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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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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함

잭 해이

여러분은 다시 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말씀으로 저희들을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밤에는 사도행전 20장으로 가시겠습니다. 17~27절까지입니다.

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8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 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우리는 신약성경을 보면 에베소에 바울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장에서 간단하게 바울이 에베소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9장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떻게 모임을 이루었는가를 보았습니다. 20장에서는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7절에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사람들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까지 수십키로를 여행을 했습니다. 그의 동행들은 바다로 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보로 걸어서 다녔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과만 있어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바울이 해야 할 말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장로들에게 말해야 함과 동시에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주님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문을 닫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할 것을 제가 권면을 드립니다. 특히 큰 일을 한 후에 주님과만 시간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래서 바울은 도보로 걸으면서 주님과만 시간을 가졌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부른 것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에 있는 복수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다른 성경도 그러합니다. 에베소에 복수장로가 있었는데 빌립보에도 복수장로가 있었습니다. 바울을 빌립보에 편지하면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라고 복수로 표현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감독들이 복수가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 1절에 보면 베드로는 장로들에게라고 썼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있는 장로들을 알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도 같은 진리가 있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수고하는 이를 알고 할 때 장로들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수입니다. 지역교회 장로가 구체적으로 몇 명인지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독이 복수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장로와 감독은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장로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8절에 보게 되면 감독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같은 사람을 두가지 측면으로 서술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장로라는 말은 영적으로 특별히 성숙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로 자격 중에 새로 입교한 자도 말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원받은 지 얼마 안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성장해갈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는 영적으로 성숙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감독은 그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독과 장로가 동일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전서 5장에서도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장로들에게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양들을 치되(감독하되)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붓에서 장로와 감독을 동시에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디도서 1장에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도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장로(감독) 일을 하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경적이지 않은 한 그룹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다른 성경에서도 서술하고 있는데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말에는 목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만) 이것은 평범한 그리스말로 목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머리 속에는 목사라고 하면 어떤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원 말은 돌보는 목자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 대해서 다양한 표현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양무리를 치되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라고 했습니다. 이 세가지 용어는 동일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장로는 영적으로 성숙함을 가리키고, 감독은 책임과 돌봄으로 감독하는 것을 가리키고, 목자는 양들을 돌보며 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이 메시지가 둘로 나뉘어집니다. 27절에서는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28절 이하는 책임을 어떻게 해야 될지를 말하고 바울은 떠납니다. 여기서는 장로들에게 두가지 영역으로 말씀이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에베소에서의 바울 자신의 경험을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이것을 우리 각자의 실제 생활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모본을 가지고 섬겼습니까? 그는 내가 너희 가운데 어떻게 들어간 것을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8절에서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공휴일 날에 전도하러 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가서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는 것은 좋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섬길 때 열심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는 길을 그가 즉위한 원년 정월 달에 하나님의 성전의 문을 열고 성전을 청소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보통 왕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동일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해야 될 일을 다음으로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문제가 바로 학개 시대의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제쳐두고 자기 집 일에 바빴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사용할 물건들을 자기 집을 짓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판벽한 집에 거하면서 성전은 황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특권을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연기하지 맙시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바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항상이라는 말 속에는 지속적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시만 열심히 섬기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물러갑니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할 일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여러 부분에 지속적이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베드로 같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이방인 형제들과 음식을 먹고 있다가 유대인 형제들이 오니까 물러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형제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행동에 지속성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것을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행동을 합리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속적으로 계속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지속적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24장에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아꼈습니다. 또한 26장에서도 죽일 수 있었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고 아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25장을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사람에 대해서는 태도를 달리했습니다. 엘리야도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갈멜산에 올라갈 때는 그는 용감했습니다. 다른 장에서 보면 그는 실망해서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섬김이 지속성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상승되었다가 하강되는 것을 인정합니다. 어떤 경우는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지속적이기를 권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 가운데 있을 때 지속적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그는 지속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헌신적이었습니다. 19절에 보면 주를 섬긴 것과라고 했습니다. 그가 주를 섬긴 것은 그냥 섬긴 것이 아니라 종처럼 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자라는 것을 바울 자신은 깨달았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기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여러분을 건졌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이후에 바울은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바로 그 순간부터 주로 시인을 했습니다. 그는 주로 시인하면서 바로 주님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때때로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이기 때문에 자기 몸을 산 제사로 드렸을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보통 믿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특별한 믿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에 예사로운 그런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1장에 보면 그들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라고 했습니다. 새롭게 믿는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동일한 태도를 갖기를 제가 격려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전 생애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하실 일을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종은 그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가운데서 그는 주를 섬겼다고 했습니다. 그는 19절에서 모든 겸손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겸손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은 지식적으로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학파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에 있는 지역교회들을 유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에서 바울이 엄청난 일을 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서술할 때에는 겸손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잠언에 보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자 7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교만한 자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망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교만이 분명하다면 여러분의 넘어짐도 분명합니다. 이런 놀라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겸손하게 주를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용감하게 섬겼습니다. 그는 시험을 참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끈질기게 바울을 추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눈물로 참으면서 계속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용감하기도 하고 부드러운 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의 눈물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힘이 듭니다. 우리는 때때로 비판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잡을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잡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은 아주 엄격한 분처럼 보입니다. 그가 말을 계속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아주 마음이 굳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를 보면 내가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다라고 했습니다. 엄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분이 많은 눈물을 가지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쓰면서 그 눈물이 편지를 적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룰 때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좋습니다. 또 뒤에 보면 내가 3년 동안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했습니다. 잘못된 일을 고치는 일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일을 할 때 눈물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용감한 분이었지만 또한 부드러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는 언제든지 지속적이었습니다. 그는 주의 종으로서 헌신적이었습니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용감했으며 그리고 참았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왜 그렇게 섬겼는지를 보고했습니다.

20절에 보면 유익한 것은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이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가치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유익하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익한 것은 이라는 말을 주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사용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가야바도 그러한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분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돈을 가지고 쾌락을 추구하면서 그 돈을 쓰고 있습니다. 이 쾌락은 절대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 물을 마신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결코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나에게 만족을 주었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가야바는 선지자처럼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사실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립니다. 유익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는 뒤로 물러가지 않고 유익한 것은 가르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 전부를 가르쳤습니다. 말씀 전체를 가르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시험을 참으면서 유익한 것을 다 가르쳤습니다. 그는 어떻게 섬겼는지 왜 섬겼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어디서 섬겼는지를 보겠습니다.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라고 장소를 말했습니다. 공적인 사역도 했고 개인적인 사역도 했습니다. 우리는 공적인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모여서 많은 사람 앞에서 전할 수도 있습니다. 공적으로 전할 때도 때때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전할 때는 집집으로 다니면서 전하게 됩니다. 어떤 가정은 그리스도께로 가는데 유익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마태는 자기 집에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거기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마태의 집에 모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은 주님께로 인도하는 도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루디아도 자기 집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집은 진리의 기초를 가르치는데도 쓰임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중 앞에서도 전했고 각 집에서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공적인 면과 개인적인 면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이디오피아 내시가 개인의 전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공적인 집회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그 사이에 낀 사도바울은 공적인 전도도 아니요, 개인 전도도 아닌 주님 자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떤 사람이든지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상황과 관계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세례요한은 공적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안드레는 그 공적인 전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로다하는 말을 안드레는 들었습니다. 안드레는 공적인 집회를 통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안드레가 개인적으로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안드레를 통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예가 빌립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공적인 집회를 통해서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어떤 전도자의 도움 없이도 빌립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보면 환경이 구원받는데 관계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고 했습니다. 각 집에서 가르치는 예를 성경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전할 때 집집이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집집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먼저 복음을 전하러 갈 때 환대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 집에 갑니다. 그런데 대접하는 이 집보다 더 잘 대접하는 그런 집에 가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집보다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그런 의미에서 집집이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각 집으로 다니면서 전도와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을 볼 때 문맥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 앞에서 전했고, 각 집에서 전했습니다. 또한 21절에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도 전했습니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먼저 듣게 되어 있고 그 다음에 헬라인들입니다. 이로서 바울은 모든 사람을 그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26절을 보면 영어성경에는 큰 자나 작은 자(개역성경=모든 사람)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리가 많거나 적거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어떤 배경이 있더라도 바울은 그 사람들을 복음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계시록에도 누구든지 큰 자나 작은 자나 와서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자나 작은 자나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자나 작은 자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봅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환경에 있던지 간에 복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을 전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전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께로 향해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완전히 돌아선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를 데살로니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상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와서라고 했습니다. 이 두가지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가지를 에베소에서 전했습니다.

22절에 보면 그의 앞으로의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그는 확신이 있었고 그 다음에 심령에 매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동기부여를 받았고 큰 확신을 가지고 움직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감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17장에서 아테네를 보면서 분을 느꼈습니다. 그는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은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신실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열심히 했고 또한 예비하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능하면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16절에 보면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서둘렀습니다. 그는 서둘렀지만 또한 드로아에서 기다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여행이 바쁜데 왜 드로아에서 기다렸겠습니까? 그는 드로아에 있는 모임에서 떡을 떼기를 원했습니다. 왜 바울이 일주일을 기다렸습니까?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본은 떡을 떼는 날은 안식 후 첫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은 평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드로아에 있는 모임에서 일주일을 기다린 것은 어떻게 보면 이상할 지 모릅니다. 배 안에서 같이 가다가 떡을 떼면 안됩니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종이 같이 여행하고 있으니까 떡을 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모본은 하나님의 지역교회에서 행하도록 주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 사람이 바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사정에 의해서 따로 떡이 허용되는 모본은 없습니다. 또한 몇몇 사람이 어느 유원지에 가서 떡을 뗀다는 그런 모본도 없습니다. 주의 만찬은 모임에 속해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같다고 생각하는 침례와는 다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가지 의식이 있는데 만찬과 침례입니다. 사도행전과 사도들을 통해서 이것이 실행되었습니다. 둘 다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침례와 만찬은 비슷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는 한번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매주 첫날에 자주 행합니다. 떡을 뗄 때마다(자주)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침례는 한번이고 만찬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침례는 개인적이고 여러분은 침례를 받으셨습니까? 침례는 구원의 기초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침례는 순종의 기본입니다. 바울은 구원받고 3일 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구원받고 침례받는 가장 긴 시간이 3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습니까? 침례를 받는 것은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 유익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찬은 집단적입니다. 떡을 떼려 하여 모일 때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서둘렀지만 일부러 드로아에서 이레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여행 도중에 떡을 떼지 않고 모임에서 떡을 떼었습니다. 그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바울과는 달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번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침 뱉음 당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매 맞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못박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를 굳게 결심하시고 이렇게 십자가로 가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여러가지 고난을 당하는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그 어떤 것도 나를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우리성경에 없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결심하는 것에 있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반대가 생길 때 그것을 포기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에스라 4장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멈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반대가 있더라도 일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산에 어려움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 높은 산이 평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힘은 산도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이 어떤 환경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고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야곱 같습니다. 야곱은 문제가 쌓여갈 때 실망했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야고보로부터 떠나갔고 시몬도 그러했습니다. 또한 베냐민도 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대적하는구나. 때때로 우리도 모든 일이 나를 대적하는구나 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성경에서 바울의 확신, 즉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그의 모본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멈추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합당한 자로 스스로 여겼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자기 부모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합니다. 우리 자신을 가능하면 편안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떤 어려움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죽기에 이르렀으나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끝나기까지 그가 책임이 있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정신입니다. 바울도 자기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달려갈 길을 마치려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경주를 경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 여기저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기에 비유하는 곳이 많이 나옵니다. 일을 말하면서 계속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개념으로 경기라인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달리는 것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인내로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달려가는 길은 단거리가 아니고 장거리입니다. 100M면 십 몇 초면 끝납니다. 마라톤은 힘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그런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로 경주할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기에 비유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힘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한다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훈련을 말하는데 훈련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하는데도 시간이 듭니다. 모이는데도 힘이 들고 시간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을 위해서 시간을 유익하게 잘 사용해야 합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운동에 이기려고 자기를 훈련하는 것 같은 그런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도 바울은 그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경기의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기에 이기고도 도핑테스트를 통해서 약물복용으로 실격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는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어기고 달려서 상을 받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상 받기를 위해서는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법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성경말씀을 따르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경주를 경주하십시오. 바울을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달려가기를 잘하더니 그런데 누가 멈추게 하였더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달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중간쯤 식어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주님께 어떻게 헌신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아직 달리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올바른 것을 가지십시오. 또한 이 경기는 지속적으로 달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달려갈 길을 마치려고 했습니다. 그는 중간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전 생애를 돌아보고 자기를 달리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라고 했습니다. 증거하는 이 일은 특별한 집사의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이라는 말이 집사라는 말로 쓰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집사는 그냥 보통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의 일은 아주 폭넓습니다.(우리 성경에서는 일로 표현됨) 여기서 표현된 집사의 일은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형제들이 서서 복음을 전하면 그것을 곧 집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이 일도 집사의 일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선한 일꾼(집사)으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이 집사의 일이 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한 여러 봉사의 일에 집사의 개념이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즉 집사의 일을 말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오늘날 있었다면 동일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에 보면 아킵보도 동일한 일을 받았습니다. 아킵보에게 말하기를 네가 받은 일을 완수하라고 말했습니다. 아킵보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일을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아킵보처럼, 바울처럼 여러분이 하시겠습니까? 아킵보는 해야 할 일을 받았고, 바울도 해야 할 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바울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는 복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복음이 에베소로 확산이 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이 은혜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어떤 이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였는데 반해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권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권위가 운용되는 것을 전파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옮겨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 행하여야 할 의무와 일들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올바로 전해져서 구원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26,27절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남겨두지 않고 다 전했습니다. 그는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진리 모두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28장의 큰 임무였습니다. 제자들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도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행할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또한 모임 생활도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주권도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는 예언적인 것도 가르치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것은 다양합니다. 드려진 삶이 여러분의 영적인 삶에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당신은 밥을 하루에 세번 먹지요? 또 다음날도 세번 먹지요? 당신은 다양한 것을 먹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의 영적인 양식을 다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습니다. 바울이 내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한 이유였습니다. 에스겔 38장으로 가겠습니다. 너는 파수꾼이라고 했습니다. 파수꾼은 적의 군대가 오는 것을 보고 경계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가 나팔을 불면 책임을 면합니다. 그 나팔에 사람들이 경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경고를 받지 아니하면 그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동일한 에스겔서에서 너는 파수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준 말을 사람들에게 전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전한다면 너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네가 전할 것은 내가 준 말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들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동일한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지고 갈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파수꾼 같은 책임이 있다고 인정합니까? 이웃과 그 친구들에게 그 소리를 전달합니까? 여러분의 말을 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파수꾼으로서 우리들의 사명을 완수하십시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책임을 완수합시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양들을 돌보는 책임에 대해서 주님 허락하시면 내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제가 말씀을 좀 더 길게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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