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윌리암 맥도날드
무엇이 해로울까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은 왜 나쁠까요?
1) 무엇보다도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마
2) 그것은 현세의 엄청난 필요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잠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영적 살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겔 33:6).
그리고 그것은 축재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음을 공공연하게 증거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구약시대에 굶주리던 두 명의 문둥병자가 많은 양의 식량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굶주림을 채운 후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나누려고 달려갔습니다(왕하
3) 그것은 세상의 엄청난 육체적 필요에 냉담하기 때문입니다(잠
이 세상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은 우리의 대문 앞에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금 듣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2,45).
4)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에게 비평할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롬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예수님이 우리보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호화로운 집과 사치스러운 자동차, 식도락가들의 음식, 값비싼 의복에 탐닉하는 분명한 모순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교육을 받은 온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말해 보십시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비평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이 맹렬하게 반대하는 것은 예수님의 윤리가 아니라 뼈를 깎는듯한 이 궁핍한 세계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쌓아 올리는 재물인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빛 슬리퍼를 신은 사람들이 교회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거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다 떨어진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5) 그러나 우리는 불신자에게 미치는 영향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모습을 관찰합니다. 우리의 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의 가치관은 일요일에 우리가 전하는 감동적인 멧세지에 의해 많이 드러난다기보다는 우리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추구하는 목표에 의해 많이 드러납니다.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장막”의 값을 평가함으로써 우리의 순례길의 진실을 판단합니다. 펜으로 싸인 한번만 하면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자금지원을 해달라고 강력하게 호소할지라도 그들은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허비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본을 따라가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
6)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왜 악한지에 대하여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말
7) 청지기 된 우리가 재정 문제에 있어서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성경의 일부를 우리에게 닫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마
“예를 들면,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어떤 공부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삶 및 책임과 무관하면 무관할수록 우리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악한 왜곡성(歪曲性)은 타당한 결론을 내리는 일에 적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부가 우리의 창조주에 대한 책임에 밀접하게 관계되면 관계될수록 우리의 악한 본성은, 우리가 믿기를 원치 않는 진리들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리려고 더욱 노력하며, 또한 그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가설에 집착하려고 더욱 노력합니다.”(fredk. A. Filby)가 쓴 Creation Revealed에서 인용).
해링톤 리즈(Harrington C. Less)는 이것과 연관지어 언젠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문명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그의 호주머니이며, 설교자는 청중들의 호주머니를 건드리는 설교를 할 때 가장 격렬한 싸움 중의 하나를 싸웁니다.” 우리가 시온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에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가르치는 말씀들이 나와는 거의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순종하지 않는 말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 불순종하는 것도 우리에게 삭제된 성경을 갖다 주는 저주를 초래합니다(마
8) 재물을 축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재물을 갖고서도 그것을 의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그것을 얼마나 의뢰하고 있는지를 잘 모릅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잠
부자는 돈, 곧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며. 자기에게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돈을 의지합니다. 따라서 만일 그가 그것을 한꺼번에 갑자기 잃는다면 그의 버팀목과 지주(支柱)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는 돌연한 공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는 보이는 은행 금고를 더 의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빼놓고는 의뢰할 사람이나 사물이 없다는 생각은 신경의 붕괴를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있으면서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재산이 있거나, 또는 다른 몇가지의 기분 좋은 보증이 있다면 우리는 우연한 사고와 변화에 대해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물론, 이와 같은 느낌은 매우 일반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불안한 마음으로 불신하는 위험에 놓여있습니다.”(사무엘 콕스, Samue1 Cox).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계속적인 위기의식을 갖고 그분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물을 이 땅에 쌓아놓을 때 그분의 뜻은 우리 때문에 좌절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참된 보장을 갖는 유일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굳게 하려 하심이라”(롬
믿음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유일한 삶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히
하나님의 약속만큼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은 당연히 걱정으로부터 해방된 삶입니다. 신경과 감정의 무질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로부터 생겨납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삶입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행할 때에 우리는 인간의 재능과 영리함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짧은 불신자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늘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음의 삶이 그 뒤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편에서의 의도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의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위치에 자기 자신을 두어야 합니다. 그는 자기 소유를 전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남겨놓은 것들과 기타 다른, 거짓된 지주들을 제거할 때에만 비로소 그는 참으로 은혜의 깊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9)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서 여전히 배척을 받으시고, 그분의 종들이 핍박을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왕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분을 욕되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묘사하기를,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가상 훌륭한 옷을 입고, 스타디움에서 가장 비싼 좌석에 앉아 있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이것과 동시에 그는 사도들을 묘사하기를, 투기장 안에 있어 맹수들에게 삼킬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
고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면류관을 쓰시기 전에 왕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대관식에서 군주기 면류관을 쓰기 진에 더 낮은 지위에 있는 인물들이 삼중모(三重帽)를 쓰는 것은 심상치 않은 불경(不敬)을 의미합니다.
10)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주 예수님의 본에 정반대가 됩니다. 그분은 한없이
신약성경의 원리를 살펴보면 가난한(poor)으로 번역된 단어에 해당하는 원어가 두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생활 필수품 외에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노동자의 상태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재물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주 예수님을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는 두 번째 것이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본을 끝까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11) 재물이 지니는 또 다른 해악은 기도생활을 손상시킨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물자들이 다 장만되어 있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해달라고 구하는 가식입니다. 예를 들면, 믿는 우리 자신이 어떤 계획에 필요한 돈을 즉시 제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소요되는 자금을 공급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이 자기 돈을 사용하지 못하실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12)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축적하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자가 되려는 소망을 갖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초기 성도들의 가난은 자산이었지 부채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은 기독교는 하늘로부터 왔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전도자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청중들에게 줄 돈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청중들을 겁나게 할 군대를 대동하고 있었다면 불신자들은 그들의 성공에 놀라울 것이 없다고 반박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제자들의 가난은 그와 같은 반박을 즉시 묵살할 수 있었습니다. 뇌물을 주거나 순종을 강요할 어떤 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비천한 갈라디아 사람 몇이 육에 속한 사람들의 구미에 전혀 맞지 않는 가르침을 가지고 세상을 뒤흔들었으며, 로마제국의 외모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파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진리였습니다.”(J.C Ryle). 몽고의 길모어(Gilmoyr)는 한 때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만일 제가 부자로 그들에게로 간다면 그들은 계속 구걸을 할 것이며, 아마도 저를 선물 주는 사람으로만 알지 그 밖의 다른 사람으로는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가 오직 복음만을 가지고 간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놀라운 선물로부터 그들의 주위를 분산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에서 앉은뱅이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어떤 것을 적선해 달라고 요구하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198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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