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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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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13~25절입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 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부분은 성도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난 다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용기를 받았다면 주님 앞에서의 책임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삶으로의 부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을 넣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거룩한 삶으로의 부름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13절로부터 그 거룩함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금 거룩한 삶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하셔야 할 것은 마음에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은 어부들에게 사용하는 어휘입니다. 길게 끄는 옷이 있다면 그것을 허리에 동여야 합니다. 배 위에서 어떤 배 위에서 걸릴만한 것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동여야 합니다. 꽁꽁 동여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허리를 동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질질 끄는 옷을 입고서야 어떻게 고기를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사실들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는 길을 도와주지 못할 것들입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에 탐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취미에 시간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을 없앨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마음에 허리를 동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질질 끄는 옷을 입고서는 어부가 고기낚시질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그렇게 거치는 것들이 있으면 안됩니다. 때때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행동하면 너무 편협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좁은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의 모든 것들에 흥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통제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근신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러한 흥분에 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여러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흥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축구경기로 말미암아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흥분할 수 없습니다. 연예나 즐기는 것으로부터 흥분해서도 안됩니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흥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들이 스포츠를 보면 흥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의 흥분하는 것들로부터 피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음을 고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는 자식처럼 여기서 순종하는 자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식이라는 것은 순종한다는 말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순종하도록 훈련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을 때 징계를 받음으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순종함을 가진 것처럼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불순종의 자식들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불순종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들의 아버지는 마귀입니다. 그 존재는 불순종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특성은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이러합니다. 마치 아버지가 그러하듯 아들은 그러한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의 특성을 지닙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그 존재가 불순종하기 때문에 그 자식들도 불순종합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분의 그러한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존재로서 있어야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훈련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식들은 순종하는 그런 특성들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순종하게 됩니다. 훈련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특징만 가지게 되면 됩니다. 그래서 순종의 자식들이라고 저희들을 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아비 마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불순종과 거짓말하는 것이 너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저희들의 아버지는 이렇습니다.

잠시 교훈을 받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정말 저희들의 아버지입니까? 우리는 그 특질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이미 그러한 특질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순종하는 자식처럼의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삶을 본받지 말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살았던 삶을 다시는 되풀이 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 구원받기 전에는 이 세상의 정욕과 욕심을 가졌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지 못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했습니다. 세상의 모양을 좇아서 갔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그 가운데 용도를 만듭니다. 그리고는 경배하거나 좇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예를 좇아서 살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본받아 살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세상의 사욕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사신이라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포츠 우상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고 가는 세상의 흐름을 좇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순종의 자식들이죠. 하늘에 계신 그분이 순종하신 분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그의 특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상속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표현되지 아니한 아주 특징적인 상황입니다.

여기서 또한 거룩하라고 요청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네 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15절입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16절에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레위기 11 44절로부터 인용입니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레위기를 알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레위기를 읽었습니다. 레위기 11 44절에서 우리는 그 구절을 발견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구약으로부터 교훈을 취합니다. 마가는 광야에서 주님께서 유혹받았던 사실을 말합니다. 어떤 책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까? 신명기를 사용했습니다. 3번이나 신명기로부터 인용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모든 마가의 인용은 신명기로부터 왔습니다. 그 경우마다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마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겠습니다. 6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를 말합니다. 마귀를 대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가 중요합니다. 저가 한국어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인용할 만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아셔야 하는데요. 이것은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방법으로 이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마귀가 유혹했을 때에 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모든 경우에 말씀만을 인용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미디어나 말씀으로부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마귀가 여러분들을 시험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들이 말씀으로부터 인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사용하여 그를 대적합니다. 성경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물러가라. 성경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아셔야만 합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예를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군대를 아시죠. 적이 공격합니다. 그래서 총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대적에게 말하기를 내 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데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내가 메뉴얼을 보고 총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을만한 시간을 다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매뉴얼을 읽으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끝난 게임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올 때에 이미 말씀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베드로전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첫번째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모든 것은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저희들이 성경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경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들의 경험이 필요하지 아니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만으로 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룩해야 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17절에서 거룩해야 되는 두번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다른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아버지 하고 입으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의미를 말합니까? 아버지 도와주세요 하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축복해주신 아버지를 부르지 않으십니까? 하늘에 있는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여러분들 스스로 주장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라고 그분 앞에 여러분들의 의지를 피력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분의 특질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분과 같아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거룩해야 하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룩해야 합니다. 14절에서도 그 관계를 보았는데 17절에서도 관계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여기서는 아버지라 부를 뿐만 아니라 판단하시는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크게 존경하는 가운데 이 땅을 지나고 있습니다. 아버지라 부를 뿐만 아니라 판단하시는 자로 부릅니다. 그래서 두 가지 거룩해야 하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실제적인 이유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부름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보겠습니다.

15절에서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언급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다섯번이나 부르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분의 부르심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첫번째 주님을 만났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1장에서 만났습니다.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5장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배에 타셨죠. 베드로의 배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보답으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주셨습니다. 밤새도록 아무런 고기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말했습니다. 오 주여 저를 떠나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취했습니다. 주님을 주님이라 불렀습니다. 그가 죄인으로서 정당한 태도를 주님 앞에서 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로부터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떠났습니다.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다섯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짧게 보겠습니다. 15절에서는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첫번째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로서 너희를 부르신 자가 거룩하기 때문에 라고 했습니다. 2 9절에도 나옵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우리가 어두움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해야 합니다. 온 세상은 어두움에 처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로 이끌림을 받아 나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어두움으로부터 그들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2 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것은 고난으로의 부르심이며 복음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는데, 빛으로 부름을 입었는데, 또한 고난으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3 9절입니다. 복으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이 5 10절에 있습니다. 우리를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큰 다섯가지의 부르심입니다. 거룩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난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영광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렇습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알 것은 그가 우리를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분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여러분을 원하셨습니다. 그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정말로 원하셨습니다. 오기를 원하셔서 불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셨죠. 거룩하기 위해서 빛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복으로 부름을 받고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3절에 보면 고난의 5가지 예를 보게 됩니다. 한 측면은 거룩함에로의 고난입니다. 또한 측면은 영광으로의 복이라는 측면입니다. 이것의 고난이 우리를 둘러쌉니다. 그러나 고난은 5절에만 나옵니다. 그러나 덕은 압도적입니다. 첫번째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여기서 1장에서 발견합니다. 왜 거룩해야 하는지 이미 전술한 바와 같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이기 때문에, 두번째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세번째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18절에서 그 이유를 발견합니다. 구속 때문에 그러합니다.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여기서 언급된 구속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속전이라는 뜻입니다. 속전이라는 것은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주고 나서 내가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 첫번째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불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으로 팔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이요 노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돈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종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노비가 아닙니다. 저희들은 자유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 뭔가 있다. 마귀가 우리들의 주인이었는데 주님께서 돈을 주고 우리를 샀습니다.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가치가 지불된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 마귀와 연관 가운데 있습니까?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은 내가 있었던 곳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속의 두가지 중요한 증언입니다. 첫번째 그분께서 대가를 다 지불하셨다는 것, 우리가 노비로 있던 상태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것 두가지입니다. 그래서 지불하셨는데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구속을 믿었을 때 그분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여기서 구속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상들의 유전한 것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족 가운데 종의 주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하면 노비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19절에서 그 가치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흠이 없었습니다. 점도 없었습니다. 흠이 있다는 것은 배척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점이 없다는 것은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양이 그러하듯이 주님 자신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거룩해야 하는 세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아버지라고 하는 그분과의 관계 때문에, 구속이 주님의 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23절에서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합니다. 거듭났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어로는 새롭게 창조됨,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네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 그분과의 관계성, 구속, 새롭게 재 창조됨. 거듭난 이것이 왜 우리가 거룩해야 되는 이유가 됩니까? 그분의 말씀의 씨는 썩지 않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썩지 아니할 씨로 저희들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구속이 썩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되는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좀더 다른 것을 보겠습니다. 씨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해야 하는 세가지 이유가 또 나오는데 모든 사실들이 저희들이 거룩해야 하는 이유와 관련성이 있습니다. 첫번째 아버지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19절에 보면 어린양이 흠없고 점없기 때문에, 23절에서 거듭난 것이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중요한 사실을 보겠습니다. 이 장의 핵심의 결론을 잡아보겠습니다. 8절에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했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십니다. 아주 주의 깊은 어휘의 사용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가 흥미롭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사랑한다. 사랑에 대한 세가지 큰 어휘가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성경에 발견됩니다. 첫번째는 여러분의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형제간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적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감정을 사용해서 사랑합니다. 또 다른 사랑은 행동으로 옮기는 사랑입니다. 차이점은 느끼는 것과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한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이름합니다. 이것이 사실인데요. 항상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만 이 사랑으로 때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게 되면 이 사랑에 베드로가 관련되어 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이후에 사건입니다. 다시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다시 그 바닷가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일이 그 마음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날에 그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날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만남은 가치가 없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만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부활의 날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15장에서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라며 바울은 기록했습니다. 잠시 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부활의 날에 베드로는 주님께로 회복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다시 주님의 봉사로에 위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들어봅시다. 15절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더 는 무슨 뜻입니까? 수세기 동안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논란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있을거야.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하기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들이 알기를 원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네가 행동하는 사랑이 있느냐? 이 사랑은 말로 표현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무엇인가를 하는 사랑을 베드로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으로 사랑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실패했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 사람이 사랑하는 행동을 사랑으로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에게 뭔가를 해드리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실패했다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이 21장을 보게 되면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것을 말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실패했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실행적인 사랑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의 실패의 대가를 지불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사람으로서 나의 사랑을 드러내려 한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더 많은 클레임(배상 또는 대가 지불)을 위해서 더 이상 준비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실패와 좌절은 지나갔습니다. 더 이상 너는 십자가에 갈 필요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칼을 쥐어 주셨습니다. 이 종의 묶은 것을 끊어주셨습니다. 고기를 잡는 것보다 더 좋은 어부가 이제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실패를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딛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두가지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제 아내를 많이 사랑합니다. 제가 돈이 없을 수도 있는데 매우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저 구두 좀 사주시죠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합니다. 내가 사주기를 바란다. 제가 제 감정을 표현만 한다면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얼마나 그 사람을 사랑하는지를 저의 행동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21장을 통해서는 그러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베드로전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주 흥분되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 베드로를 들어봅시다. 1 8절에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 무슨 말입니까? 보이지 않는 분을 여러분의 행위를 함으로써 사랑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사랑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여러분의 사랑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단지 감정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셔야 합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랑이 바로 참된 사랑입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겸손함이 있습니다. 두 단어를 기억합시다. 잠시 생각을 하겠습니다. 이 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15절을 알아채시겠습니까?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왜냐하면 그것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말했습니다.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잠시 우거하는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19절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을 언급하기 전에 이 사실을 말합니다. 나그네로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미 우리는 나그네라고 자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집에 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거하고 있는 곳은 우리들의 집이 아닙니다. 확실히 세상에 속하는 것은 하나님께 반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께 대해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24,25절을 보겠습니다.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물리적인 씨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를 풀에 비유했습니다. 썩어질 씨는 사라집니다. 풀의 꽃의 영광은 시들고 마릅니다. 마치 그 인생이 죽으면 그 영광이 사그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풀이 많은 꽃을 맺을 수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거듭나게 한 씨는 썩지 아니하는 씨입니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렸던 모든 영화는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영원 가운데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땅에서의 삶은 모두 보상을 받습니다. 또한 주님에 대한 충성스러움도 모두 보상을 받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으로 끝은 맺지만 믿는 자들의 죽음은 영광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가시게 되면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육체는 고통이 없지만 그들의 가슴은 영원히 괴로움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의 영혼과는 사뭇 다릅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잠을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주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와 같이 주님께로부터 환영을 받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는 세 가지 모습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서, 그리고 촛대 가운데로 다니시는 분으로서( 2,3), 또한 그 종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서 계신 분으로서 나타납니다. 우리들의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영접하고자 맞이하신다면 얼마나 용기가 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환영하시고자 서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종들의 집으로 맞아드리시기 위해서. 이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은시간 동안에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마감하는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보게 되면 아바르딘이라는 스크틀랜드의 어떤 작가가 있었습니다. 애딘버러라는 수도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가기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기차 탈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그 애딘버러로 가기 위해서는 길고 긴 터널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긴 터널을 두려워했기에 그래서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가 가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를 보았습니다. 애딘버러로 가는 데는 약 3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를 내려서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긴 어두운 터널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긴 어두운 터널을 두려워할 지 모르겠습니다. 기차가 닿기 전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기차에 탔을 때 잠에 떨어졌습니다. 깨어서 보니까 벌써 애딘버러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돌아가시기 전에 주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어두운 터널을 이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긴 어두움의 터널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숨을 거두는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환영하시고자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 1 28 부산명륜모임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