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의 원칙(12)
숫자 1
어떤 이는 말하기를, “신자의 마음을 강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는 영적인 수리학(數理學)이란 주제 이다”라고 했다. 그것은 한분 절대자만이 성경의 모든 책의 저자이심을 드러내는 주제이기도 하다.
숫자 1은 으뜸되는 숫자이다. 다른 모든 숫자들은 이 1에 의존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숫자들에 우선하며 그것들의 모태이다. 다시 말해서 0에서 9에 이르는 모든 숫자는 이 숫자 1에 의존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숫자이다. 그분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주가 없이는 피조물이 있을 수 없으며 계획자가 없이는 계획이 있을 수 없다. 제작자가 없이는 어떤 제작도 가능하지 않으며 구원자가 없이는 어떤 구 원도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두개의 으뜸이란 있을 수 없다. 숫자 2는 차이의 존재를 확증한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우리 자신의 뜻은 하나님의 뜻을 배척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이 길이니 그 길로 행하라”는 조용하고 작은 속삭임을 들어왔다. 그러나 자아(自我)의 길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은 거절당한다. 그분의 길은 위로를 약속하나 인간의 길은 혼란을 낳는다. 그분은 모든 축복이 흘러 나오는 복의 근원이 되신다.
이 으뜸되는 숫자는 다른 모든 숫자를 배제시킨다. 이점에서 우리는 하나님만이 지니시는 절대성을 엿볼 수 있다. 그분은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으셨다. 그분은 첫 사람을 지어야 할 아무 의무가 없으셨다. 그분은 인류를 자신의 계획에서 배제시킬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겸손의 은혜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악된 인간에게 내려졌다.
하나님은 그와 교제를 갖기 위해서 아담을 지으셨다. 그 교제는 이브가 사단에게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생략하고 변경시킴으로써 깨어졌다. 창세기 3장에서 우리는 그녀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죄를 증오하시는 까닭에 아담과 이브를 멸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그러나 그분은 친히 동산에 있는 그들에게로 내려오셔서 짐승의 가죽으로 그들을 입히셨다.
그들은 진정으로 그들의 죄악된 행동을 깨달았으며 그들의 죄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무화과 잎으로 그들의 몸을 가리웠다. 그러나 무화과 잎에는 피가 없었다. 한 생명이 희생당해야만 했다. 그들이 가죽 옷으로 입혀지기 위해서는 짐승의 죽음이 불가피했다. 이것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생명으로 생명을 대신한 첫번째 언급이며 하나님의 어린양이 자신의 흘린 피를 통해 죄를 없이 하신 갈보리를 멀리 가리킨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그 분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자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속성을 지니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 그분은 우리로 그분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성품에 참여하셨다. 그분은 우리로 한 친구를 소유할 수 있도록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버림 당하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사 그분의 완성된 사역을 믿고 열납될 수 있도록 그분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크고 흰 보좌의 심판(백보좌 심판) 앞에 선 죄인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심은 내가 나를 위한 그분의 아들의 완성된 사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숫자 1은 다른 모든 숫자에게서 독립되어 홀로 처해 있다. 하나님은 독립적이며 우리는 의존적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적인 속성을 입고 그분의 아버지께 기도할 필요가 있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존적인 상태를 깨닫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짐을 제거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에게 얼굴을 돌림으로써 얼마나 종종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는지! 하나님은 모든 슬픔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언제 우리는 믿음의 학교로 되돌아가 의심을 해결해 주고 초자연적인 삶을 약속하는 그 유일한 책을 다시금 상고해 볼 마음을 갖게 될는지!
숫자 2는 차이를 확증해 준다. 모든 사람이 숫자 1을 믿지 않은 까닭에 인류는 두 부류,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로 나뉘었다. 숫자 2는 첫 아담 안에 있는 자들과 마지막 아담 안에 있는 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입증해 준다. 숫자 2는 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부르셔야 했는지 이유를 설명해 준다. 죄는 정죄를 낳았고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숨도록 했다. 오늘날도 죄의 관영함과 만연함으로 인해 “네가 어디 있느냐?”는 동일한 질문이 하늘로부터 여러분의 존재 속으로 울려오고 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두가지 가능성이 있으나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니 그것은 아담 안에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네가 구원을 받았느냐 아니면 구원을 받지 못했느냐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그 단순한 복음 메시지와 진리를 들을 모든 기회를 저버려왔다면 그렇다면 그러한 거부하는 태도를 버리고 빌립보 간수처럼 겸손히 묻기를 바란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러면 당신은 모든 세대에 걸쳐 내려온 유일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라라”(행
숫자 1을 상고해 보는데 있어 우리는 “최초 언급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성경연구 원칙을 적용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주어진 예수님의 첫번째 기록된 말씀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 말씀이 십자가 위에서 발해진 “다 이루었다! “는 그분의 마지막 말씀에 빛을 던져주는가? 무엇이 이루어졌는가? 그분의 아버지의 일이다. “그분이 오신 것은 죽기까지 복종하시기 위함이었는바 곧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사역적인 말씀은 “기록되었으되” 라는 세차례의 반복된 언급이다. 이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인 주 예수님의 사역에 관해 빛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성경의 첫번째 책은 창조와 생명의 수여와 유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절대성을 보여준다. 그 첫번째 책에서 우리는 믿음에 의한 의와 칭의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그 책은-요셉 안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담고 있으며 이삭의 제사 안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담고 있다. 그리고 가인의 첫 곡물과 아벨의 양 속에는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나있다.
두개의 첫째가 있을 수 없으며 첫째되는 둘도 결코 있을 수 없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두개의 첫째에 대해서 결코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한개의 첫째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떠나서는 어떤 진정한 시작도 있을 수 없다. 그분은 시간과 순위에 있어서 첫째이시다. 창조, 구속, 구원 등 모든 것은 그분과 함께 시작되었다.
숫자 2
두번째 숫자 2는 구별과 분리의 수이다. 숫자 2는 차이가 있음을 확증해 준다. 출애굽기
우리는 창세기 첫장에서 땅의 물과 궁창의 물이 나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밤과 낮을 나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구별에 대한 비췸이 있다. 빛과 어두움은 혼합될 수 없다. 하나님은 구별을 두셨다. 하나님이 관계되는 한 지상에는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해 왔대. 인류는 두 부류로 구분된다. 첫 아담이 실패했으므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어 주셨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가져왔으며 둘째 사람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성경에는 숫자 2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때때로 “둘째”는 악한 속성을 지닌다. 이브는 창조된 두번째 인간이었다. 그녀는 오직 한 분의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인격체가 동산 안에 들어왔으며 그 인격체는 타락을 초래케 했다. 그 한 분의 초자연적인 존재는 하나님이셨고 두번째 초자연적인 존재는 사단이다.
신약성경에서 두번째 서신이 있는 경우마다 그 둘째가 대적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고린도후서는 대적의 권세를 부각시키며 데살로니가후서는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의 역사(投事)를 부각시킨다. 디모데 전서가 교회의 규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비해 디모데후서는 교회의 황폐함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후서는 활동중인 배도의 역사를 보여주며 요한이서는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숫자 2는 구분과 구별을 암시해 준다. 두마리의 새가 있는데 하나는 죽임을 당했고 하나는 자유를 얻었다. 두마리의 염소가 있는데 하나는 죽임을 당했고 하나는 자유를 얻었다. 두 주인이 있으며, 옛 것과 새 것의 두 언약이 있다. 가인과 아벨이 있으며, 이스마엘과 이삭, 야곱과 에서, 와스디와 에스더가 있다. 창세기
이어서 유명한 분리의 장으로 롯과 그의 딸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 멸망당한 자들과 분리되는 장면을 담은 창세기 19장을 상고해 보자. 이 장은 숫자 2로 가득차 있다. 성경을 열어 이 장을 주의깊게 읽으면서 1절의 “두 천사”, 4절의 두 부류의 연령층 “노소”, 8절의 “두 딸”, 11절의 두 부류의 신분인 “대소(大小)”, 17절의 “들과 산”, 24절의 “소돔과 고모라”, “불과 유황”, 30절의 “집과 굴”, 37, 38절의 “모압과 베냐민” 등을 보라.
또 하나의 유명한 분리의 장은 마태복음 7장이다. 들보를 가진 사람과 티를 가진 사람,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 무너지지 아니하는 집과 무너지는 집 등을 보라.
이 숫자 2는 증거(證據)를 상기시킨다.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마
우리 주님은 “칠십인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두 증인에 대한 기타 예로는 갈렙과 여호수아, 모세와 아론, 엘리야와 엘리사, 바울과 바나바, 베드로와 요한, 변화산상에서의 모세와 엘리야, 그리스도의 부활시의 두 천사, 그분의 승천시에 그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증거한 흰옷 입은 두 사람 등을 들 수 있다.
미래의 형벌과 영원한 분리를 증거하는 다음 구절들은 각각 성경에 두번씩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지옥 꺼지지 않는 불”(막
헬라어 “알레투오”는 증거에 대한 표현으로 성경에 두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한번은 “참된 말을 하므로”로(갈
모쪼록 성령의 저작을 상고하는 가운데 두 증거(구약과 신약)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한결 소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숫자 3
다음으로 연합, 동조, 협력, 완전 및 완성의 숫자인 3을 대하게 된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숫자이다. 한 하나님 안에 세 위(位)가 있으며 세 위는 각각 신성의 완전함을 지니고 있다.
이사야 6장에서 스랍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쳤다. 그들이 세번만 하고 그쳤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거룩하다”를 한번 더 외쳤다면 그 위엄이 더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나 이 스랍들은 하나님의 삼위 일체성(triunity)을 선언하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위 안에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삼중적인 위격(personality)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한번은 어떤 작은 여자아이가 “한 분 안에 세 분, 세 분 안에 한 분, 그리고 그 가운데 계신 분께서 내 편이 되시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보다 더 삼위일체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세가지 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분의 사랑은 설명을 초월하며 비교를 거절하며 묘사를 무력화시킨다. 하나님은 빛이다! 그분은 모든 물질적, 영적 빛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은 영이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죄 가운데 있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세상의 빛을 영화롭게 하셨다.
우리 주님의 제 삼일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 준다.
사람의 능력은 그 일을 이룰 수 없었다. 요나는 그리스도의 장사됨과 부활에 대한 증표로서 삼일 삼야를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그리스도는 “제 삼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분은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세 시간은 빛 속에서, 세 시간은 어둠 속에서 보내셨다.
세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야이로의 딸, 과부의 아들, 나사로. 여기에 인간의 모든 성장 단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능력의 완전함이 나타나 있는데 야이로의 딸은 열두살에 불과한 소녀였고
그리스도의 직임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이는 그분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분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셨다. 그분의 목자로 서의 완전함이 그분의 세가지 칭호에 나타나 있는데 그분은 선한 목자요, 목자장이요, 큰 목자이시다.
시험을 당할 때에도 “기록되었으되”라는 삼중적인 언급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함이 나타나 있다. 그런가 하면 죄의 완전함도 같은 식으로 나타나 있다. 인간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등 삼중적인 시험을 당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시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험들이 이브의 타락을 불러왔다. 그녀는 그 과실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하다고 보았다. 광야에서 사단은 그리스도를 시험했는데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천하 만국을 보인 것”은 안목의 정욕을, 그리고 “뛰어내리라”는 것은 이생의 자랑을 말해 준다.
인간에게는 세가지 적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과 육신과 사단이다. 세명의 주요 배도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인과 발람과 고라였다. 계시록에는 죄의 소멸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세 더러운 영”, 즉 악의 삼위일체의 운명과 때를 같이 한다. 그와같이 사단은 하나님의 위대한 “모방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거룩하신 분을 모방하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구약성경을 살펴보더라도 그 “어두움의 권세자”를 흑암 가운데 쳐 넣으신다.
성막은 바깥 뜰, 성소, 지성소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짓는데는 금, 은, 동의 세가지 금속이 사용되었다. 여기에 우리를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인성을 입은 신성이 있다. 또한 청색, 자색, 홍색의 세가지 색깔이 언급되었다. 왕으로서 거절당하신 하늘에 계신 분께서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다. 또한 뜰 문, 성막 문, 휘장의 세 입구가 있었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절기로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의 세 절기가 있는데 이들은 구주의 초림시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강림 및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각각 보여준다.
성부께서 하늘로부터 그 아들에 대해 세차례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 아들의 순종과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한 그 온전한 충성을 그분께서 기뻐하셨음을 보여준다(마
여러분은 세 인물이 성경에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을 관심있게 살펴본 적이 있는가? 여기에는 세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있어서의 완전함이 나타나 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셈과 함과 야벳,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등이 그러하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포도와 석류와 무화과 등 세가지 과실을 가지고 온 점을 주목해 보면 약속된 땅의 완전한 속성을 엿볼 수 있다.
문둥병자의 치료나 제사장의 성별에 대해서 살펴보면 완전한 성별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을 엿볼 수 있다. 제사장을 임명할 때는 피가 사용되었다. 피가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와 오른 발 엄지에 발라졌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삼중적인 성별이 행해졌던 것이다.
유다서는 작은 책인데도 불구하고 세가지 인사, 세가지 묵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세가지 본, 죄에 대한 세가지 표현, 세가지 유형의 배도, 세부류의 악한 일꾼들, 세가지 송영 등 숫자 3으로 가득차 있다.
여러분의 묵상에 도움이 되도록 여기에 하나님의 세가지 큰 은사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제시해 보겠다. 믿음은 우리 자신의 의존을 말해주며 소망은 우리 자신의 부족을 말해주며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해준다. 믿음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며 사랑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은 축복을 필요로 하지만 사랑은 축복을 베풀어준다. 소망과 믿음이 있기 전에 사랑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했다. 사랑은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했다.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그분의 모든 것이다.
(7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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