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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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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진보 믿음의 진보

존 그란트

이 저녁에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서 매우 좋습니다. 오늘밤 여러분과 마지막이 되겠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믿는 분들과 지난 밤들을 지냈습니다. 저희들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빌립보서 1장 전체를 읽겠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서는 바울이 첫번째 로마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기록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방문했던 빌립보 성도들에게 빌립보서를 써 보냈습니다. 감옥에서 기적이 일어났던 그 빌립보입니다. 그 빌립보 간수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로마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네 장에서 바울이 무엇에 관해서 기록하는지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1장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었지만 또한 집에서도 생활을 했습니다. 왜 이 위대한 전도자가 로마의 감옥에 가야 하는지 많은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장에서는 왜 바울이 감옥이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장은 그 설명이라면 2장은 그 모본입니다. 바울은 네 개의 모본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의 모본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6,17절에서는 바울 자신으로 모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19~23절까지는 디모데를 모본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는 에바브로디도를 모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네 명의 모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네 명의 모본 가운데 가장 위대한 모본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3장은 권고 내지는 교훈의 장입니다. 그는 격려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직면해 있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4장에서는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을 이 서신은 기쁨의 서신입니다. 여러 번 기쁨이라고 하는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18,26, 2 16,17,18,28, 3 1,3, 4 4,10절 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큰 기쁨을 가지고 썼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기쁨을 가진 것을 여러분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바울로 말미암아 쓴 기쁨의 서신입니다.

1장을 봅시다. 1,2절에서 바울은 도입하며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빌립보라는 이름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이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합니다. 빌립보라는 말은 나는 말들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 빌립보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말들은 힘을 추구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젊은 말들은 달리기를 갈망합니다. 이 빌립보의 젊은 성도들이 마치 젊은 말이 달리기를 갈망하듯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전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말들은 더 큰 힘을 갖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직접 직선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말이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재갈은 그 힘있는 말이 달리는데 올바르게 달리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에서 이 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빌립보에 있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독은 성도를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감독은 어떤 일과 관련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일은 양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바울은 또한 집사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주인을 위해서 태어난 종과 관련된 용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주인에 대해서 종입니다. 또한 이 집사는 성도들을 동일하게 돌봅니다. 이 시작하는 절에서 흥미있는 두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그들에 대한 감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4절에서 기쁨을 말하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음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너희 모든 무리를 위하여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4장에서는 의견이 맞지 않는 두 자매를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자매가 서로 불화 가운데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바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아마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 말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들이 개인적인 일로 그렇게 했다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은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불화를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바울을 4장에서 이 둘에게 서로 친화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의견일치가 안되더라도 그들 모두를 위해서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기쁨을 구한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기쁨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원하는 것이 주님에게 기쁨을 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쁨을 구한 이유는 첫날부터 복음안에서 교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구원받았던 것을 생각해 봅시다. 구원받자마자 복음에 진력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관심을 갖는지 어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구원받자마자 복음에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 복음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습니다.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계속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확신이 있는지 여러분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7절에서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고 바울은 말했으며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마음으로 사랑했습니다. 말을 할 때에 바울은 매우 주의했습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너희들의 마음 속에 갖고 있다 고 말을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마음 속에 빌립보 성도들이 있다고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빌립보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바울을 갖고 있다고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피차간에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변명함에 있어서 함께 교제가운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여러분이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9~11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이 두가지로 인도되기를 바랐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말에 입에 재갈을 물려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듯이 말이죠.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뭐든지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지식 가운데서 점점 풍성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성경지식과 더불어 자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아는 지식가운데서 자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총명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그래서 그 성경을 따라서 사용하므로 우리가 성도를 사랑한다면 모두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성도를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가지고 빌립보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이 직접적으로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바랬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질입니다. 10절에 너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진실해야 합니다. 허물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진실하여 허물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편지의 서두입니다.

이 이후에 바울이 두가지를 마음에 두는 것을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12절에서 마지막까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12절에서 복음의 진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는 믿음의 진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진보라고 부릅니다. 복음의 진보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매우 흥미있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군인이 정글에서 전투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스스로가 길을 개척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이 진보를 확보하는 것은 손쉽지 않습니다. 그 길을 개척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문제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앞이 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형제자매님들, 그리스도인이 쉽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보가 문제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예비해야 합니다. 성경을 듣고 그리스도를 좀 더 알기 위해서.

빌립보 사람들에게 바울은 자신이 왜 로마에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로마에 있기 때문에 나의 복음에 진보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감옥에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가운데서 복음이 진보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에 위대한 진리가 있습니다. 사탄은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기획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성경의 진리가 있습니다. 잘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기획하는 모든 기획은 하나님이 영광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이 기획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기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탄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예를 여러분에게 들려 드리겠습니다. 사탄은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도록 기획했습니다. 그 모든 것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전 세계는 죄 가운데서 사라졌어야 할 것입니다. 우주에서 그 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날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를 어떻게 해서 되는지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12,13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4절도 또한 그렇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복음이 진보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13절에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는 진정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매이게 된 것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에는 다른 죄수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살인자들에게는 바울의 투옥이 그 이유가 분명했을 것입니다. 또한 정부에 반항하는 자들이 바울이 투옥되는 것을 봤을 때 이유가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시위대 뜰에 있는 모든 시위대원들이 바울이 감옥에 들어온 이유를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이전에 없었던 그 그리스도를 여기서 들어냈습니다. 그의 삶은 이전에 한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에 복음이 전파되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 감옥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닫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그곳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4 22절을 보게 되면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힘으로써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로 이전에 없었던 복음의 진보가 되었던 방법인 것입니다.

두번째 복음의 진보가 있는 이유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14~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보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움 없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그 모본이 이들에게도 모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전도의 담대함이 그들의 모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전도자들 중에 두 그룹이 있음을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한 그룹은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이상스럽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을 시기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5절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본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지마는 나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나는 바울이 전한 어떤 일부를 동의하지 아니한다. 바울이 감옥에 있고 나는 복음을 전하므로 바울은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어려움을 줄려고 이들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른 한 부류는 바울을 사랑해서 바울을 격려하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을 실망시키려고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격려하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는 복음이 더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바울이 화를 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방법이지만 그래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진보되는 두번째 이유였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19~21절 안에 있습니다. 첫번째는 복음이 시저의 궁궐에서 전파되었습니다. 두번째는 전도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21절을 보게 되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이 어떤 것을 크게 하면 그것이 점점 더 커지는 것입니다.(여기서는 우리말에 유익하게 한다. 존귀케 한다는 말이 영어에서는 크게 된다는 말로 되어 있음) 감옥이 있으므로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더 크게 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볼 때 자신은 작게 보이고 주님은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옥에 있으므로 바울이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더 커지고 바울은 작아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은 로마 감옥에 붙잡혀 있지만 복음이 진보된 세가지 이유인 것입니다.

바울은 두번째 믿음의 진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믿음의 진보도 있기를 원했습니다.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뒤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서 그렇게 뒤로 물러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복음의 진보를 갈망한다면 믿음의 진보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우리들의 관심사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더 잘 살고자 하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내일을 위해서 열망하는 것은 아마 진보를 위한 것일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진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23절에서 말하기를 나는 그 두 사이에 끼였다고 말했습니다. 첫번째는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두번째는 몸 가운데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로마를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바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둘 중에 끼여서 어느 것이 좋을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좋다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나쁜 것보다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것 중에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에서 그리스어 문법을 어겼습니다. 바울이 기록한 그리스어 문장 중에 유일하게 문법을 어긴 장면이 바로 여기입니다. 바로 그가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제가 한국어를 모르니까 영어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은 더 좋기 때문에, 훨씬 많이 좋다. 원래 이 두 단어는 함께 있어서는 안되는 어휘였습니다. 저는 그가 말한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표현하는 그리스 말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그리스어 문법을 일부러 어기면서 표현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에 관한 모습이 서술된 데가 있습니다. 이 땅에 없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말하려고 할 때, 이 땅에 있는 것 중에 하늘에 없는 것 중에 눈물이 없고, 병이 없고, 연약함이 없고, 슬픔이 없습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그기에 없는 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기에 있는 것을 말할 때 어떻게 말해야 되겠습니까? 그때는 한가지가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기에는 한 인격자가 계십니다. 우리는 그기에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에서 그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그때 말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어로도 그것을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기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슬픔이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걱정과 근심이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다 없어진 것을 알 것입니다. 하늘에 잇는 것들은 우리의 언어를 능가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 마지막 한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가구가 있고 생활하는 도구가 있는 여러분의 집은 참된 집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의 가정에 가구나 도구가 있기 때문에 가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정인 것입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물건이 있기 때문에 가정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정에 가는 것을 하늘에 고향으로 생각한다면 그기에 어떤 인격자가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지 그기에 어떤 물건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늘에는 그리스도께서 그기에 계십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 장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이 땅에 머물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유익을 위해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빌립보 성도 여러분들의 믿음의 진보를 가져올 것이다. 24,5절에서 이것을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에 진보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유익하다고 한 이유입니다. 나는 차라리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지마는 그러나 여러분들이 나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는 풀려났다가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27절에 보면 진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여러분의 생활이 합당하도록 하라.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 내가 알고 있다.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함께 협력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 세가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넘어지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힘을 써서 달렸습니다. 29절에 보면 그들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서 있고, 힘을 쓰고, 고난을 당하면서 믿음의 진보가 있는 것을 보였습니다. 그가 견고히 서 있다는 것은 복음의 진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적들에 대해서 견고히 서 있었습니다. 그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의 빙거, 즉 증거입니다. 견고하게 서 있는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빙거, 즉 증거였습니다. 이들이 앞으로의 영광을 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다 주님 앞에 설 것이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영원한 끝에 선 것을 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거의 영원에 가 서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바울은 그기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뒤를 돌아 빌립보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 임무를 위해서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이 하늘에 가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그들이 바울을 더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는 큰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빌립보 사람들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전장에서 좋은 본을 보였습니다. 이전에 너희들이 나에게서 뭔가를 찾았다. 지금도 내가 싸움가운데 서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볼 것이다. 과거에도 나를 보았고 지금도 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격려를 받을 것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진보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이후에 계속 서신을 진행시킵니다.

제 시간이 거의 다 가버린 것 같습니다. 잠시 동안에 이 서신이 끝나는 부분을 보고자 합니다. 4 7절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보호받는 것을 압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우리가 보호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4 7절에서 베드로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어려움에 휩싸여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군대의 수비대에 의해서 보호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그들이 진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마음과 생각만이 아니라, 사단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공격해서 우리들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에 사탄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무엇이 나오기를 사탄이 바라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덜 사랑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 속에 근심이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지킴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어떻게 이 보호의 보증을 받겠습니까? 6절에 보게 되면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기도하고, 간구해서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에서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강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명은 못해도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그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끝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9절에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 위해서 기도하지만 그러나 여기는 평강의 하나님이 있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것을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습니까? 바로 9절이 그 해답인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바울로부터 그들은 배웠습니다. 그들은 바울로부터 받았습니다. 편지로뿐만 아니라 바울의 육성을 그들은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가르침을 따르라. 바울 자신이 말한 말을 따라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평강이 그 가운데 있다면 평강의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엄청난 값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 1 30 강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