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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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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4. 5. 19:43 말씀의 분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로마서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로마서 11장 전체를 읽기 바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는 제목이 좀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성경 해석(혹은 해석학)의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하나의 교계를 형성할 만큼 중대한 문제입니다! 진지한 성경학도는 이러한 원칙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는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을 견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제가 비록 읽는데 있어 부담이 될지 모르지만, 결과는 여름철 나른한 상태의 신앙에서 떨치고 일어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인가?

구약성경에서 유대민족에게 주신 예언과 약속 중에 성취되지 않은 부분은 과연 미래에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기독교 교회에 영적으로 성취되는 것인가? 이스라엘을 구약성경에서는 교회로 보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보고 있습니까? 과연 성경의 가르침은 신구약시대 전체에 걸쳐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이 있으며, 그 하나님의 백성을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신약성경에서는 교회로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는 다르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예언과 약속에 대한 해석에 있어 엄청난 차이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이러한 해석의 중요한 차이점을 보여주는 3가지 성경구절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되었는데, 과연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중동의 문자적인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유업으로 얻을 영적인 땅을 말씀하셨습니까?( 13:14-17, 15:18을 보시오) 아브라함과 족장들은 이러한 무조건적인 약속을 문자적(文字的)인 방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을 때,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언약이 궁극적으로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28:25-26).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약속들을 영감받은 선지자가 문자적으로 믿었던 것과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한(logical)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 예로, 이사야 11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온 땅에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고토로 제2차 귀환하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 바다 섬들까지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5에서는 이러한 귀환 기간에 서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러한 귀환은 과거 역사에서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약속된 땅으로 이러한 귀환이 미래에 문자적으로 일어납니까? 아니면 이러한 예언은 미래의 문자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에 대한 것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는 모습으로, 영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6절에서 9절에 나타난 동물세계의 평화로운 상태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러한 에덴 동산과 같은 모습을 미래에 있을 온 땅의 평화와 조화의 시대에 대한 문자적인 예언으로 보아야 합니까? 아니면 상징적인 방법으로 늑대와 같은 사람들양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평화롭게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성경해석학적인 일치를 생각한다면 이 본문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과연 이것을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상징적이고 영적으로 성취될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장래에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성취되는 것으로 볼 것입니까?

세 번째 예로는 에스겔 47장입니다. 이 예언적인 환상에서 에스겔은 장래에 이스라엘을 향한 물질적인 축복을 예언했습니다. 1절에서 10절에 보면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지역에서 물이 흘러나와 사해로 흘러가게 되는 상세한 설명을 보게 됩니다. 그 결과, 사해(현재 생물이 전혀 없는)가 소성함을 얻게 되고 많은, 물고기가 심히 많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축복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것을 여전히 알레고리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가 영적으로 큰 축복을 받아 죽은 것 같은 이 세상에 복음이라는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까? 10절에서 어부는 그리스도인이며,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 그물을 던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까? 이러한 예언적인 환상이 생명수 샘이 되시는 성령의 전인 교회에 대한 것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에스겔의 이 예언적인 환상은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미래의 이스라엘 민족과 팔레스타인 땅에 임할 문자적인 엄청난 축복에 대한 약속으로 볼 것입니까?

 

언제 교회가 시작되었는가?

우리가 이스라엘과 교회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해석상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것을 보여주는 많은 구약성경의 예가 있겠으나, 여기서는 세 가지 경우만을 살펴보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에 대한 많은 예언과 약속 중 성취되지 않은 부분은 영적으로 해석되어 교회에 전가될 수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이러한 성취되지 예언과 약속들은 장래에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인지? 분명히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교회가 구약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이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과 약속들이 신약의 교회로 넘겨졌다는 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졌던 믿음에 의해 교회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면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들이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교회)에게로 넘겨졌다는 것은 합당한 성경적 근거를 갖게 되고, 우리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약시대의 교회로 정의되며, 신약시대의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성경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는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해보면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교회는 결코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순절날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 성경에서 교회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타난 곳은 마태복음 16:18인데, 그곳에서 주 예수님은 (내가)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교회가 구약시대부터 존재해온 것이라면, 주님은 내 교회를 세우리니(I will build My Church)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 교회를 세우고 있는 중이니(I am building My Church)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장차 되어질 일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인데, 왜냐하면 교회는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믿는 또 다른 이유는 신약성경이 교회를 하나의 비밀( 3:1-12)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언가 이상한 일이나 비밀스러운 것을 지칭할 때,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구약시대부터 감추어 왔으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신약시대에 완전히 알려진(계시된) 성경 진리를 언급할 때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만일 교회가 단지 신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칭호를 달리 표현한 것뿐이라면 교회를 비밀이라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비밀은 에베소서 5:30-32에 나타난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라는 위대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는 독특하며 따라서 반드시 이스라엘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약성경에서 비밀로 불리며, 이 비밀이 사도 바울에게 계시되었는데, 이는 교회의 새로운 성격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교회 안에 함께 모여 한 새 사람( 2:15)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새로운이라는 헬라어는 오늘날 새롭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다르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이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전에 있던 그 어느 것과도 - 종류에 있어서나 특성에 있어서나 성격이나 본질에 있어서 - 다릅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해 바울이 한 새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미 존재했던 유대 사람에게 최근에 이방인들을 더하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 이스라엘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로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새로운 이름이며 이스라엘과는 본질에 있어서 다른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에베소서 2:19-20에 보면 이 믿는 이들의 새로운 몸을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한 건물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건물을 세울 때, 건물의 터를 놓는 일은 분명히 처음 하는 작업이며, 터를 세워야 그 후에 건물을 짓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교회가 구약시대에 시작될 수 있단 말인가요?

 

감람나무 예화

로마서 9-11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거나 소위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설득력있는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이 몇 개의 장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지금 신약시대가 도래했고 우주적인(몸된) 교회가 완성되어 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유대 그리스도인들( 6:16에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11:25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불리는)이 교회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하나님께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1장에서 감람나무 예화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이러한 결론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은 오늘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으로 교회의 지체가 되며, 미래에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주님께 돌이킬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26절의 온 이스라엘에 대한 설명입니다. 감람나무 예화는 많은 논쟁이 되고 혼동스러워 하는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성경구절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이 예화에서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받는 위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이러한 특권적인 위치는 먼저 이스라엘이 차지했으나, 지금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장래에 또다시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감람나무 예화를 사용해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받는 자리에서 제쳐졌으며,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돌감람나무인) 들어오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미래에 주님께 돌아오게 되면 또다시 가장 사랑받는 민족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러한 위대한 진리도 비밀( 11:25)이라고 불렸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구약시대에는 감추어졌으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완전히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을 이해하는데 있어 감람나무 가지가 교회의 믿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감람나무는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시는 은혜의 위치를 가리킨다). 만일 감람나무가 교회를 가리키고, 가지가 구약과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면 우리는 참된 믿는 이가 찍혀 떨어져 나가는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감람나무는 먼저는 이스라엘이 차지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특권의 자리를 나타내는데, 이제는 이방인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또다시 이스라엘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감람나무 예화를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로마서 11:26의 예언을 스가랴 13:8-9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구원받게 될 온 이스라엘이란 유대 인구의 삼분의 일이 될 것입니다. 스가랴 13장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죄와 더러움을 씻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삼분지 이가 멸절되며(8), 나머지 삼분의 일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요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9)

이러한 위대한 예언적인 사건에 대한 토대는 현재 예비되어 가고 있으나, 이스라엘의 영적인 대각성은 아마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11:25), 교회가 하늘 집으로 옮겨지기(고전 15:51-58, 살전 4:13-18) 까지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원가지들이 특권의 위치로 돌아오는 시기가 있게 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국가적 회심이 메시아의 재림을 불러오게 되고, 그 후에 이 땅에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왕국이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후에 아직 성취되지 않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은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믿는 이들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으로 불림을 받고( 3:7,29),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축복은 교회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고후 7:1, 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무조건적인 약속은 결코 아브라함의 육체의 자손들에게서 철회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모형 - 구약백성들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나 사건이 신약의 진리를 이루는에 관한 것입니다. 모형이란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 양식으로, 예를 들어 우리 주님도 요한복음 3:14-15에서 자신을 모형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1-11에서 사도 바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일이 거울(모형)이 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 일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형이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실제 상황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영적인 방법으로 해석해서 교회로 대치되는 일이 없습니다. 모형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상적이고 똑바른 방법으로 읽는다면, 그 의미가 매우 분명해집니다. 많은 구약성경의 예언과 약속들은 아브라함의 혈육들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왔던 것처럼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과 약속도 미래의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땅도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지역이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문자적으로 그 땅에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장래 평화적으로 다스리는 지상왕국에서 사자와 어린양이 문자적으로 함께 누우며, 문자적인 사해바다의 문자적인 물이 소성함을 입겠고, 문자적인 물고기가 많을 것이며, 어부가 강가에 서서 그물을 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이 땅에 문자적인 왕국을 세우러 오실 때에 예루살렘에는 문자적으로 세워진 성전이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예언과 약속을 영적으로 해석하거나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해서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소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 하는 교회로 적용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예언과 약속의 문자적인 성취를 부인하는 것은 역사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교회로 전이함으로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오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지키는 분이신가, 아니면 그대로 행치 않으시는 분인가요?

복잡한 해석은 흔히 좋지 않은 해석을 의미합니다! 일관된 해석을 견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전체를 통해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입니다!

David R. Reid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