시던 주님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자였습니다. 그를 보냈다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생애를 가장 보람있게 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그를 구원하신 분이 그에게 사명을 주셨고, 그분이 친히 신앙과 진리로 이방인을 가르치라고 그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사명의 성격이 신적임을 주장합니다.

어떤 순진한 구두 수선공이 비교적 엄격한 사역자에게 소개되었는데, 그 구두 수선공이 저는 형제님의 성함을 알지 못하는데요라고 하자, 그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꾼이 된 블랜크라고 말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구두 수선공이 된 존 도(Jone Doe)입니다. 형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뤄진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당신은 복음전도자입니까? 그것은 당신을 강권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당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업가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돈을 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사업가가 되었고, 또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하는 곳에 당신은 있어야 하며, 또한 그분께 대하여 신실한 삶을 살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 부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에게 이 글을 썼습니다. 성도들이라는 단어는 모든 믿는 자들로, 신실한 자들은 어떤 영적 공동체를 포함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성도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입니다. 당신은 성도입니까? 당신은 이렇게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있습니다.

성도란,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구별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대는 나의 아들을 믿는가? 그를 신뢰하는가? 그렇다면 너를 성도로 삼겠다. 성도의 삶을 살기를 힘쓰라.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통해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다운 삶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사도의 인사를 보게 됩니다. 그는 지금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2:8,9).

이런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나오지만 그분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분명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르는 수많은 찬송가들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전적으로 성경적인 찬송들을 찾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어떤 집회에 참석하여 내주하시는 성령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말씀이 끝난 후 사회자가 일어나서 이 놀라운 설교를 생각하며 신실한 인도자 성령께서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고 주님을 찬양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는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다는 사실을 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1시간 이상이나 애를 썼지만 그것을 모르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는 이런 내용의 노래를 부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속과 성경이 얼마나 혼합되어 있는지요. 나는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왜 이렇게 느슨하게 붙잡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구절에서 사도는 우리를 구원하는 은혜가 아니라, 우리를 지키고 보존하는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자라는 신분은 이미 영원히 확정적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매일의 시련에 대한 매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은혜를 얻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 15,16).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고 은혜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과 또 우리 본성의 죄악된 성향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생길의 모든 걸음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속에는 아직도 옛 성품이 남아 있으며 또 그것이 정복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로 대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쉽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이것은 갈보리의 보혈로써 우리에게 이루어진 하나님과의(with) 평화가 아닙니다. 주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5:1).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of) 평강, 즉 우리가 하늘에 있는 집을 향해 가면서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평강,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의 마음으로 충만케 하는 평강입니다.

여기서 캐롤(W. I. Carroll) 박사의 예화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제자들에게 다른 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었습니까? 다른 편입니다. 그들이 배에 타고 있을 때, 그분은 완전한 평화 속에서 잠이 드셨습니다. 한밤이 되어 폭풍이 일어나서 마귀가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주님이 물에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조종하시는 배가 침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버려두시나이까?

잠에서 깨어난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폭풍이 일어나며 바닷물이 흉흉하게 뛰놀 때, 이처럼 겁을 내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로 가서 빠져 죽자고 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해야만 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주님께서 가지셨던 그 평화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길의 시련이 때때로 당신의 영혼을 시험합니까? 장래가 어떻게 될지 염려가 됩니까? 그러나 만약 최악의 상황이 되어 죽게 되더라도 당신은 하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으며 또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면,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은 본향 집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 잡혀 있음을 알게 될 때, 요새와 같은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모든 의심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당신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좇아라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복되신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를 알게 하십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8:15,16). 이것은 현대주의자의 하나님, 만인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전 인류의 형제 됨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사도가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는 성도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한 것은 성도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 즉 거듭남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이 복된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중생하지 않는 자는 육신에 속한 자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8:44).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주님은 만인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인류의 형제 됨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형제이며 모두 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도와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중생을 통하는 길뿐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주님에게 그분의 완전한 이름인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시기를 성령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그분은 만유의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분께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3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에베소서에 대한 연구를 올바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고, 이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유지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주님은 그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우러러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 속에 얼마나 풍성한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습니까! 주님은 이 복된 관계를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20: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하나님과 연합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셔서 은혜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드님이셨습니다.

이 편지에는 두 번의 기도가 있는데, 하나는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다른 하나는 3장에 있습니다. 이것들은 이 주제와 매우 잘 어울립니다.

1 17절에서는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이라고 기도하며, 3 14절에서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기도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왜 서로 다를까요? 그것은 첫 번째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자신이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기도에서 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놀라우리만큼 정확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분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사도는 우리가 천국에서 얻게 될 그 무엇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영적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내게 두 번째 축복을 가졌느냐고 묻습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 번째 축복이라고요? 만약 경험을 말하라면 나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속받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모든 축복을 나는 다 얻은 셈입니다.

그분은 지금 조금 주시고, 나중에 조금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모두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 누립니다. 축복을 받는 것과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별개입니다.

최근에 나는 몬타나에 사는 어떤 사람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영국의 한 귀족이 죽었는데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유산은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상속되어야만 했습니다. 먼 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그 친척을 사람들이 찾아가서 그 유산이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당시 그는 겨우 끼니를 이어갈 만큼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굉장한 일이 벌어졌지만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 언젠가는 도움이 될만한 재산이 생겼으니 잘 됐구먼 하고 말만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시내로 가서 그의 재산을 믿고 새 양복을 맞추고 비행기표를 사서 영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기자와 이야기한 내용을 나는 읽었습니다. 기자들이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나의 재산을 가지러 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이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부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 축복들을 믿음으로 얼마나 소유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은 그렇지만 지금 우리의 것이 된 그 내용들을 말해 보십시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의 옷을 입히시고, 하늘의 시민권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나 외로이 허우적거리고 있으며 근근히 목숨을 부지하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늘에 속한이라는 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복은 저 하늘에 속한 것이며 그분은 우리를 하늘의 시민으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풍성한 영광의 자원들을 하늘로부터 얻어서 이 땅에서도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지날 동안 우리는 매일 매일의 승리자 이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이 문장을 그리스도와 더불어라고 오역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이것을 잘못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표로 거기에 계시며, 이것은 우리와 더불어 앉아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즐겁고 행복한 영적 만남을 실제로 가져야만 비로소 우리가 복된 사람이며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게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가 좋은 집회를 갖고 또 그것이 유익했다고 생각될 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주님, 오늘 아침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 보좌에 함께 앉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형제는 아직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속에 만족감이 있고 또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삶의 시련을 만날 때에나 또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이뤄질 때에나 나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며,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보십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았고 하늘의 모든 보화는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땅에서 그분을 섬기면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 나는 그 보화들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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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